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나의 새언니가 되어주세요! (11)
“게다가 난 오히려 우리 새아가가 그린 그림이라 하니 더 좋은걸. 레지나 왕국과 제국을 들썩이게 했던 작품들이 실은 내 며느리가 그린 그림이었다고 여기저기 자랑하고 다닐 생각을 하니 벌써 어깨가 으쓱해. 그리고…….”
내 손등을 토닥이던 손이 멈추며, 카롤리나 황후의 눈동자에 망설임이 스쳤다.
“실은 전부터 새아가의 사정을 알고 있었다고 하면, 날 미워할 건가?”
그녀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나는 눈을 한 번 깜빡이며 다시 고개를 떨어뜨렸다. 내 손등을 덮은 카롤리나 황후의 희고 고운 손등이 보였다.
‘알고 계셨구나.’
알면서도, 나를 좋아해 주셨던 거구나.
오늘 헤더 자작과 에젯트 헤더가 무작정 찾아온 걸 보고도 당황하거나 불쾌한 기색도 없이 기다렸다는 듯 두 사람을 맞이하던 카롤리나 황후의 태도가 생각났다.
어쩌면 오늘 두 사람이 찾아온 것도, 내가 두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전부 카롤리나 황후가 직접 판을 짜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를 위해서.
유리 황녀도, 레이몬드 2황자도, 카롤리나 황후도, 저렇게 대단한 사람들이 고작 나 하나를 위해서…….
“새, 새아가. 미안해. 응? 그때는 그게, 우리 새아가가 걱정돼서, 그래서 혹시 내가 도와줄 일이 없을까 하고 알아본 건데. 그래도 기분이 나쁘겠지? 내가 생각이 많이 짧았…….”
“감사합니다.”
나는 다른 손을 움직여 카롤리나 황후의 손을 꼬옥 붙잡았다. 그 상태로 허리를 숙여 그녀와 내 손등에 이마를 살며시 기댔다.
“다 알고 계셨으면서도 절 싫어하지 않아 주셔서, 제 것을 되찾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카롤리나 황후로부터 잠시 대답이 없었다. 뒤이어 조용히 뻗어온 그녀의 다른 팔이 내 등을 꼬옥 끌어안았다. 백 마디 말보다 더 깊은 애정이 느껴지는 손길이었다. 나는 그 손길에 기댄 채로 벅차오르는 감정에 또다시 흐느끼고 말았다.
자리를 피해주었던 시온이 응접실로 되돌아올 때까지, 카롤리나 황후는 그런 나를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시온이 다시 돌아왔을 때 나는 붕어처럼 퉁퉁 부은 눈으로 그녀를 맞이했다.
“우리 병아리가 드디어 다 컸네!”
헤더 자작과 에젯트 헤더가 찾아왔던 일, 그리고 트뷔에 백작부인과의 거래 장부를 받아내기로 한 일을 말해주자 시온은 나보다 더 내 일처럼 기뻐해 주었다. 「우리 병아리」라는 낯선 호칭이 갑자기 튀어나와 조금 나를 당황케 하긴 했지만. 왠지 카롤리나 황후의 「우리 새아가」를 의식한 것 같기도 했지만.
양옆에서 카롤리나 황후와 시온이 우리 새아가 잘했다느니, 우리 병아리 기특하다느니, 아직 익숙하지 않은 호칭으로 한참 동안 나를 칭찬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도중에 내 뱃속에서 또 꼬르륵 소리가 나서, 급하게 테이블 위에 케이크를 포함한 다과가 한가득 채워진 뒤였다.
“그럼 처음에 나눴던 얘기로 다시 돌아가서.”
열심히 케이크를 먹고 있는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카롤리나 황후가 말문을 열었다.
“상황이 바뀐다면 그에 맞춰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있다고 했지.”
그녀는 새하얀 손수건으로 내 입가에 묻은 크림을 닦아주며 빙긋 웃었다. 나는 어린애처럼 크림이 묻은 줄도 모르고 케이크에 열중했던 게 부끄러워 뺨을 붉혔다.
“우선은 그동안 트뷔에 백작부인의 작품들이 원래 우리 새아가의 그림이라는 걸 대외적으로 증명하는 게 먼저야. 물론 장부를 손에 넣었다고 해서 다 해결되는 게 아니니 나와 버젯 교수가 최대한 도울 거고.”
카롤리나 황후가 시온을 돌아보며 말하자, 시온이 동의하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음은 레지나 왕립 아카데미의 편입과 졸업이 따라와야 해. 아카데미의 최우수 졸업생으로 이름을 알리고, 실력을 보여줘서 신전의 눈을 사로잡게 되면 확실히 얘기가 달라질 테니까. 거기에 알테노이즈의 유일무이한 제자라는 타이틀도 가능하다면 더 매력적으로 보이겠지.”
입학도 어렵지만 졸업이 그보다 몇 배는 더 어렵기로 유명한 레지나 왕립 아카데미였다. 매 해 졸업생이 재학생의 1/3밖에 되지 않으니 아카데미의 졸업이 얼마나 극악한 난이도를 자랑하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거기에 졸업생 중 단 5명밖에 뽑지 않는 최우수 졸업생 타이틀을 쥔다면 당연히 세간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을 터였다.
“최우수 졸업생 타이틀이라, 그거 좋네요.”
카롤리나 황후가 무엇을 노리는지 알아챈 시온이 씨익 웃었다.
“클레어가 타고난 재능과 감각이 뛰어나긴 하지만, 기초부터 체계적으로 배운 느낌이 부족하긴 하죠. 저도 그리 좋은 선생은 아니라 하나하나 일일이 가르치긴 힘드니 일단 아카데미에서 수학하게 하고, 나머진 제가 틈틈이 가르치면 좋을 것 같긴 한데.”
시온이 말끝을 흐리며 나를 돌아보았다.
“본인의 생각은 어떤지 궁금하네요.”
카롤리나 황후와 시온의 기대 어린 눈동자가 동시에 내게 향했다.
나는 그저 트뷔에 백작부인에게 빼앗겼던 내 그림을 되찾는 것만 생각했을 뿐인데, 어째 카롤리나 황후와 시온은 그걸로 끝이 아닌 느낌이었다.
내게는 너무도 꿈만 같은 이야기를 두 사람은 어떻게든 현실로 만들고 싶은 모양이었다. 실제로 그게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는 듯하기도 했고.
뭔가 여우를 잠시 피해왔다가 호랑이를 만난 기분이라고 해야 할지.
유리 황녀의 결혼 요구에 이어 이번엔 두 사람의 부담스러운 눈빛 공격이 나를 곤혹스럽게 했다. 대답을 고르는 머릿속이 핑글핑글 도는 느낌이었다. 유리 황녀는 레이몬드 2황자와의 결혼을, 카롤리나 황후와 시온은 레지나 왕립 아카데미 편입을.
둘 다 동시에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나.
아니, 애초에 둘 다 정말 내가 바라기만 하면 되는 건가.
둘 중 어느 쪽을 우선시해야 하는 걸까. 아무래도 카롤리나 황후는 당장 레이몬드 2황자와의 결혼보다는 레지나에 편입하는 걸 더 바라는 듯한데. 그렇다고 저쪽을 택하자니 유리 황녀가 또 무슨 일을 벌일지 몰라 무서웠다.
‘레지나 왕립 아카데미……라.’
나는 가만히 내 마음에 물어보았다. 시온의 말대로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지, 어떤 미래로 발을 내디딜 것인지.
신전의 제단화는 제쳐두고라도, 레지나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건 오랜 내 꿈이었다. 카롤리나 황후가 내게 레이몬드 2황자와의 가짜 약혼을 두고 거래를 제안했을 때도 제일 먼저 떠올린 조건이 아카데미의 입학이었다.
그만큼 오래전부터 꿈꿔왔던 이야기였다. 욕심이 날 수밖에 없었다.
멜린트 영지에서 시온이 내게 편입을 제안했을 때와 지금은 상황도 완전히 달랐다. 그때는 내 결정이 누군가의 미래를 엉망진창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끔찍한 현실에,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영원히 떠나야 한다는 가혹함에, 섣불리 시온이 내민 손을 붙잡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바라는 걸 붙잡아도 괜찮았다.
다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건 있었다. 어쩌면 이쪽을 택하는 순간,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는 다른 하나가 내 발목을 붙들었다. 양쪽을 다 붙잡을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망설여졌다.
나는 짧게 숨을 들이마신 후, 시선을 들었다.
언젠가 이 선택을 후회하게 된다 해도 나는 결정을 해야 했다.
* * *
새벽이 가까워진 밤. 소리 없이 열린 문을 지나 방안으로 들어서자, 낯설지 않은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레이몬드는 이 향기의 주인을 찾아 시선을 움직였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동자는 금세 원하는 이를 찾아내고 조용히 기쁨을 드러냈다.
창을 통해 들어온 희미한 달빛이 침대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새하얀 침대 위에 꽃잎처럼 흐드러진 연갈색의 머리카락이 먼저 시선을 잡아챘다.
레이몬드는 홀린 듯이 클레어가 잠든 침대로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오자 곤히 잠든 사랑하는 이의 얼굴이 더 잘 보였다. 세상의 더러움이라고는 단 하나도 묻지 않은 어린아이 같아서, 손을 대는 것조차 죄악으로 느껴질 만큼 순수하고 맑은 얼굴로 잠든 연인이 있었다.
레이몬드는 문득 잠든 얼굴이라도 보고 싶다는 제 욕심으로 허락도 없이 그녀의 공간에 들어온 것에 뒤늦은 죄책감을 느꼈다. 그래 봤자 결국은 클레어가 보고 싶어서, 자신은 몇 번이고 지금과 같은 선택을 반복했겠지만.
고작 하루를 보지 못했을 뿐인데 보고 싶어서 미칠 것만 같았다. 클레어가 제게 리하르트 아델에게 돌아가고 싶다고 말할까 두려움에 며칠이나 그녀를 피했던 지난 날이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때는 어떻게 이토록 곁에 있고 싶은 마음을 외면하고 참아냈던 걸까.
가까이 다가서자 조용한 방안을 울리는 옅은 숨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그 숨소리마저도 사랑스러워서, 레이몬드는 얼굴만 보고 나오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어기고 아예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클레어가 깨지 않도록 조심해서 앉아 어둠 속에서도 하얗게 빛이 나는 듯한 그녀의 얼굴을 눈에 새길 것처럼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레이몬드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옆으로 돌아누운 그녀의 얼굴 위로 머리카락이 흘러 내려와 있었다.
머리카락을 치워준다는 핑계로 손을 뻗었고, 말간 그녀의 뺨에 스치듯 손이 닿자 더는 참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는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그녀의 눈가에서부터 뺨을 지나 입술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의 손이 뺨을 지날 때까지도 얌전히 잠들어있던 클레어였으나, 입술을 스칠 때는 어딘가 성가심을 느낀 듯 미간을 찌푸리며 움직임을 보였다. 흠칫 놀란 레이몬드가 얼른 손을 치우자 클레어는 다시 평온한 얼굴로 잠이 들었다.
괜히 잘 자는 이를 깨운 줄 알고 당황했던 레이몬드도 이내 굳은 표정을 풀고 미소를 흘렸다. 클레어가 깨지 않아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묘하게 아쉬움이 느껴졌다. 클레어가 조용히 자게 두고 싶다는 마음과 깨어나서 저를 봐줬으면 하는 욕심이 상충하여 레이몬드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긴 하루였겠지.’
레이몬드는 뒤늦게 보좌관으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법진 일만 최대한 빨리 마무리하고 제가 직접 해결하고 싶었건만, 성격 급한 어머니 덕분에 선수를 빼앗기고 말았다. 헤더 자작 주변에 심어둔 이들로부터 묘한 자들이 접근한다는 얘기를 듣긴 했으나, 마법진 때문에 깊이 신경 쓰지 못한 게 제 패인이었다.
헤더 자작을 먼저 함정에 파묻고 에젯트 헤더까지 꼼짝도 못 하게 만들어버린 후 그걸 그대로 테이블 위에 올린 것이다. 클레어에게 포크와 나이프를 쥐여 주고 원하는 대로 썰고 짓뭉개버릴 수 있도록.
클레어에게 좋은 점수를 딸 수도 있지만, 역으로 미움을 살 수도 있는 위험 부담 때문에 레이몬드가 신중을 기하는 사이 카롤리나 황후는 무시무시한 추진력으로 밀어붙였다.
레이몬드는 살짝 억울한 면도 없지 않아 있었으나, 그래도 클레어가 생각보다는 그리 괴로워하거나 슬퍼하지 않은 것 같아 다행이라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