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나의 새언니가 되어주세요! (10)
“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클레어! 대리 화가라니. 트뷔에 백작부인은 또 누구고. 난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에젯트 헤더가 다급한 얼굴로 외쳤다. 그녀는 곧 죽을 것 같은 창백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저었다. 트뷔에 백작부인과 어떤 계약을 하고, 그녀로부터 뭘 얼마나 받았는지는 몰라도 그녀의 주름진 얼굴이 온통 두려움으로 물들었다.
트뷔에 백작부인, 장부, 대리 화가. 그 단어들을 타인이, 그것도 하필 다른 누구도 아닌 카롤리나 황후가 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두려운지 그녀의 뺨이 푸들거리며 떨렸다.
예상했던 그대로의 대답에 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못 하겠다면 이 얘긴 없던 일로 할게요.”
“하, 하겠습니다!”
초조한 얼굴로 나와 제 누이를 번갈아 보던 헤더 자작이 허겁지겁 끼어들었다.
“크렌든, 너……!”
“뭐든 하겠으니 도와주십시오. 선대부터 지금까지 줄곧 지켜온 땅입니다. 아내도, 딸아이도, 저도 절대 저 저택에서 쫓겨나서는 살지 못할 겁니다. 장부 공개든 뭐든 할 테니 제발 도와주십시오.”
경악한 에젯트 헤더가 엉금엉금 기어가 입을 틀어막으려는 시도에도 헤더 자작은 굴하지 않고 나를 향해 똑바로 외쳤다. 혹시나 그새 내 마음이 변하진 않을까 불안해 보였다. 이제는 수치심도 느껴지지 않는지, 나를 향해 비굴하게 머리를 조아리며 존댓말까지 사용하고 있었다.
300골드라는 돈만 있으면 저 사람들을 내 앞에서 무릎 꿇릴 수 있는 거였구나.
저렇게 작고 약하고 구역질이 날 만큼 초라한 사람인데. 왜 그때는 저 사람도 그렇게 크고 무서워 보였던 걸까.
한때는 저 사람에게도, 에젯트 헤더에게도,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애를 썼었다. 며칠을 아무것도 먹지 못해 배가 아무리 고파도 울지 않았고, 열이 올라 죽을뻔했을 때도 혼자 조용히 방 안에서 고통을 삼켰었다.
시끄럽게 울어대면 매질이 날아들까 봐. 성가시게 굴면 이 집에서 쫓겨나게 될까 봐. 저 사람들의 신경에 거슬리지 않도록 뭐든 홀로 조용히 삼키며 살았다.
에젯트 헤더가 내 그림을 빼앗아 가도, 헤더 자작의 부인이 온갖 이유를 갖다 붙여 나를 때릴 때도, 에이든 헤더가 나를 창부처럼 제 친구들에게 팔아넘기려 했을 때도, 헤더 자작이 그 모든 걸 방관하기만 할 때도.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살아왔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너무 괴로워서, 없던 일인 양 억지로 잊고 있던 기억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그리고 하나 더.”
에이든 헤더를 헤더 자작가의 후계자 자리에서 박탈시키세요. 당신의 아내인 헤더 자작부인도 당신처럼 내 앞에서 무릎 꿇고 내게 사죄하라고 하세요.
아니, 사실은 다 필요 없으니 당신들을 도와주기 싫어요. 이대로 당신들 모두 저택도 작위도 모두 빼앗긴 채로 수도 밖으로 쫓겨났으면 좋겠어요.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뭔지 고민하던 나는 조금 지친 얼굴로 나직이 말을 내뱉었다.
“제게 사과해주세요.”
더는 저 사람들을 마주하고 있는 것도, 그래서 과거의 기억들을 다시 떠올리는 것도 싫었다. 최대한 빨리 얘길 끝내고 저 사람들을 이 황성 안에서 쫓아내고 싶었다.
그래도 참았다. 마지막이 될 테니까. 내내 참기만 했었으니까. 지금은 화를 내야 할 때니까.
“헤더 자작저에서 내가 겪은 건 전부 학대였을 뿐이에요. 당신들은 부모를 잃은 어린아이를 돌봐준 게 아니라 방치하고 학대한 거였어요.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괴로워할 때까지 아무도 내게 먹을 걸 주지 않았고, 죽을 것처럼 아파서 끙끙 앓고 있어도 누구 하나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죠.”
내가 내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덤덤히 말을 이어갈수록 두 사람의 안색이 희게 질리는 게 보였다. 아마 저 사람들은 나보다는 지금 내 옆에 있는, 저들 눈에는 나를 무척이나 아끼고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는 카롤리나 황후가 두려운 거겠지만.
“그림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그리고 싶었던 게 아니라 당신의 강요로 그림을 그렸고, 그 외에 두 사람 다 그 저택 안에서 내가 어떤 꼴을 당해도 신경도 쓰지 않았죠.”
너무 괴로워서 눈물이 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가슴 속에서 불이 붙어 밖으로 토해내지는 건 분노의 감정뿐이었다.
“나는 클레어 헤더라는 이름을 받은 순간부터 헤더 자작저에서 살았던 그 모든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행복했던 적이 없어요. 차라리 그 설산의 낡은 집에서 얼어 죽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고 수백 번도 더 생각했었어요.”
나는 이제 내 눈도 보지 못하고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헤더 자작과 얼이 빠진 얼굴로 멍하니 나를 쳐다보기만 하는 에젯트 헤더를 차례대로 바라보았다.
“그러니 지금껏 나를 당신들이 친부모나 다름없이 키워왔다고 말했던 걸 여기서 당장 사과해주세요.”
마지막 말은 꼭 헤더 자작뿐만이 아니라 두 사람 모두에게 한 말이었다. 그런데 유독 죄스럽고 민망해하는 반응을 보인 건 헤더 자작이었다. 제가 처음 이곳에 오자마자 카롤리나 황후에게 했던 말을 내가 그대로 읊었기 때문이리라 생각했다.
“그동안 정말 죄송했습니다.”
헤더 자작은 끝까지 내 시선을 피하다 얌전히 두 손을 바닥에 대고 머리를 숙였다.
“지금 와서 무슨 말로 사죄를 하든 마음이 다 풀리진 않으실 테지만, 과거에 제 저택에서 클레어님께서 겪으셨던 모든 일들을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제가 바깥일이 바빠 집안의 사소한 일까지 일일이 신경 쓰지 못했던 점을 인정하고 반성합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헤더 자작은 미리 준비한 말을 쏟아내듯 숨도 쉬지 않고 단숨에 내뱉고는 이마를 바닥에 쿵 찧었다.
저 말들에 진심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다는 걸 잘 안다. 그저 300골드라는 돈이 필요하니까, 당장 어떻게든 살아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내게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는 흉내를 내고 있을 뿐이라는 걸 안다.
“에이든 그 빌어먹을 자식은 이미 후계자 자리도 박탈했습니다. 이미 알고 계실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혼자서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몸으로 황성의 저 지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리고 제 아내도 원하신다면 지금 당장 끌고 와서 클레어님 앞에 머리를 조아리게 하겠습니다.”
유리 황녀에 의해 에이든 헤더를 무릎 꿇렸을 때와 똑같았다.
기쁘지 않았다. 통쾌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제발,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제발.”
그래도 이렇게라도 해야 어린 시절의 내게, 내 안에서 줄곧 울고만 있는 여덟 살의 레나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배를 곯아도, 이유도 없이 두들겨 맞아도, 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도, 어두운 방 안이 무서워서 잠 못 들던 때에도, 숨죽여 눈물만 흘렸던 어린 내 등을 처음으로 끌어안고 토닥여주는 기분이었다.
괜찮다고, 이제는 소리 내어 울어도 괜찮다고, 아무도 널 해치지 않게 내가 널 지켜줄 거라고.
눈가에 맺혀있던 눈물 하나가 소리 없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가만히 두 눈을 감으며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마지막으로, 두 번 다시 제 앞에 나타나지 마세요. 이게 제가 원하는 조건의 전부예요.”
* * *
“두 사람은 당분간 황실 소속의 기사들이 호위를 맡아줄 거야. 사용인들이 죄다 도망가버린 상황에서 빚쟁이들이 몇 번 저택을 들락거린 일도 있는 듯하고, 또 클레어에게 건네주기로 한 장부도 무사히 받아와야 하니까. 그동안 안전을 위협받는 일이 있으면 안 되겠지.”
헤더 자작이 전부 원하시는 대로 따르겠다고 대답하며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된 듯하자, 카롤리나 황후가 나서서 말했다. 대외적으로는 두 사람을 보호하겠다는 명목을 붙였지만, 실제로는 약속대로 순순히 장부를 넘기는지 감시하겠다는 의미로 들렸다.
카롤리나 황후는 마치 그동안 헤더 자작저의 상황을 전부 지켜보고 있었던 것처럼 말하고는 문밖의 기사들을 다시 불러들였다.
그녀의 명령에 문을 열고 들어온 기사들이 헤더 자작과 에젯트 헤더를 일으켜 세웠다.
“장부만 무사히 이쪽 손에 들어오면 돈은 그 즉시 넘겨주겠네.”
범죄자 취급하듯 기사들에게 양쪽 팔을 붙들린 두 사람이 당황한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으니, 카롤리나 황후가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고갯짓으로 명령했다.
“그럼 이만 가 봐도 좋아.”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두 사람이 나갈 때도 기사들에게 반쯤 질질 끌려 나가고, 나는 카롤리나 황후만 둘만 남겨졌다.
카롤리나 황후가 300골드라는 이름으로 내게 쥐여 준 검을 신나게 휘둘러댔던 나는 이제야 정신이 들었다. 헤더 자작과 에젯트 헤더를 향한 앙금을 털어낼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잘도 카롤리나 황후 앞에서 트뷔에 백작 부인이나 대리 화가 얘기를 꺼냈다 싶었다.
이걸 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천천히 설명하면 나를 믿고 이해해주긴 할까. 혹시 지금도 나를 예전처럼 경멸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진 않을까. 무서워서 차마 카롤리나 황후를 쳐다보지도 못했다.
“우리 새아가, 정말 잘했어.”
길고 가녀린 팔이 뻗어와 내 몸을 폭 끌어안았다.
나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지금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지금 카롤리나 황후가 나를 끌어안은 게 맞는 걸까. 게다가 새아가라니. 내 예상에는 전혀 없던 카롤리나 황후의 말과 행동에 나는 순간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방금 정말 멋있었단다, 우리 새아가.”
카롤리나 황후는 기쁜 얼굴로 활짝 웃으며 내 얼굴을 마주 보더니, 어린아이 대하듯 내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기까지 했다.
“새아가……?”
얼떨떨하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해서, 무심코 낯선 호칭을 중얼거리자 카롤리나 황후가 예쁜 눈동자를 사르르 접으며 웃었다.
“그래, 새아가. 이제 곧 내 며느리가 될 거니까. 그렇지?”
나는 그런 카롤리나 황후를 멍하니 바라보다 느리게 시선을 피했다. 무릎 위에서 마주 잡은 손을 내려다보며 자신 없는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저, 제게 실망하지 않으셨나요?”
“실망?”
“제가 트뷔에 백작부인의 대리 화가였다는 사실이요. 그리고…… 좋아하는 화가가 그린 작품이라 여기시고 손에 넣으셨던 그림들이 사실 저처럼 볼품없는 사람이 그렸다는 사실에 실망하지 않으셨나요.”
차마 카롤리나 황후의 얼굴을 보지도 못하고 그렇게 묻자, 잠시 침묵하던 카롤리나 황후의 손이 내 손등을 덮었다.
“우리 새아가가 원해서 그리한 것도 아닌데 내가 거기에 왜 실망을 하겠어.”
나는 그제야 머뭇거리며 시선을 들었다. 여전히 상냥한 빛을 띤 금색 눈동자가 나를 향해 따스하게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