07. 나의 새언니가 되어주세요! (13)
예상은 하고 있었다. 카롤리나 황후가 클레어의 실력을 눈여겨보며 탐낼 때부터, 시오네트라 버젯을 제국에 다시 불러들였을 때부터, 어느 정도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클레어에게 어떤 제안을 하든, 클레어가 어떤 선택을 하든 자신은 묵묵히 따르고 기다릴 것이라 다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상을 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해도, 실제로 그 말을 듣는 순간에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웃으려고 했는데, 웃어지질 않았다. 레이몬드는 지금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게 됐다.
싫다고, 가지 말라고,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계속 내 곁에 있어 달라고, 아니면 미리 결혼식을 올리고 만천하에 당신이 내 아내라는 걸 알릴 수 있게 해달라고, 애원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느라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클레어도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나를 기다려 줄 수 있냐고, 아니, 기다려 달라고 말할 수 없었다.
레지나 아카데미는 입학부터 졸업까지 최소 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고, 교칙 상 전원 기숙사 생활이 원칙이었다. 그 말은 클레어도 최소 2년은 이곳 제국을 떠나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당연히 2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레이몬드와도 떨어져 지내야 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듯이, 그 사이에 레이몬드에게 달리 사랑하는 여인이 생길 수도 있었다. 저 같은 건 잊어버리고 훨씬 더 아름답고 멋진 여성과 미래를 함께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때 클레어는 레이몬드를 원망하고 싶지도, 그의 발목을 잡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기다려 달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지금 당장 미래를 약속해달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나도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슬픈 빛을 띤 레이몬드의 눈동자가 한참 만에야 어설픈 미소를 흘렸다. 클레어는 처음부터 조금씩 변해가는 그의 표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충격을 받은 듯 굳어졌다가, 애원하는 듯한 눈동자로 저를 바라보다가, 참고 인내하듯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다시 흐릿하게 웃으며 저를 바라보는 근사한 눈동자를 계속.
부탁? 클레어는 레지나 왕립 아카데미에 가겠다는 제 말에 대한 대답 대신 다른 말을 꺼내는 그를 보며 살짝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레이몬드가 클레어에게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이제 진짜 연인이 된 거잖아요.”
창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을 받은 그의 눈동자는 아름답다 못해 요사스러운 분위기마저 흘렀다. 너무 아름다워서 오히려 두렵다는 생각이 든 건 처음이었다. 클레어는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가 침대의 헤드 보드에 가로막혀 움직임을 멈췄다.
갑자기 몸을 뒤로 물리는 클레어의 행동에 레이몬드의 눈동자에 도리어 의아함이 떠올랐다. 레이몬드는 클레어가 물러난 만큼 더 다가와 시선을 묶어둔 채 말했다.
“그런데 아직도 2황자 전하는 이상하지 않아요? 나는 클레어를 이름으로 부르는데.”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긴장하여 그를 바라보던 클레어는 당황한 눈동자를 깜빡였다.
클레어는 이리저리 시선을 굴리며 잠시 고민하다 조심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레이몬드님……?”
“님도 싫어요.”
여기까지도 상당한 용기를 낸 거였는데, 레이몬드에게 만점짜리 평가는 받지 못했다.
그가 원하는 게 뭔지 모르는 건 아니지만, 왠지 조금 망설여졌다. 줄곧 2황자 전하였던 그를 갑자기 이름으로만 부르려니 정말 이래도 괜찮은 걸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본인이 저렇게 원하는데 그 마음을 무시할 순 없었다.
클레어는 조금 더 용기를 내어 두 주먹을 꼭 쥐고 단숨에 말했다.
“레이몬드.”
차마 얼굴을 똑바로 보진 못하고 그의 이름을 부른 뒤, 클레어는 슬쩍 레이몬드의 반응을 살폈다. 기뻐하며 웃는 얼굴을 상상하며 그의 얼굴을 힐끔거렸건만, 어째 생각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레이몬드는 조금 놀란 얼굴이더니 저와 눈이 마주치자 휙 시선을 피해버리기까지 했다.
제가 뭘 잘못한 걸까. 아까보다 더 당황한 클레어가 어찌할 바를 몰라하는 사이, 레이몬드가 한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너무 그렇게 보지 마요.”
그제야 클레어의 눈에도 목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레이몬드의 얼굴이 보였다. 클레어는 이해가 가지 않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가, 설마 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혹시 부끄러워하는 걸까. 얼마 전에는 그렇게 야하게 입을 맞춰왔던 사람이 겨우 이름을 불린 걸로 저렇게 부끄러워하는 게 신기했다.
레이몬드는 자기가 이름을 불러 달라 요구하고선 막상 클레어의 목소리로 제 이름을 들으니 가슴이 너무 뛰어서 곤란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자꾸 시선이 가는 클레어의 입술이 오물거리며 제 이름을 뱉어내자 얼굴뿐만 아니라 몸 전체가 홧홧해지는 느낌이었다.
저도 이런 제가 민망하여 눈을 들지 못하는데, 클레어의 손이 다가와 제 얼굴을 가린 레이몬드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 왔다.
“얼굴, 보고 싶어요.”
그러고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그렇게 말해오는데 거부할 수가 없었다. 레이몬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을 내리고 다시 클레어와 눈을 마주했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제 얼굴을 응시해오는 클레어가 갈수록 더 예뻐 보여서 정말 곤란해도 너무 곤란했다.
레이몬드는 아예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레이몬드가 눈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쑥스러워하자 도리어 클레어는 긴장이 풀린 듯 쿡쿡 소리 내어 웃었다. 제 기분이야 어떻든, 클레어의 웃음소리가 듣기 좋다고 생각하던 레이몬드가 느리게 움직였다.
레이몬드는 이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제 시선을 잡고 놓아주지 않던 붉은 입술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클레어가 피하지 않고 가만히 입술을 받아주자 가볍게 시작했던 입맞춤이 점점 깊어졌다. 호흡이 가빠지고 더운 숨이 얽혔다. 레이몬드는 이대로 클레어를 끌어안고 전부 제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심을 꾹 눌러 참고서 간신히 입술을 뗐다.
어느새 붉게 달아오른 클레어의 눈동자가 의아함을 담고서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만두느냐고 묻는 듯한 눈동자에 남아있던 인내심이 날아가 버릴 것 같았다. 레이몬드는 간신히 이성의 끈을 잡아챈 채로 깍지낀 클레어의 손을 더 강하게 붙잡았다.
“난 못 기다려요.”
순간 멈칫하며 슬픈 빛으로 물드는 연갈색의 눈동자를 향해 그가 말했다.
“만나러 갈게요.”
애초에 죽어도 포기할 마음 따윈 없었다. 결코 제 손에는 닿지 않을 것 같던 존재가 기적처럼 지금 제 곁에 있었다. 간신히 손에 넣은 그녀의 옆자리를 고작 이런 일로 놓친다는 생각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였다.
“레지나 왕립 아카데미는 매달 4번씩 수업 없이 쉰다고 들었어요. 그날만큼은 아카데미에서 나와 자유롭게 지낼 수 있다고.”
아무리 거리가 멀어져도, 만날 수 없게 되어도, 결국엔 당신에게 돌아오겠다는 말을 듣지 못해도.
자신은 몇 번이고 다시 그녀를 사랑하게 될 테고, 이젠 그녀를 위해 제 곁에서 놓아주겠다는 어리석은 생각도 버린 지 오래니까.
“그때마다 무슨 수를 써서든 반드시 만나러 갈게요.”
결연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 레이몬드를 놀란 눈으로 응시하던 클레어의 눈동자가 일그러졌다. 클레어는 북받치는 감정을 꾹 억누른 뒤 물기가 어린 눈동자로 웃었다. 레이몬드가 눈물을 닦아주려는 듯 뻗어온 왼손을 붙잡아 이번엔 자신이 그의 약지에 입술을 눌렀다.
“전하의, 레이몬드의 옆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 돌아올게요.”
그리고 그의 발목을 붙잡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입 밖에 내지 않았던 미래를 처음으로 약속했다.
줄곧 기다렸고, 듣고 싶었던 말이 클레어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자 레이몬드의 눈동자도 붉어지기 시작했다. 순간 밀려드는 복잡한 감정들에 레이몬드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 겨우 미소 비슷한 걸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다.
“지금도 내겐 충분히 과분한 사람이에요.”
클레어의 양손이 다가와 레이몬드의 뺨을 감쌌다. 그리고 위로하듯 가만히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댔다. 레이몬드는 클레어가 하는 대로 얌전히 눈을 감고 기다리다 천천히 손을 뻗었다.
작고 가녀린 등을 끌어안으니 얇은 천 너머로 미치도록 부드러운 피부가 손바닥을 통해 느껴졌다. 손끝에 걸리는 그녀의 잠옷이 방해물처럼 느껴졌다. 입맞춤이 깊어지고 혀가 얽히며 끈적하고 거친 숨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겨우 진정시켰던 몸이 클레어에 대한 갈증으로 다시 달아올랐다. 레이몬드는 이대로는 정말 자신이 클레어를 전부 집어삼키게 될 것 같아 조금 무서워졌다.
한 번은 제동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어떻게든 그녀의 몸에 조금이라도 더 닿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제가 입고 있는 옷도 거추장스럽고 짜증이 났다. 레이몬드는 한 손으로는 클레어의 허리를 끌어안고 입술을 탐하면서, 다른 한 손으로 제 옷을 거칠게 벗어냈다.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잠시 서로의 입술이 떨어진 순간 클레어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레이몬드가 성급한 손길로 겉옷을 벗어 던지고 자신의 셔츠 단추에 손을 대다 말고 의아한 시선을 던져왔다.
“아카데미 편입에 대해 유리님께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어요.”
당장 결혼식은 안 올리고 최소 2년이나 아카데미로 떠나겠다는 말에 유리가 보일 반응은 안 봐도 뻔했다. 클레어의 말에 레이몬드도 벌써 지친다는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나도 어렵네요.”
온갖 난리를 다 쳐대며 또 한바탕 소란을 피워댈 유리를 생각하니 머리가 아파왔다. 레이몬드는 질렸다는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다 멈칫했다.
레이몬드는 무심코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여 셔츠 단추를 하나 더 풀었다. 그리고 아직도 무해한 얼굴로 웃고만 있는 클레어를 살짝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나랑 이러고 있으면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네? 아, 그게…… 앗!”
불쑥 다가온 레이몬드의 손이 클레어의 허리를 당겨 자연스럽게 침대에 눕혔다. 순식간에 시야가 뒤집히고 침대에 눕혀진 클레어의 눈이 동그래졌다. 제 얼굴 옆에 손을 짚고서 저를 내려다보는 레이몬드의 얼굴이 가까웠다.
근사한 턱선을 따라 내려가면 단추가 풀린 셔츠 사이로 잔근육으로 꽉 짜인 탄탄한 몸이 유혹하듯 클레어의 시선을 끌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나이도, 몸도 아니건만 클레어는 순간 눈 둘 곳을 찾지 못하고 다급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하지만 레이몬드의 입술이 제 귓가에 내려앉자, 클레어는 그것도 곧바로 후회했다. 클레어가 흠칫하며 다시 그를 돌아보았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레이몬드가 다시 깊이 입을 맞춰왔다.
“멈추려면 지금뿐이에요.”
오랜 갈증에 시달린 사람처럼 거칠게 파고들면서도 다정한 입맞춤에 정신없이 휩쓸려갈 때였다. 머릿속이 몽롱하고 몸은 뜨거워서, 더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하게 될 즈음 레이몬드가 말했다. 클레어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당장이라도 저를 집어삼킬 것처럼 원하는 눈을 하고서, 애써 스스로에게 제동을 걸고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그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