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나의 새언니가 되어주세요! (12)
레이몬드는 한쪽 손으로 시트를 짚고 좀 더 가까이서 클레어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자세히 보니 눈가가 발갛고 희미하게 눈물 자국이 남아있었다. 역시 또 울었던 걸까.
낮에는 카롤리나 황후와 시온이, 밤에는 유리와 알렌이 클레어를 혼자 두지 않았다는 걸 안다. 개인 수업을 마치자마자 득달같이 달려온 두 꼬맹이가 밤늦게까지 클레어를 붙들고 있었다는 얘기는 이미 부하들로부터 전해 들었으니까.
셋이서 함께 저녁을 먹고, 사이좋게 웃고 떠들고, 그러다 유리 녀석이 수시로 결혼식 얘길 꺼내고, 클레어가 난처한 웃음을 흘리며 넘기고, 알렌이 꾸벅꾸벅 졸다가 유리와 나란히 각자의 방으로 끌려 나간 것까지.
유리와 알렌 앞에서는 눈물을 참다가 혼자 남겨졌을 때 울고 있었을 클레어를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그때 제가 곁에 있었어야 했는데.
두 번이나 마법진을 망가뜨린 업보로, 마법사들의 원성을 한 몸에 받고 있는 터라 잠시도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던 게 통탄스러울 따름이었다. 식사를 할 시간도, 잠깐 눈을 붙일 새도 없이 마법진 복구에만 매달려 있어도 뒤통수에 줄곧 원망 어린 시선이 달라붙는다.
자신이 아무리 마탑의 주인이라 하더라도 시체 같은 몰골로 돌아다니는 마법사들의 원망 가득한 시선 앞에서는 레이몬드도 죄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며칠 동안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는 그도 그렇고, 클레어 역시 아침부터 네 사람에게 이래저래 시달려 무척 피곤할 터였다. 아쉽지만 이대로 깨우지 않고 자게 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아침까지 여기서 클레어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싶었으나, 그동안 자신이 더는 클레어에게 손대지 않고 얌전히 기다릴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레이몬드는 아쉬움과 미련을 접고 시트를 짚은 손에 힘을 주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그대로 문가로 걸어가 방을 나설 생각이었다.
“……전하?”
하지만 잠든 클레어로부터 채 한 걸음을 멀어지기도 전에 뻗어온 손이 그의 소매를 붙들었다. 놀란 눈으로 돌아보자 잠에 취한 연갈색 눈동자가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그가 꿈인지 아닌지 살짝 헷갈리는 표정이면서도, 붙잡은 소매를 더욱 힘주어 붙드는 게 느껴졌다.
“미안해요, 나 때문에 깼어요?”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저를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지나치다 싶을 만큼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레이몬드는 가슴이 소란스럽게 뛰는 걸 느끼며 다시 침대 끝에 걸터앉아 클레어를 내려다보았다.
가뜩이나 피곤할 텐데 저 때문에 자다 깬 클레어에게 미안하면서도, 잠에서 깨어나 저와 시선을 마주해오는 눈동자에 기쁨을 숨기지 못했다.
클레어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더니 레이몬드의 소매를 붙잡지 않은 왼손으로 눈가를 비비적거렸다.
“정말 2황자 전하예요?”
“네, 진짜 저예요.”
“오늘은 못 오시는 줄 알았어요.”
“그럴 뻔했는데 클레어가 너무 보고 싶어서 몰래 잠깐 빠져나왔어요.”
웃음기 어린 레이몬드의 말에 클레어가 몇 번 더 졸린 눈을 깜빡이더니, 꾸물꾸물 움직여 몸을 일으켰다.
레이몬드가 도와주려 뻗은 손을 못 보고 혼자 힘으로 일어나 앉은 클레어가 여전히 졸음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뺨에 가만히 대어보았다. 클레어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진짜네요.”
클레어의 손을 피하지 않고 기다리던 레이몬드가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며 그녀의 손에 얼굴을 기댔다.
“네, 진짜예요.”
어느새 레이몬드에게 손을 잡힌 채로 클레어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클레어는 멍하니 레이몬드를 바라보다 그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레이몬드는 제게 다가오는 클레어를 기쁜 얼굴로 지켜보았다.
잠이 덜 깬 클레어는 꼭 예전에 술에 취했을 때처럼 솔직하고 귀여워서, 당장이라도 한입에 꿀꺽 삼키고 싶었지만 레이몬드는 인내심을 그러 모아 얌전히 그녀가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전하, 왜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
“혹시 나 기다렸어요?”
“네, 계속 기다리다가 잠들어 버렸어요.”
클레어가 말끝에 작게 하품을 하며 또 눈가를 비볐다. 그렇지 않아도 부어있던 눈가가 손등에 쓸리면서 더 빨갛게 변하는 게 보였다.
레이몬드는 안타까움이 섞인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다 몸을 기울여 클레어의 붉어진 눈가에 가만히 입을 맞췄다. 그리고 놀란 눈을 깜빡이는 클레어를 다정하게 응시하며 말했다.
“고작 하루 못 봤을 뿐인데, 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어요.”
“저도…… 콜록!”
저도 보고 싶었다고 대답하려던 클레어는 순간 목이 따끔거리며 터져 나오는 기침에 괴로운 얼굴을 했다. 클레어가 기침을 멈추지 못하자 레이몬드가 곧장 일어나 물병이 있는 테이블로 걸어갔다. 물을 따른 유리컵을 들고 와 클레어의 입가에 대주자, 클레어가 손을 들어 유리컵을 받아들고 물을 삼켰다.
물을 마시는 예쁜 입술에 자꾸만 시선이 가는 걸 애써 무시한 채, 레이몬드는 클레어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혹시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열은 없었다. 하긴 열이 있었다면 한 시간 전부터 클레어에게 지분거리는 동안 벌써 알아챘을 것이다. 그래도 감기에 걸린 걸 수도 있으니 당장 의원을 불러와 상태를 보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전에 목이 말랐던지 유리컵의 물을 다 비운 클레어를 본 레이몬드가 물병을 가져와 물을 더 따라주었다. 말없이 꼴깍꼴깍 물을 잘 마시는 클레어가 지나치게 예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레이몬드는 물병을 통째로 입가에 댔다.
생각해보니 그 자신도 오늘 온종일 물 한 잔 마시지 못한 사실이 뒤늦게 기억이 나 목이 말랐다. 정말 단순히 목이 타는 건지, 클레어에 대한 갈증을 착각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
어느새 먼저 물을 다 마신 클레어가 레이몬드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물병 채로 물을 삼키던 레이몬드의 시선이 클레어에게 향했다. 그는 얼른 물병에서 입을 떼고 입가를 손등으로 닦았다.
“혹시 전하께서는 저와 결혼해주실 마음이 있으신가요?”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삼키던 물을 도로 뱉을 뻔하며 거칠게 기침을 토해냈다. 잽싸게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린 채 기침을 토해내던 레이몬드는 당황의 빛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클레어를 돌아보았다.
“그, 그게 무슨. 아니, 그러니까.”
갑자기 기침을 크게 해대는 레이몬드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짓던 클레어의 눈동자가 시무룩해졌다. 당황해 허둥대는 그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축 처진 눈동자가 애처로운 색을 띠었다.
“괜한 걸 물어봐서 죄송해요.”
“그러게요, 갑자기 놀랐잖아요. 너무 당연한 걸 그렇게 물으니까.”
제가 사랑하는 이는 생각이 많은 사람이었다. 레이몬드는 클레어가 다른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확실한 대답을 내어놓았다.
“난 클레어의 유일한 반려가 되고 싶어요. 평생을 함께할 유일한 존재로서 곁에 있길 바라요.”
그에 안도하는 연갈색의 눈동자가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레이몬드는 당장이라도 클레어를 끌어안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으며, 살짝 아쉬운 얼굴을 했다.
“사실 정식으로 청혼할 때까지는 이렇게 말할 계획이 없었는데, 갑자기 그렇게 물어봐서 놀랐어요.”
그렇지 않아도 세공사에게 맡겨둔 반지 제작이 늦어져서 초조해하고 있던 터라, 더 아쉬움이 남았다. 반지도 꽃 한 송이도 없이 사랑하는 이에게 평생을 함께할 반려가 되고 싶은 제 마음을 드러낼 계획은 없었으니까.
“클레어는요?”
하지만 그런 제 마음과는 별개로, 사랑하는 이의 생각도 궁금하긴 했다. 망설이던 레이몬드가 조심스러운 시선으로 클레어를 바라보며 물었다.
“클레어는 나와 어떻게 되고 싶어요?”
“저는…….”
클레어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다 레이몬드의 시선을 피했다.
“솔직히 저 같은 게…….”
머뭇거리며 조그맣게 흘러나온 목소리에 레이몬드의 표정이 굳었다.
“잠깐, 이제 그 말 금지예요. 나 같은 게, 감히, 앞으로 이런 말 내 앞에선 안 돼요.”
레이몬드는 오른손을 뻗어 클레어의 왼손을 잡아 깍지를 꼈다. 그리고 그대로 손을 당겨 반지 없이 비어있는 그녀의 약지에 입술을 누르며 말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함부로 낮춰 말하지 마요. 부탁이에요.”
눈을 감고서 제 약지에 입을 맞추는 레이몬드가 어둠 속에서도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처럼 보였다. 조금은 화가 난 듯 찌푸려진 미간마저도 근사해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클레어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레이몬드의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다. 정말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날 좋아하는 거구나. 그를 마주할 때마다, 그의 마음을 확인하게 될 때마다 그저 놀랍고 신기할 따름이었다.
“저는 2황자 전하를 좋아해요.”
이미 몇 번이나 전했던 마음을 한 번 더 전한 후, 클레어는 그제야 시선을 마주해오는 금색 눈동자를 직시했다.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 그 어디를 봐도 이 사람의 옆자리에 어울리지 않았다. 이름 없는 가문의 반쪽짜리 귀족, 리하르트 아델의 정부, 제국의 황자를 홀린 마물. 그게 지금 자신에게 붙어있는 꼬리표들이었다.
아마 제가 죽을 때까지 뒤에 따라붙어 떨어지지 않을 낙인과 같은 꼬리표.
카롤리나 황후와 유리 황녀가 아무리 제 뒤를 든든히 받쳐주고, 레이몬드 2황자가 저를 끌어안은 채 제 눈을 가려도, 클레어 헤더를 향한 세상의 눈초리와 손가락질을 전부 막을 순 없었다.
“하지만 전하의 곁에 서기엔 지금의 저는 너무 초라하고 볼품없어서, 그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없어요.”
“절대 그렇지 않아요.”
“전하께서는 그리 생각하지 않으셔도 주변에서는 손가락질하며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하겠죠. 왜 전하께서 저런 여자를 택했는지 모르겠다. 유리님과 전하께서 마물에게 홀려 저렇게 하찮고 형편없는 여자를 택한 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델 공작이 쓰다 버린 여자를 굳이 반려로 선택할 리가 없다고.”
“클레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클레어를 불렀다. 진심으로 화가 난 듯 굳은 레이몬드의 눈동자를 클레어는 피하지 않았다.
“그래서 변하고 싶어요.”
트뷔에 백작부인에게 빼앗겼던 그림을 되찾을 기회가 닿고, 꿈꿔왔던 레지나 왕립 아카데미로의 편입의 기회까지 눈앞에 내려왔을 때부터 줄곧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도 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레이몬드 2황자의 곁에 서도 부끄럽지 않은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전하의 곁에 서도 초라해 보이지 않게, 당당하게 전하의 곁에 설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클레어는 언젠가 수많은 타인으로부터 손가락질받는 게 아니라, 축하의 박수를 받으며 레이몬드 2황자의 곁에 서 있는 제 미래를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그리고 결정했다.
“레지나 왕립 아카데미에 편입하려고 해요.”
굳게 결심하여 흔들림없는 클레어의 눈동자를 마주한 레이몬드의 표정이 흐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