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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나의 새언니가 되어주세요! (7) (137/152)

07. 나의 새언니가 되어주세요! (7)

그렇지 않아도 나 역시 성녀 아리아를 생각하면 조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어제도 우연히 중앙정원을 지나치는 성녀 아리아를 만난 적이 있는데, 전보다 더 경비가 삼엄해져 멀리서 스치듯 그녀를 본 게 다였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유리 황녀의 2차 협박 사건으로 성녀 아리아가 휘말려 같이 궁에서 떨어지면서 일부 기억을 잃은 탓이었다.

레이몬드 2황자가 두 사람이 땅에 닿기 직전 상처 하나 없이 무사히 구해내긴 했지만, 어째서인지 성녀는 성국을 떠날 때부터 제국에서 지냈던 동안의 기억을 전부 잃어버리고 말았다. 덕분에 한바탕 성국에서 이번 일에 대해 해명하라는 둥 거세게 항의를 해왔다고 들었다.

기억을 잃은 성녀는 예전의 그녀와는 분위기가 자체가 바뀌었다고 해야 할지, 완전히 다른 사람을 보는 느낌이었다. 예전의 그녀는 좀 더 통통 튀고 밝은 매력의 소유자였는데, 지금은 정적이고 차분한 분위기가 가까이 하기 어려운 느낌을 자아냈다.

가뜩이나 같은 사람이라고는 믿기 힘든 아름다운 외모에, 그녀가 지닌 신성하고 특별한 분위기가 더해져 눈을 떼지 못하게 했다. 아마 클레어와 유리 황녀, 레이몬드 2황자, 알렌 4황자, 심지어는 리하르트 아델까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고 낯선 이를 보듯 하는 시선이나 태도 탓도 있겠지만.

유리 황녀는 마치 이렇게 될 걸 예상이라도 한 듯 담담한 반응이었다. 어쩔 수 없다는 투로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와 조금 친해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혼자 친밀감을 쌓고 있었던 나로서는 조금 섭섭한 마음도 있었다. 그래서 우연히 마주친 김에 혹시나 성녀가 기억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말이라도 걸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다른 성기사들의 경계가 워낙 심해 다가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황성 안에도 워낙 성녀 아리아의 추종자들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앞서 걷던 시녀장이 정면을 응시한 채로 담담히 말을 걸어왔다. 성녀 아리아를 생각하고 있던 나는 다시 시녀장의 뒷모습에 시선을 가져갔다.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고 멋대로 판단하고 지껄여대는 건 우매한 인간들의 특성인 듯합니다. 저 역시도 그랬고요.”

황후궁을 향해 걸어가는 걸음을 멈추지도,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서, 천천히 말을 건네오는 시녀장의 목소리에 나는 귀를 기울였다.

“그러니 저런 시답잖은 말에 휘둘리시거나 상처받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2황자 전하의 약혼녀로서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행동하시면 됩니다.”

지나치게 사무적이고 딱딱한 음성이었지만, 그런데도 왠지 시녀장이 그녀 나름대로 나를 위로해주려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저 아이들은 두 번 다시 황성 안에 발도 들이지 못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성 안의 사용인들 중 누구도 다시는 저딴 헛소리를 지껄이지 못하게 조금 더 세심히 관리하겠습니다.”

나는 시녀장을 따라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면서, 그녀의 말에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했다. 저 때문에 죄송합니다? 아니면 감사합니다? 대답을 고민하는 사이 우리는 황후궁 안으로 들어섰다. 황후궁 시녀들의 인사에 고갯짓으로 답한 시녀장이 내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뒤를 한 번 돌아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애들을 쫓아내기 전에 영애께 고개 숙여 사죄를 드리도록 따로 자리도 만들겠습니다. 지금은 황후 폐하와 손님을 기다리시게 하면 안 되니 잠시 미뤄둔 것뿐입니다.”

“저,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아뇨, 필요합니다.”

응접실의 거대한 문 앞에서 멈춰선 시녀장이 돌아서서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섰다.

“헤더 영애께서도 앞으로는 저나 누군가 나서지 않더라도 반드시 꼭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정중하지만 단호한 음성이 무르고 우유부단한 내 언행을 질책하듯 말했다.

“헤더 영애께 누군가 함부로 말하고 행동했을 때 참고 넘어가는 게 아니라, 반드시 합당한 사죄를 받으셔야 합니다. 얕보이면 잡아먹히는 곳이 이곳 황성입니다. 화를 내야 할 때는 내실 줄도 알아야 합니다.”

무표정하고 고집스러운 얼굴로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하던 시녀장이 갑자기 내게 허리를 깊이 숙여 보였다. 놀란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헤더 영애께서 이 황성에서 살아가시는데 꼭 필요한 조언이라 생각해 감히 말씀드렸습니다만, 저 또한 주제넘게 건방진 말로 참견한 점은 사죄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마치 이미 내가 황자비가 된 것처럼 나를 대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어서 고개를 드시라며 그녀에게 다가서다 멈칫했다.

시녀장은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뒤를 받쳐줄 가문의 힘도 하나 없이, 모자라고 심약한 내가 이곳에서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을지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카롤리나 황후처럼 나를 어떻게든 유리 황녀의 곁에서 떼어내고 싶은 눈으로 나를 보던 시녀장이었기에, 나는 조금 얼떨떨하면서도 왠지 그녀에게도 인정을 받은 것 같아 조금 기뻤다.

나를 위한 조언과 사죄의 말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그녀가 기뻐할까 잠시 고민해보았다.

“감사합니다.”

나는 그녀가 내게 한 것처럼 똑같이 허리를 숙여 깊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다 저를 걱정해서 해주신 말씀이죠. 가슴에 새겨듣고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내 진심을 담아 마음을 전하고 고개를 들자, 조금 전의 나와 마찬가지로 얼떨떨한 표정을 짓던 시녀장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마주칠 때마다 늘 인형처럼 무표정하던 그녀가 웃는 모습에 나는 내심 놀랐으나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크흠.

힐끔거리는 내 시선을 느낀 건지, 시녀장이 입가의 미소를 지우고는 손을 입가에 댄 채 낮게 헛기침을 했다.

“손님은 응접실 안에 계십니다.”

시녀장이 문가로 다시 몸을 돌려세우며 꺼낸 말에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손님? 카롤리나 황후가 아니라?

의아함이 깃든 시선을 던지고 있으니, 시녀장이 손을 들어 응접실의 문을 똑똑 두드렸다.

“헤더 영애께서 오셨습니다.”

문 너머에서 누군가가 빠르게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카롤리나 황후가 그럴 리는 없고, 대체 나를 찾아온 손님이 누굴까 고민하는데, 문이 벌컥 열리며 낯익은 얼굴이 드러났다.

“클레어!”

빠르게 달려와 내 몸을 와락 끌어안는 상대를 무심코 마주 안았다. 나는 놀란 눈을 깜빡이며 붉은 머리칼을 지닌 손님의 이름을 불렀다.

“시온?”

* * *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조심스레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살짝 식은땀이 배어난 손바닥을 치마에 문질러 닦으며 옆자리와 맞은편 어디로 시선을 가져가야 할지 잠깐 망설였다.

“전부터 황후 폐하의 뛰어난 식견과 안목을 익히 들어 알고는 있었습니다만, 실제로 뵈니 훨씬 더 깊은 심미안을 지니신 분이라 탄복했습니다. 게다가 이리도 아름다우시고 인품까지 완벽한 분이시라니, 지금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가문에 다시 없을 영광입니다.”

“아니, 나야말로 이렇게 버젯 교수를 직접 만나게 되어 영광이네. 예전부터 꼭 한 번 황성에 초대하고 싶었는데 기회가 닿지 않아 무척 아쉬웠어.”

“어휴, 아닙니다. 제가 뭐라고요. 전 그냥 잔재주나 조금 부릴 줄 아는 그림쟁이에 불과한데요. 대륙의 모든 여성들이 존경해 마지 않는 황후 폐하께서 그리 말씀해주시니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잔재주라기엔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명작들을 숨 쉬듯 그려내지 않았나.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포함해 대륙의 수많은 컬렉터들이 눈에 불을 켜고 그대의 작품을 기다리고 있는데.”

“에이, 과찬이십니다. 이제 한물간 그림쟁이를 너무 띄워주시는 것 같습니다. 하하핫.”

평소와 달리 무척 들뜨고 즐거워 보이는 카롤리나 황후와 그런 그녀의 앞에서 어색하게 뒷머리를 긁으며 열심히 대화를 이어가는 시온의 사이에서, 나는 조용히 차만 한 모금 더 마셨다.

어제 오늘 유리 황녀에게 무서울 정도로 집요한 「우리 오빠와 결혼하라!」는 요구를 받고 있던 나는 오후 늦게 카롤리나 황후의 초대를 받았다. 카롤리나 황후의 부름을 따라 황후궁의 응접실로 가니 낯익은 얼굴의 손님이 나를 맞이했다.

―클레어!

내 얼굴을 보자마자 달려와 와락 끌어안은 손님의 정체는 시온이었다. 시온은 마치 잃어버린 가족이라도 만난 양 펑펑 눈물을 쏟더니 내게 이런저런 질문을 쏟아냈다. 다른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시온 역시 어떻게 살아 돌아온 거냐는 질문이 먼저였다. 나는 시온이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만 그간의 사정을 설명해 그녀의 궁금증을 해결해주었다.

그리고 그녀로부터 좋은 소식도 있었다. 그동안 좋은 의사와 제 몸에 맞는 약을 찾아 시온의 지병이 차츰 나아가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완벽하진 않지만 굳어가던 손이 점점 원래의 감각을 되찾고 있다고. 나는 그 얘기를 듣자마자 내 일처럼 기뻐하며 축하해주었다.

둘이서만 회포를 풀 수 있도록 배려해준 것인지, 카롤리나 황후는 그로부터 1시간 후에 모습을 드러냈다. 카롤리나 황후는 응접실로 들어선 순간부터 시온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카롤리나 황후는 시온에 대한 호감과 호기심을 숨기지 않고서 드러내며 지금까지 줄곧 즐겁게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나는 왠지 자신이 끼면 안 될 자리에 끼어 있는 것 같아 앉은 자리가 조금 불편하고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실은 하나 제가 조심스럽게 제안을 드릴 게 있습니다만.”

이제껏 카롤리나 황후와 서로 칭찬을 주고받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끌어가던 시온이 크흠흠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바꿨다. 카롤리나 황후가 뭐든 말해보라는 듯한 포용적인 시선을 던졌고, 그에 시온이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번에 원래 제가 맡기로 했던 신전의 제단화를 클레어에게 맡겨보면 어떨까 싶어서요. 클레어의 실력이라면 이미 황후 폐하께서도 충분히 알아보셨을 듯하고요. 소문을 들어서 알고 계시겠지만 저는 당장 손이 이래서 당분간은 그림을 제대로 그릴 수가 없으니까요. 무엇보다 제국에서 짓는 신전의 제단화를 타국 사람인 제가 그리는 것보다는, 제국에서 나고 자란 클레어가 그리는 게 더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설마 대화 중간중간 나에 대한 칭찬도 아끼지 않았던 게 지금 이 얘기를 꺼내려고 그랬던 건가. 내게 의견을 묻지도 않고 카롤리나 황후에게 곧바로 얘길 꺼낸 시온을 보며 나는 아연한 얼굴을 했다.

“그건…….”

당연하게도 카롤리나 황후의 얼굴엔 곤란한 빛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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