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나의 새언니가 되어주세요! (6)
“재현 오빠는 몰라도, 김유리는 데려오고 싶지 않았어. 그냥 그랬어. 김유리는 미워할 수가 없었어. 내 욕심으로 괴롭게 만들고 싶지 않았어.”
점점 어둠에 집어삼켜지는 게 자신의 뜻이 아닌지, 어느새 몸의 반이 사라진 채로 여자애가 초조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대신 김유리랑 닮은 너를 만들어냈던 거야. 진짜 김유리를 마주할 용기는 없으면서, 그래도 김유리 자체나 다름없는 네가 끝까지 내 이야기를 봐줬으면 했어.”
행여나 말을 다 전하지 못하고 사라질까. 여자애가 불안정한 표정과 목소리로 말을 잇고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미안해, 너한테는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어깨를 지나 목 위로 올라오는 어둠을 알아챈 여자애가 겨우 시선을 들었다. 여전히 화가 난 얼굴의 유리를 보며 또박또박 사과의 말을 전했다.
“미안, 진짜 시간이 없어. 그 대신이라고 하긴 뭣하지만, 이제 두 번 다시 너희들 이야기에 멋대로 손대지 않을게. 아니, 손댈 수 없다는 게 맞으려나.”
“겨우 그걸로 퉁치겠다고?”
유리가 눈에 쌍심지를 켜자 여자애가 짧게 웃었다. 역시 진짜 김유리 같기도 하고,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여자애의 입술이, 코가, 눈동자가 사라져갔다. 목소리마저도 점점 흐릿하게 들려왔다.
“시작은 내가 했지만 지금 그 이야기들은 전부 너희가 써나간 거니까.”
순간 느낌이 이상해 유리가 아래를 바라보니, 유리 자신의 몸도 서서히 어둠에 삼켜지고 있었다.
“그러니 앞으로도 마지막까지 잘 부탁해, 유리 황녀.”
미안함이 깃든, 하지만 여전히 자기 혼자 마음의 짐들을 다 털어낸 듯한 목소리였다. 유리는 상대의 제멋대로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시간이 없다는 말은 진짜인 것 같았다. 그래서 제 억울함을 따지고 분노를 토로하는 대신 다른 질문을 꺼내 들었다.
“부탁한다는 말까지 들은 김에 나도 하나만 더 묻자.”
이제는 여자애의 모습이 거의 사라지고 없어서 제 말을 듣고는 있는 건지 확신은 없었다. 그래도 이것만은 꼭 묻고 싶었다.
“너 말야, 사실은 클레어 헤더를 여자주인공으로 만들고 싶었던 거지?”
그렇게나 클레어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하듯 괴롭혀댔지만, 줄곧 클레어를 이 이야기의 방해물처럼 취급했었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왠지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눈앞의 여자애는 어쩌면 성녀 아리아가 아니라, 클레어 헤더를 여자주인공으로 삼고 싶었던 게 아닌가 하는.
모두에게 사랑받는 여주가 아니라, 모두에게 미움받던 여주가 행복해지는 결말의 이야기를 바랐기에, 김유리를 모티브로 한 유리 황녀를 만들어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결국엔 원하는 결말을 이뤄낸 지금에 와서야 제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는 걸지도 모른다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대신 귓가에 얼핏 고마웠어, 하고 말하던 목소리가 들렸던 것 같기도 했다.
그 기억을 끝으로 유리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금세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얼굴의 클레어가 눈앞에 있었다.
‘참 나, 설마 나도 결국 이 이야기 안의 인물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니.’
유리는 화가 나고 허탈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아주 조금 자유로워진 마음도 들었다.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클레어의 곁에, 모두의 곁에 남아도 된다. 나를 좋아해주는 듬직한 오빠들과 귀여운 남동생,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새언니가 있는 세계에서 앞으로도 살아갈 수 있다. 그 사실만은 더없이 기쁘고 행복했다.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는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과 홀로 싸우고 괴로워해야 했던 기억은 여전히 죽을 만큼 억울했지만. 그동안 엄청나게 마음 고생을 하고 울고불고했던 거에 비해 보상이 너무 형편없어 분노가 치밀었지만.
그래도 해피엔딩에 가까워진 지금, 훨씬 마음이 편안해진 건 사실이었다.
유리는 씩 웃으며 나머지 팔도 뻗었다. 당황하는 레이몬드와 클레어를 동시에 힘껏 끌어안았다.
가슴이 벅차오르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원작자 허락도 받았겠다. 앞으로는 정말 우리가 쓰고 싶은 대로 써나갈 우리들의 미래가 기대되고 설레어 견딜 수가 없었다.
“누님, 알렌도요!”
유리에 의해 클레어와 레이몬드까지 셋이서 어정쩡하게 끌어안고 있는 모습에 알렌도 합세해 뛰어들었다. 알렌이 짧은 팔로 클레어의 등을 끌어안으며 와락 안겨 오자, 유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알렌 너도 와! 내가 다 안아줄…… 잠깐만.”
어딘가 나사 하나가 빠진 것처럼 헤벌쭉 웃고 있던 유리의 표정이 한순간 얼어붙었다.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는 듯 유리의 눈동자가 치켜 올라가며 매처럼 날카로워졌다.
갑작스러운 유리의 변화에 클레어와 레이몬드가 고개를 들어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두 사람뿐만 아니라 알렌과 주변에서 지켜보고 있던 이들까지 살짝 긴장한 얼굴로 유리에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심각한 얼굴을 한 채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유리 황녀가 클레어와 레이몬드의 어깨를 붙잡고서 물었다.
“둘이 진짜 결혼할 거지? 언제 할 거야?”
결국 또 그거냐. 레이몬드는 잠깐이라도 이 바보한테 긴장한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살짝 짜증이 깃든 눈빛으로 유리를 노려보다 클레어의 표정을 살피는데, 푸흡! 하고 웃음이 터진 클레어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어깨를 들썩이며 웃어댔다.
저렇게까지 큰 소리로 웃는 클레어의 모습은 처음 보는 터라, 레이몬드와 유리가 놀란 얼굴을 하는 가운데 클레어는 계속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클레어가 답을 줄 생각은 않고 웃기만 하자, 처음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던 유리의 미간이 서서히 좁아졌다. 그리고 기어이 불만이 터져 나왔다.
“아, 언니 웃지만 말고요!”
애원과 투정 사이 그 어딘가 같은 유리의 외침이 평화로운 황성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우리 오빠랑 정확히 언제 결혼할 거냐고요오오오!”
* * *
유리 황녀, 알렌 4황자와의 점심식사가 막 끝났을 무렵, 시녀장을 통해 카롤리나 황후로부터 부름을 받았다. 같이 가겠다며 내 뒤에 따라붙었던 유리 황녀와 알렌 4황자는 각자의 개인 교사에게 반강제로 끌려갔다. 시간 내로 오늘치 공부를 끝내지 못하면 저녁까지 시달려야 한다는 걸 아는 두 사람은 얌전히 개인 교사를 따라갔다.
덕분에 혼자 남은 나는 시녀장을 따라 여전히 부담스러울 만큼 많은 기사들을 대동한 채 황후궁으로 향했다.
“우리 성녀님 가여워서 못 보겠어.”
“나도 생각만 해도 눈물 나려고 한다니까.”
황후궁으로 향하던 도중 이제 갓 성인식을 치른 듯한 어린 시녀들이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황후궁으로 향하는 길 중에서 제일 인적이 드문 길이라 그런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시녀 네 명이 구석에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게 보였다.
“아무리 봐도 두 분이 훨씬 잘 어울리지 않아? 그런 보잘것없은 여자보다는.”
“헤더 자작가라고 했던가? 애초에 제국에 그런 가문이 있었는지도 의심스러워.”
아마 휴식 시간을 가지고 있는 듯한 그녀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지나갈 생각이었다. 일부러 시녀들이 서있는 방향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 빠르게 걸음을 옮기던 내 발이 무의식중에 멈춰섰다. 물론 시녀장은 나보다 더 먼저 멈춰선 채 그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헤더 자작 영애, 원래부터 유명하긴 했잖아. 아델 공작의 정부로.”
“어느 모로 보나 격이 너무 떨어져. 1년 전에 사라졌다더니 뭐하러 돌아와서는.”
“마물한테 잡아먹혔다던데, 어떻게 살아 돌아온 거래? 알고 보면 마물이 그 여자인 척하고 돌아온 거 아니야?”
“소름 끼쳐. 진짜 그런 거 아냐?”
주변에 사람이 없다고 생각해서인지 대화를 나누는 시녀들의 음성이 점점 커졌다. 덕분에 듣고 싶지 않아도 그녀들이 나누는 대화가 전부 들렸다.
내 뒤를 따르던 기사들도 금세 그녀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아채고는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곤란한 기색을 내비치는 게 느껴졌다. 어찌할 바를 몰라하는 기사들과 달리 시녀장은 무표정한 얼굴로 시녀들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우리 성녀님 얼마나 충격이 크셨으면 기억까지 잃으셨을까.”
“그러고 보니 2황자 전하께서도 기억을 잃으셨었잖아. 진짜 그것도 그 여자가 한 짓 아닐…….”
“다들 얼마나 한가하면 모여서 짖어댈 시간도 있나 보군.”
싸늘한 목소리에 시녀들의 대화가 뚝 끊겼고, 깜짝 놀란 시녀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헉! 경악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서서 시녀장을 발견하자마자 창백하게 질리는 얼굴들이 아직 앳되었다. 예상대로 이제 막 성인식을 치르고 성에 들어온 시녀들인 것 같았다.
“얼굴은 다 기억했으니 나중에 다시 얘기하지. 일단 네 사람 다 오늘 안으로 짐을 싸두는 게 좋겠어.”
다급히 고개를 푹 숙인 채 벌벌 떠는 시녀들의 뒤통수로 싸늘한 시선이 내리꽂혔다. 시녀장의 말에 그렇지 않아도 하얗던 얼굴들이 더 새하얘졌다.
물론 나라고 그런 소리를 듣고 기분이 좋은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직 어린 시녀들이 황성에서 내쫓기는 걸 보는 마음도 편하진 않았다. 벌써 겁에 질려 눈물을 뚝뚝 흘리는 시녀도 있었고.
“죄,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하,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그 중 한 명이 무릎을 털썩 꿇으며 두 손을 모아 싹싹 빌고 나오자, 눈치만 보던 다른 시녀들도 너나 할 것 없이 무릎을 꿇으며 애원하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제발 용서해 주세요. 여, 여기서 쫓겨나 돌아가면 가문에서도 쫓겨날지도 모릅니다.”
“저, 저도 아버지께서 용서하지 않으실 겁니다. 부디 자비를…….”
“그만.”
싸늘한 목소리가 그녀들의 애원을 잘라냈다. 시녀장은 일말의 동정도 비치지 않는 눈으로 그녀들을 한심하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나중에 얘기하자 했을 터.”
시녀라고는 해도 대부분 나와 비슷하거나 조금 높은 가문의 여식들일 터였다. 이제 막 성인식을 치르고 황성에 들어왔을 어린 영애들이 저렇게 머리를 조아리고 비는 모습에 마음이 불편해졌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끼어들어도 되는 건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으니, 시녀장이 할 말이 끝난 듯 다시 내 쪽으로 다가왔다.
“가시죠, 황후 폐하께서 기다리십니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먼저 앞서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래도 저 시녀들을 쫓아내는 건 재고해주실 수 없느냐고, 시녀장에게 말을 해볼까 몇 번이나 고민하다 관뒀다. 시녀들을 관리하는 건 그녀의 일이니 내가 뭐라고 함부로 이래라 저래라 하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우리 성녀님 얼마나 충격이 크셨으면 기억까지 잃으셨을까.
나는 시녀장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고는 시녀들이 나누던 대화 중 성녀 아리아에 대한 얘기를 다시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