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나의 새언니가 되어주세요! (5)
의식이 없는 여동생도 걱정이지만, 품 안에 있는 작고 따뜻한 몸의 심장이 무사히 뛰고 있는 게 느껴져 안도할 수 있었다. 그보다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이는 클레어가 더 걱정이었다. 유리를 안고 있지 않았다면 팔을 뻗어 끌어안아 주었을 텐데.
클레어에게 한 번 더 유리는 단순히 정신을 잃은 것뿐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려는 찰나, 레이몬드는 제 품에 안겨 있던 유리의 몸이 움찔하는 걸 알아챘다.
“유리……?”
레이몬드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유리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목소리에 클레어도 다급히 손을 떼고 유리에게로 시선을 가져갔다.
유리의 미간이 찌푸려지더니 금색의 눈동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몽롱한 눈동자가 졸린 듯 나른하게 깜빡이더니 바로 앞에 있는 클레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꼭 낯선 이를 보는 시선이었다. 온전히 모르는 타인을 보듯 무감각한.
“……유리님?”
눈물로 범벅된 클레어의 눈동자가 불안한 빛을 띠고서 유리를 바라보았다. 혹시 조금이라도 땅에 머리나 몸을 부딪쳤던 건 아닐까. 그래서 레이몬드 2황자가 그랬던 것처럼 저를 잊어버린 건 아닐까. 가슴 속의 불안이 점점 크기를 키워갈 즈음이었다.
몇 번 더 눈동자를 깜빡이던 유리가 기운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언니……, 왜 울고 있어요?”
여전히 잠이 덜 깬 것처럼 졸린 눈동자는 여전했지만, 분명히 저를 알아보고 말을 걸어오는 건 평소의 유리 황녀와 똑같았다.
“또 누가 괴롭혔……켁!”
말도 없이 유리 황녀의 몸을 와락 끌어안은 클레어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말을 하다 갑자기 끌어안기는 바람에 당황하던 유리의 입가에 어쩔 수 없다는 미소가 걸렸다.
유리는 팔을 뻗어 서럽게 우는 클레어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클레어가 제 앞에서 이렇게까지 격렬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건 처음 보는 듯했다. 본의 아니게 생각보다 더 걱정을 끼친 모양이라 미안한 마음이 커졌다.
클레어의 등을 토닥이는 유리의 손 옆으로 레이몬드의 손이 마찬가지로 그녀를 달래듯 클레어의 등을 감쌌다. 유리는 눈동자를 들어 가까이서 보니 더 잘난 둘째 오빠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제 막 의식을 되찾은 여동생이 아니라 제 연인을 걱정스레 응시하는 금색 눈동자가 애틋하고 다정했다.
‘역시 내가 언니 남편감 하나는 잘 골랐다니까.’
서운함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뿌듯한 성취감이 가득 차올랐다. 유리는 울음을 멈추지 못하는 클레어를 달래주면서도 흐뭇한 미소로 레이몬드의 잘난 옆얼굴을 꼼꼼하게 훑어보았다.
역시 남주라면 저 정도는 돼야지. 잘생겼고, 멋있고, 능력도 좋고, 성격도 여주에게만 다정다감하고, 바람피울 걱정도 없는 여주바라기에, 그야말로 이상적인 남자주인공.
처음의 목표대로, 사명을 완수한 유리의 얼굴에 편안한 미소가 내걸렸다.
클레어를 만나고, 클레어와 레이몬드를 이어주기로 결심한 뒤로 매일 같이 두 사람을 이어줄 생각만 했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양피지를 펼쳐 놓고 그 위에 클레어 헤더의 해피엔딩을 위하여 라고 거창하게 쓴 뒤 혼자 심각하게 골머리를 앓았던 기억들이 하나 둘 차례대로 떠올랐다.
처음엔 어째서 내가 이세계로 건너오게 된 건지, 왜 유리 황녀의 몸에 빙의된 건지. 이유도 모른 채 원래 세계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이대로 살아야 한다는 게 억울했다. 그래서 반쯤은 자신을 이렇게 만든 누군가를 향한 반발심에 시작한 원작 뒤엎기였다.
거기에 이제 「어쩌면 나는 레이몬드 알렉 카지스와 클레어 헤더를 이어주는 사명을 띠고 이 책 속으로 들어온 걸지도 모른다」라는 어설픈 영웅 심리를 섞은 거였다. 그때 진심 반 농담 반으로 말했던 게 진짜였을 줄이야.
유리는 클레어와 레이몬드 몰래 살짝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이 세계에 남기로 결심했던 순간, 어둠 속에서 진짜 「신」과 만났던 기억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 * *
“뭘 그렇게 세상이 다 끝난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
성녀 아리아, 아니, 성녀 아리아였던 누군가가 빛을 향해 걸어가고 혼자 남겨졌을 때였다. 빛을 향해 걸어가지 않고 혼자 제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눈물만 하염없이 흘리고 있는 유리에게 낯선 여자애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검은 머리칼에 검은 눈동자. 아까 그 남자처럼 낯설고 생소한 외모의 여자애가 불쑥 나타나 유리의 옆에 서 있었다. 어둠 속에서 갑자기 나타난 여자애로 인해 놀란 유리의 눈동자가 또다시 두려움과 경계심으로 물들었다.
“넌…… 누구야?”
“나? 아, 하긴. 내 얼굴은 모르는 게 당연하겠네. 애초에 그냥 김유리의 기억을 적당히 심어줬을 뿐이니까.”
여자애는 잠시 제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태연히 유리의 진짜 이름을 언급하며 말했다.
점점 더 여자애의 존재가 의심스러워진 유리가 주춤거리며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런 유리를 보며 여자애가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내 이름은 신은지야. 너를 만들고, 재현 오빠를 이쪽 세계로 끌고 들어온 이 세계의 신.”
여자애가 밝힌 이름을 들은 유리의 눈동자에 이해할 수 없다는 빛이 떠올랐다.
“네가 신은지라고?”
신은지? 김유리였던 내 친구이자 나를 이 소설로 끌고 들어온 원작자? 눈앞에 있는 저 애가?
“이름을 알려줘도 얼굴을 봐도 내가 누군지 모르겠고, 지금까지 네가 알고 있던 게 뭔지도 헷갈리기 시작하겠지.”
혼란이 깃든 유리의 표정을 확인한 여자애가 마치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그리고 유리가 머릿속을 정리할 수 있게 일부러 기다려주듯 한참을 침묵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넌 그동안 네가 들어가 있는 몸의 진짜 주인인 유리 황녀가 어디로 갔는지는 궁금하지 않았어? 그리고 기억을 잃은 유리 황녀가 김유리였을 때와 똑같이 말하고 행동해도 주변 사람들이 전혀 위화감을 느끼지 않던 건?”
여자애는 유리가 유리 황녀의 몸으로 깨어난 뒤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문제들을 언급했다.
그래, 단 한 번도 궁금해하지도, 생각해본 적도 없는 문제였다. 진짜 유리 황녀가 어디로 간 것이며, 김유리였을 때의 자신 그대로 말하고 행동해도 어째서 주변 사람들이 아무 위화감 없이 저를 받아들여줬는지.
단순히 기억을 잃었다는 이유로 이해해준다고 하기엔 마치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모두가 아무 의심도 없이 자신을 대해주었다. 자신이 보이는 말투, 행동, 습관 하나하나가 처음부터 유리 황녀였던 것처럼.
“있잖아, 정말 한 번도 의심해본 적 없어?”
유리는 계속해서 이어지는 질문에 하나도 대답하지 못했다. 여자애는 그것마저도 예상했다는 표정으로 유리를 바라보았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넌 누구라고 생각해? 김유리? 아니면 유리 황녀?”
여자애의 질문이 하나씩 얹어질 때마다 유리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이 됐다. 여자애가 하는 말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다가도, 이제야 하나씩 퍼즐이 맞춰져 나가듯 이해가 되는 부분들도 있었다.
어째서 이쪽 세계로 건너올 때 당시의 기억이 없는지. 막상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구체적으로 그쪽 세계에서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지. 내가 사랑했던 가족들은 누구이며, 그곳에서의 김유리는 어땠으며, 소설 외에 김유리가 나고 자란 곳에 대한 기억들은 하나도 없는지.
“재현 오빠는 이야기가 엔딩을 맞이했으니까 돌려보낸 거야. 이제 재현 오빠가 빙의해 있었던 성녀 아리아에 대한 존재나 기억들은 내가 적당히 지우고 조작할 거고.”
겨우 질문의 답을 찾아가기 시작한 유리에게 여자애가 이제는 거의 사라진 빛무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넌 원래 세계로 돌아갈지 말지 고민하지 않아도 돼.”
여자애는 이번에도 유리의 머릿속을 전부 꿰뚫어 본 것처럼 묻지도 않은 걸 대답했다. 새까만 어둠과 똑같은 눈동자에 아주 잠깐 미안함이 담긴 빛이 스쳤다.
“넌 이곳에 남아야 하니까.”
빛무리를 가리키던 손가락이 이번엔 유리를 가리켰다. 지금 네 모습을 한 번 보라는 듯이.
의심 가득한 눈으로 여자애를 바라보던 유리의 표정이 굳었다. 혼란스러운 눈으로 제 몸을 내려다보는 유리에게, 여자애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쉽게 말해 넌 그냥 그런 설정의 캐릭터일 뿐이라는 뜻이야. 네가 좋아죽는 클레어나 레이몬드처럼 너도 소설 속의 인물이라는 거지. 대한민국에 살던 김유리라는 여고생이 이세계로 건너왔다는 설정의 유리 크리스틴 카지스 황녀. 소설 『이세계 소녀, 성녀 되다?!』를 포함해 네가 알고 있는 모든 건 내가 너한테 넣어준 설정의 일부들이고.”
상대가 전혀 모르는 낯선 언어로 말을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을 한 번에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새하얘진 머릿속으로 여자애가 말하는 단어와 문장이 하나도 들어오질 못하는 느낌이었다.
충격으로 굳은 유리를 보며 여자애가 잠깐 말을 멈췄다.
“김유리를 모티브로 잡긴 했지만 넌 김유리가 아니야. 사실…… 별로 닮지도 않았어.”
옅은 한숨이 여자애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클레어 헤더도, 나와 전혀 닮지 않았듯이.”
별로 시간이 없네. 말끝에 여자애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제야 정신이 든 유리가 다시 여자애를 바라보았을 때, 여자애의 몸이 발밑에서부터 점점 새까맣게 물들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는 물드는 게 아니라 어둠에 집어 삼켜지는 것 같았다.
이대로 사라지려는 건가. 유리의 눈동자가 사납게 변했다.
“야, 뭘 혼자 다 끝낸 거 같은 얼굴을 하고 있냐?”
희미하게 남은 빛무리를 돌아보던 여자애가 멈칫하며 다시 유리를 돌아보았다.
“멋대로 기억을 조작해서 사람을 이따위로 우습게 만들어놓고, 너 혼자 후련해지면 다냐?”
성큼성큼 걸어가 여자애의 바로 앞에선 유리가 새까만 눈동자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제 태도가 꽤나 당황스러운 듯 여자애가 찔끔한 표정을 짓는 걸 보니 그나마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뭐? 돌아갈지 말지 걱정하지 말고 얌전히 여기 남으라고?”
하, 유리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제 와서 넌 김유리가 아니라 처음부터 유리 황녀였다는 걸 받아들이고 살아라 하면 내가 얼씨구나 좋아할 줄 알았냐? 그동안 내가 혼자 마음 고생한 건? 네가 나랑 언니를 괴롭혀댔던 건? 그래서 내가 죽을 만큼 고민하고 울고 발버둥쳤던 건? 그건 다 어떻게 보상할 건데?”
작게 욕설까지 내뱉은 유리의 눈동자에 어느새 눈물이 고였다.
“차라리 성녀 아리아처럼 아예 진짜를 데리고 오지, 왜 나는 그딴 식으로 만들어냈는데!”
“미안해.”
유리의 외침을 조용히 듣고만 있던 여자애가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린 채 말했다. 정당한 분노를 표출하는 유리를 차마 마주 볼 용기도 없다는 듯 시선을 피한 눈동자가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