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나의 새언니가 되어주세요! (9)
“클레어, 도와다오.”
막상 말을 꺼내려고 보니 자존심이 상하는지 헤더 자작은 고개를 숙인 채 입을 다물어버렸다. 대신 에젯트 헤더가 제 동생 대신 나서서 꺼낸 얘기는 실로 기가 막혔다.
최근 1년 사이에 갑작스럽게 가세가 기울었다고 했다. 가문에서 일하던 사용인들마저 죄다 도망가버릴 정도로 집안이 힘들어졌고, 나중에는 식량도 바닥나 다들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고.
그래서 헤더 자작과 에젯트 헤더는 어떻게든 살기 위해서 여기저기 돈을 융통할 방법을 모색했고, 그 과정에서 그들에게 돈을 빌려주겠다는 이가 나타났다고 했다.
값싼 이자로 돈을 빌릴 수 있게 된 것까지는 다행이었는데, 돈을 손에 쥔 이후가 더 문제였다. 어찌된 일인지 한평생 도박에는 관심도 없던 헤더 자작이 그 돈을 들고 판돈이 큰 도박판에 몸을 던졌다는 거였다.
전문적인 도박꾼들이 득실거리는 도박판에서 평생 게임을 해본 적도 없는 헤더 자작은 아주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었을 것이다. 결과는 당연히 간신히 빌린 돈을 하나도 남김없이 털리는 것으로 끝났다. 거기에 거액의 빚까지 생겨 헤더 자작저마저 넘어가게 생겼다고.
거기까지 얘기를 듣고 난 나는 기가 막혀 말을 잇지 못했다.
1년 사이에 급작스레 가세가 기운 이유는 묻지 않아도 뻔했다. 더는 트뷔에 백작부인에게 팔아넘길 내 그림이 없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고작 나 하나 사라졌다는 이유만으로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한 가문이나, 간신히 구한 돈을 도박판에 꽂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만들고, 대대로 지켜온 낡은 저택마저 넘어갈 상황에 봉착해있는 저들이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이대로면 우리 가족 다섯 명 모두 수도 밖으로 쫓겨나게 생겼다. 아니, 수도 밖으로 쫓겨나는 게 뭐니. 아예 길바닥에 나앉게 생겼어.”
기가 막혀 할 말을 잊은 채로 두 사람을 쳐다보기만 하고 있으니, 에젯트 헤더는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 내가 충격을 받은 거라고 착각한 것 같았다. 에젯트 헤더가 무릎 걸음으로 조금 더 내게 가까이 다가와 간절함이 배인 목소리로 정에 호소해왔다.
“클레어, 네가 좀 도와주렴. 부탁이다. 우리가 그동안 널 어떻게 키웠니. 그 설산에서 얼어 죽을뻔했던 너를 데려와서 성인이 될 때까지 먹여주고 재워주고, 네가 좋아하는 그림도 계속 그릴 수 있게 지원해주고, 또 우리가 너를 예뻐하긴 얼마나 예뻐했니. 응?”
나는 그녀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충격을 받았다.
에젯트 헤더의 표정은 놀랍게도 진심이었다. 카롤리나 황후가 옆에 있어서 괜히 그녀의 눈치를 살피느라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에젯트 헤더는 진심으로 자신이 나의 구원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얼어붙은 설산에서 나를 헤더 자작저로 데려오고, 방에 가둬 방치하고, 억지로 그림을 그리게 하고, 그 그림을 빼앗고, 멋대로 팔아치웠던 지난 시간들이 전부 나를 위한 것이라 여기고 있는 눈이었다. 그래서 당연히 내가 자신들에게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 시선이었다.
그 눈을 마주한 순간, 나는 평생 이 사람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받을 수 없을 거란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렇지 않게 지옥과도 같았던 나의 어린 시절 얘기를 언급하는 에젯트 헤더 덕분에, 애써 잊고 가슴 한구석에 모른 척 내버려 뒀던 상처들이 욱신거리면서 통증을 호소해왔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치마를 움켜쥐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제가…… 어떻게 도와드려야 할까요.”
에젯트 헤더는 기다렸다는 듯 반색하며 입을 열었다.
“지, 지금 우리가 진 빚이 200골드 정도 된단다. 그 돈부터 갚아주면 일단 저택이 넘어가는 건 막을 수 있을 거다. 그리고 그, 우리가 지금 당장 먹을 빵 하나 없단다. 우선은 100골드 정도만 주면 당분간은 걱정이 없을 것 같구나. 그리고 혹시 가능하다면…… 그보다 조금 더 얹어서 줘도 좋고.”
역시 바라는 건 그거였나. 예상은 했지만 씁쓸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얼마나 마음이 급했는지 말까지 더듬는 그녀를 나는 무표정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금 제게 300골드나 되는 돈을 달라고 하신 건가요?”
“그래, 당장은 그 정도가 필요해. 너 지금 2황자 전하의 약혼녀라면서. 조만간 국혼도 치를 거라는 소문이 자자하던데, 그 정도 돈은…… 가능하지 않니.”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뒷말은 꺼내기 부끄러운지, 카롤리나 황후 쪽을 힐끔거리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에젯트 헤더의 말에 나는 조용히 실소했다.
300골드라니. 당장 주머니에 은화 한 닢조차 없는 내게 말하는 숫자치고는 너무나 허무맹랑한 금액이었다. 물론 웬만한 고위 귀족들에게는 그리 큰돈도 아니겠지만, 내게는 평생 한 번이라도 만져볼까 싶을 만큼 거액의 금액이었다.
돈이 필요했던 거였다. 그래서 어디선가 내가 2황자 전하의 약혼녀가 되었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이렇게 득달같이 찾아온 거였다.
나는 에젯트 헤더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마지막에 내가 싫다고 해도 억지로 가둬놓고 그림을 그리게 하려고 했던 기억은 아예 깡그리 잊어버린 걸까. 아니면 그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조차 못 하는 걸까. 그것만은 한번 물어보고 싶었다.
그리고 내겐 300골드나 되는 돈이 있지도 않고, 그걸 마련할 재주도 없다는 사실을 왜 굳이 말로 설명해줘야 하는 걸까. 기대감 가득한 에젯트 헤더의 눈동자를 마주한 채, 이 상황 자체가 그저 기가 막혀 허탈한 숨만 길게 내쉬었다.
“이런, 정말 딱하구나.”
한참을 말없이 에젯트 헤더가 하는 양을 지켜보기만 하던 카롤리나 황후가 끼어들었다. 그녀는 정말 진심으로 에젯트 헤더를 동정한다는 듯 안타까운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나도 그렇지만, 헤더 자작과 에젯트 헤더도 놀란 눈으로 카롤리나 황후를 힐끔거렸다.
카롤리나 황후가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움직임에 헤더 자작과 에젯트 헤더가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카롤리나 황후는 편하게 얘기를 나눠도 좋다고 했지, 허락도 없이 황족의 얼굴을 힐끔거려도 된다고는 안 했으니까.
카롤리나 황후가 천천히 걸어와 내 바로 옆자리에 와 앉았다. 그러고는 무릎 위에 얹어둔 내 손을 제 손으로 덮으며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300골드라고 했던가. 그 정도 돈이야 도와주는 건 일도 아니지. 곧 우리 새아가가 될 클레어의 친정에 고작 그런 푼돈도 내가 내주지 못할까.”
아름다운 얼굴 가득 나를 향한 애정이 듬뿍 묻어나는 미소에 나는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었다.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도 잊은 채 멍하니 카롤리나 황후의 얼굴만 바라보는데, 그녀가 그런 내게서 시선을 돌려 에젯트 헤더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클레어가 그대들을 도와주고 싶을지 모르겠군.”
부드럽고 다정했던 목소리가 한순간에 변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시선이 두 사람에게로 떨어졌다. 예전에 내가 처음 카롤리나 황후를 만났을 때처럼, 경멸 외에 다른 감정은 느껴지지 않는 비소에 나조차도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클레어, 그래서 저 반푼이들을 도와주고 싶은가?”
카롤리나 황후가 제 앞에서 머리를 조아린 채 위축돼있는 두 사람을 가리키며 물었다.
“클레어가 도와주고 싶다면 내 얼마든지 내어줄 수 있어.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냥 돌려보내면 돼.”
내 손을 꼬옥 잡은 채로 그녀가 몸을 더 바짝 붙여왔다. 다정한 눈동자와 상냥한 목소리로 내게 선택지를 내밀었다.
“어차피 앞으로는 두 번 다시 볼일도 없는 인간들이니.”
두 사람이 오늘 황성에서 나간 뒤, 내가 원하지만 않는다면 앞으로 저들을 만날 일은 없을 터다. 아마 카롤리나 황후도 그 얘길 하는 거겠지만, 이상하게 내 귀에는 그게 조금 다르게 들렸다.
꼭 왠지, 저 두 사람이 두 번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의미로 들렸다. 그래서 순간 아주 조금……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클레어, 이렇게 부탁하마. 그동안의 정을 봐서라도, 제발…….”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니 몸이 달았던지, 지금껏 입을 꾹 닫고 있던 헤더 자작이 애원하듯 말했다. 아마 카롤리나 황후까지 이렇게 나서주니 내가 허락만 하면 정말로 돈을 융통할 수 있겠다 싶었던 모양이었다. 나를 향해 두 손을 모으고서 싹싹 비는 모습이 참, 초라하고 비참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나는 불안한 눈으로 카롤리나 황후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녀는 진심인 걸까. 고작 나 같은 걸 위해 300골드나 되는 큰돈을 내어줄 수 있는 걸까. 카롤리나 황후에겐 정말 그 정도 돈은 푼돈이나 다름없겠지만, 내 것도 아닌 돈을 멋대로 저 두 사람에게 내어주니 마니 해도 되는 걸까.
“클레어가 원하는 대로 하면 돼. 아마 지금 이 자리에 레이몬드나 유리 둘 중 누가 여기 있었어도 똑같이 말할 테지.”
카롤리나 황후는 꼭 내 마음속을 읽은 것처럼 다정하게 말을 걸어왔다. 그녀의 눈동자는 정말 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 과거에 내가 어떤 잘못을 했든 모두 다 용서해줄 것만 같아서. 나도 모르게 거기에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졌다.
―헤더 영애께 누군가 함부로 말하고 행동했을 때 참고 넘어가는 게 아니라, 반드시 합당한 사죄를 받으셔야 합니다. 얕보이면 잡아먹히는 곳이 이곳 황성입니다. 화를 내야 할 때는 내실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문득 이곳에 오기 직전 시녀장이 내게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화를 내야 할 때는 낼 줄도 알아야 한다. 그때도 왠지 그 말이 가슴 깊이 날아와 박혀드는 기분이었는데, 꼭 지금의 상황을 예언한 것처럼 내게 필요한 조언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카롤리나 황후에게 네, 하고 작게 대답한 후 두 사람에게로 시선을 가져갔다.
“도와드릴게요.”
일부러 불쌍한 척을 하려는 건지 머리를 조아린 채로 벌벌 떨던 두 사람의 몸이 움찔했다. 떨림이 멎은 고개를 슬며시 들어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에 숨기지 못한 기쁨이 엿보였다. 나는 그 눈동자가 참 역겹다고 생각했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긴장한 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해 나는 최대한 감정을 배제한 목소리로 담담하게 말을 내뱉었다.
“지난 몇 년간 트뷔에 백작부인과 거래한 장부가 남아있겠죠.”
기쁨과 안도의 감정으로 넘실거리던 에젯트 헤더의 표정이 굳었다.
“그걸 세상에 공개해주세요. 그리고 그 사람의 그림들이 사실은 내가 그린 거라는 걸 인정받게 해주세요. 당신들이 강제로 내 그림을 빼앗았고, 대리 화가는 결코 내가 원해서 한 게 아니란 사실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