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나의 새언니가 되어주세요! (8)
“불가능해.”
예상했던 대답이 나왔다. 나는 부끄러움에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했다. 내가 말을 꺼낸 것도 아닌데, 꼭 이쪽에서 시온에게 부탁해 그런 말을 꺼내게 한 것이라 오해 받을까 걱정스러웠다.
“물론 나는 클레어의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네. 하지만 버젯 교수가 맡기로 했던 신전의 제단화는 그리 단순한 의미가 아니지 않나.”
카롤리나 황후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코웃음을 치는 대신 현실적인 얘기를 꺼냈다.
“애초에 신전을 짓게 된 것도 신전과의 우호 관계를 이어가기 위함이지. 신전은 제단화를 그릴 화가로 알테노이즈를 지목했어. 거기에 우리 측에서 다른 화가를, 그것도 성국이 보기에 실력이 검증되지도 않았고, 세상에 알려지지도 않은 이름 없는 화가를 내세울 수는 없어.”
카롤리나 황후의 진지한 대답에 시온이 미간을 찌푸리며 내 쪽을 힐끔 돌아보았다. 시온이 무언의 눈빛으로 너 혹시 아직 트뷔에 백작부인에 대한 얘기는 안 했냐고 묻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시온이 보기에 내가 얼마나 답답하고 한심해 보일까 싶었다.
그래도 약간의 변명을 해보자면, 최근에 갑자기 너무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생기는 바람에 거기까진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다. 두 번째는 설령 그에 대해 언급한다고 해도 언제 어떻게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스스로 원해서 한 일은 아니었지만 내가 트뷔에 백작부인의 대리 화가였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모르는 이가 보기엔 당장 돈에 눈이 멀어 대리 화가를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터였다. 혹시라도 그 사실을 알고 카롤리나 황후나 유리 황녀가 내게 실망하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이 없지 않았다.
반대로 대리 화가 일을 세상에 터뜨렸을 때도 걱정인 건 마찬가지였다. 트뷔에 백작 부인과 에젯트 헤더가 함께 그 일을 부정하고 도리어 나를 거짓말쟁이로 몰고 갔을 때 스스로가 그걸 견뎌낼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물론 시온이 내 편이 되어줄 순 있겠지만, 에젯트 헤더가 트뷔에 백작 부인 쪽에 붙어 대리 화가 자체를 부정하고 나서면 대리 화가 일을 어떻게 증명해야 할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생각이 많으니 고민이 길어졌고, 고민이 길어지니 나도 모르게 포기하는 쪽으로 점점 마음이 기울었다.
그리고 또 하나, 내가 망설이고 있는 이유는…… 굳이 내 손으로 그 사람을 망가뜨리고 싶지 않다는 마음 탓이었다. 누군가는 이런 제가 너무 멍청하다고 손가락질할지도 모르겠으나 그게 진심이었다.
트뷔에 백작 부인은 몰라도 에젯트 헤더까지 나락으로 밀어 넣고 싶진 않았다. 어린 시절 나는 줄곧 에젯트 헤더로부터 학대받고 착취당했고, 그런 그녀를 용서할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그때 그녀가 어린 나를 설산에서 억지로라도 끌고 내려오지 않았다면 지금의 클레어 헤더도 없었을 것이다. 에젯트 헤더는 좋은 의도가 아니었다 해도 그 설산에서 얼어 죽지 않았기에 지금의 내가 있고, 유리 황녀를 비롯해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으니까. 그것만은 감사하고 있다.
그래서 굳이 에젯트 헤더까지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을 전부 빼앗아 불행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내가 워낙 속없는 바보라, 그녀를 그런 식으로 불행하게 만든 뒤에 매일 밤 편히 잠들 수 없을 것 같기도 했고.
‘신전의 제단화라…….’
트뷔에 백작 부인이나 에젯트 헤더에 대한 얘기는 제쳐두고, 나는 한 번도 생각도 해보지 않았던 꿈같은 이야기를 시온이 너무 아무렇지 않게 던져놓았다. 예전에도 한 번 비슷한 말을 듣긴 했지만, 그때도 애초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매한가지고.
그래도 카롤리나 황후가 무슨 터무니 없는 소리를 하냐는 투가 아니라, 현실적인 사정을 언급하며 지적해온 게 그나마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하지만 그건 당장 그렇다는 얘기고.”
각자 나름대로 생각에 잠겨있던 터라, 잠시 응접실에 내려앉았던 침묵을 카롤리나 황후가 깼다.
“상황이 바뀐다면 그에 맞춰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있겠지.”
시온을 바라보던 카롤리나 황후의 시선이 내게로 옮겨왔을 때였다.
똑똑.
응접실을 울리는 노크 소리에 나와 시온, 카롤리나 황후의 시선이 동시에 문가로 향했다.
“들어오라.”
어리둥절한 표정의 클레어와 시온과 달리, 카롤리나 황후는 마치 누군가 찾아올 걸 예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대답했다.
문이 열리자 시녀장이 카롤리나 황후를 향해 공손히 허리를 숙여 보인 후 응접실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섰다.
“무슨 일이지?”
“말씀을 나누시는 중에 죄송합니다만, 헤더 영애를 찾아온 이들이 있습니다.”
시녀장은 묘하게 시온을 의식하는 듯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에 카롤리나 황후가 한쪽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대답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빠르군.”
“예, 저도 놀랐습니다. 그쪽에서 연락을 받은 게 겨우 한 시간 전이었으니까요.”
“일단은…… 둘 다 이쪽으로 데려와.”
카롤리나 황후는 상대가 누군지 듣지도 않고 이미 알고 있다는 투로 시녀장에게 명령했다. 그러고는 다시 친절한 미소와 함께 시온과 나를 돌아보았다.
“헤더 영애의 손님이 갑자기 찾아온 모양이야. 조금 불편한 자리가 될 수 있으니 그동안 버젯 교수는 잠시 황성 안을 구경이라도 하는 게 어떨까 싶은데.”
“예? 아, 예! 그럼 그렇게 할까요. 하핫.”
갑작스러운 제안에 시온은 나와 카롤리나 황후를 번갈아 바라보다 얼른 웃으며 답했다. 눈치가 빠른 시온이 잽싸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다른 시녀에게 지시를 내리고 돌아온 시녀장이 자기를 따라오라는 듯 정중하게 말하며 앞장섰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가시지요.”
시온이 시녀장과 함께 응접실을 나가고, 카롤리나 황후와 둘만 남겨진 나는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내게 찾아온 손님이 또 있는 모양인데, 이번에는 카롤리나 황후가 자리를 비켜주지 않는 게 의아해서였다. 일부러 시온까지 내보냈으면서 본인은 전혀 나갈 의사가 없는 듯 우아하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카롤리나 황후에게 왜 이번엔 자리를 피해 주지 않으시는 거냐고 물어볼 수도 없어서, 계속 머릿속에 물음표를 띄우고만 있었다. 그 상태로 눈이 마주치자 카롤리나 황후가 나를 향해 다정하게 웃어주기도 했다. 몰래 그녀를 훔쳐보다 걸린 내가 뺨을 붉히며 시선을 떨어뜨릴 때였다.
열린 문 너머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싶어 시선을 가져갔던 나는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양쪽의 기사들에게 거의 끌려들어오다시피하는 두 사람이 보였다.
헤더 자작과 에젯트 헤더였다.
에젯트 헤더는 둘째치고, 헤더 자작은 한 눈에 알아보지도 못했다. 가뜩이나 얼굴도 가물가물한데다 마지막에 봤던 모습보다 너무 마르고 초라해서 처음엔 다른 사람인줄로만 알았다.
“클레어?”
잔뜩 위축되어있던 에젯트 헤더가 먼저 나를 알아보고 아는 체를 해왔다. 나는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두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다 겨우 정신을 차렸다.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 두 사람에게 다가가려는데, 카롤리나 황후의 손이 뻗어와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아챘다.
나는 움찔하며 당황한 시선을 가져갔다. 카롤리나 황후가 여전히 인자하고 다정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 눈짓으로 소파를 가리켰다. 다시 앉으라는 의미 같아서, 나도 모르게 주르륵 주저앉듯 다시 소파에 앉았다.
“화, 황후 폐하.”
멀뚱히 나만 쳐다보던 두 사람도 그제야 카롤리나 황후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화,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이, 인사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황후 폐하께서 함께 계신 줄은 꿈에도 모르고…….”
갑자기 멍청이가 되기라도 한 건지 처음엔 눈만 끔뻑거리던 둘은 카롤리나 황후를 알아보고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납작 엎드렸다.
“저는 크렌든 헤더 자작이라 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제 누이인 에젯트 헤더입니다. 클레어에게는 숙부와 고모가 되는 사람으로, 제 형님의 딸인 클레어를 어릴 때부터 저희가 친부모나 다름없이 키워왔습니다.”
카롤리나 황후를 의식해 나와의 친인척 관계를 강조하는 헤더 자작의 태도에 나는 순간 헛웃음을 삼켰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술술 늘어놓는 게, 나조차도 정말 어린 시절 저 사람이 나를 돌봐주었던 때가 한순간이라도 있었던 게 아닐까 헷갈릴 정도였다.
나는 그런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떼고 불안한 눈으로 카롤리나 황후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저 두 사람이 내가 수도에 돌아온 타이밍에 맞춰 여길 찾아온 걸까. 설마 나를 다시 그 좁고 낡은 방으로 끌고 가 또 누군가의 대리 화가로 쓸 생각인가.
헤더 자작과 에젯트 헤더가 지금 와서 나를 찾아온 이유를 알 수 없어 불안했다. 카롤리나 황후라도 없는 자리라면 모를까, 그녀가 보는 앞에서 못 볼 꼴을 보이게 될까 걱정스러웠다.
애초에 저 둘이 무슨 낯짝으로 여기까지 어떻게 찾아올 생각을 한 걸까. 그리고 카롤리나 황후는 왜 저 두 사람을 황후궁에까지 들인 걸까. 단순히 저 두 사람이 내 숙부와 고모라서? 아니면 무언가 다른 이유가 더 있는 걸까.
내 시선을 느낀 카롤리나 황후가 나를 돌아보고는 빙긋 웃었다. 마치 아무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그러고는 그녀가 손짓으로 아직 방안에 남아있던 기사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나이가 드니 왔다 갔다 하는 것도 피곤하더군. 나도 아직 클레어와 할 얘기가 남아서 기다릴 생각인데. 나는 신경 쓰지 말고 편히 대화들 나누시게.”
기사들이 나가고 문이 굳게 닫히자마자 그녀가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카롤리나 황후는 아예 응접실에 남아서 저 두 사람이 뭐라고 지껄이는지 다 듣겠다 선언하고 나왔다. 그녀의 말에 나는 물론 헤더 자작과 에젯트 헤더도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내게 시선을 던져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게도 별다른 수가 있는 건 아니었다. 카롤리나 황후가 그리하겠다고 하면 나로서는 그저 조용히 수긍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이제야 겨우 카롤리나 황후에게도 인정을 받고 분에 넘치는 호의를 받고 있었건만, 어쩌면 오늘로써 그것도 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나는 새어 나오는 한숨을 삼키며 헤더 자작과 에젯트 헤더를 바라보았다. 할 말이 뭐냐고 묻는 내 시선에 두 사람이 슬금슬금 내 쪽을 향해 무릎걸음으로 다가왔다.
한없이 비굴한 그 모습에 나는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내게 원하는 게 뭐기에, 나를 키우는 가축만도 못하게 여기던 두 사람이 저러나 싶어 불안만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