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나의 새언니가 되어주세요! (4)
“유리님!”
그때 때마침 레이몬드의 뒤로 클레어가 기사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레이몬드의 뒤를 따라 계단을 급하게 뛰어 올라온 듯 숨을 몰아쉬는 클레어를 발견한 유리가 외쳤다.
“언니! 언니가 대답해줘요! 우리 둘째 오빠랑 결혼하겠다고! 리하르트 아델에게 가지 않겠다고, 여기서 약속해요!”
말을 하다 보니 점점 기분이 이상해졌다. 처음엔 그냥 악에 받쳐 둘을 어떻게든 이어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는데, 지금은 왠지 그런 생각을 하는 자체가 조금 서글퍼졌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둘을 이어주려고 그렇게나 노력했는데도, 결국엔 제자리를 걷고 있었던 걸 이제야 알아챈 기분이었다. 그동안 제가 노력했던 건 다 뭔가 싶어서 문득 서러움이 밀려들었다.
한참 감수성이 예민할 나이 17세. 유리는 감정이 북받쳐 왈칵 솟아나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클레어에게 외쳤다.
“클레어 언니, 부탁이에요!”
클레어뿐만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듣기를 바라며 있는 힘껏 소리쳤다. 뒤에서 클레어가 성녀 아리아와 레이몬드 2황자를 갈라놨다느니 개소리를 하는 성의 사용인들이나, 클레어의 과거를 들먹이고 리하르트 아델과 엮으며 온갖 역겨운 소리를 다 해대는 인간들 모두가 듣기를 바랐다.
“나의!”
신은지의 소설 속에서 클레어 헤더를 알게 되고, 직접 그녀를 마주한 순간부터 줄곧 유리가 바랐던 건 단 하나였다.
“새언니가 되어주세요!”
주세요, 주세요, 주세요.
유리의 우렁찬 외침이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졌다.
“할게요!”
메아리가 끝나기도 전에 클레어의 다급한 외침이 유리의 귓가에 닿았다.
“뭐든 유리님이 원하시는 대로 할게요! 그러니 제발 거기서 내려와 주세요!”
그렇게 말하면 그때처럼 유리가 기뻐하며 내려올 줄 알았던 클레어의 예상과 달리, 유리는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클레어와 레이몬드를 노려보았다. 그간 두 사람을 지켜봐 온 유리는 이제 여기서 쉽게 물러나면 안 된다는 걸 학습했다.
“언니, 그때도 지금이랑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이 대답했잖아요! 근데 아직도 약속 안 지켰죠! 못 믿어요!”
“이, 이번엔 진짜예요! 진짜 뭐든 다 할게요!”
“진짜죠, 이번에도 약속 안 지키면 다음엔 그냥 연못에 바로 뛰어들 거…… 억?”
흥분해선 두 사람을 향해 삿대질까지 해대던 유리의 몸이 한순간 기우뚱했다. 그대로 몸이 창 아래로 떨어질 듯 위험한 찰나에 불쑥 튀어나온 손이 유리의 팔을 잡아챘다.
“내가 이 미친놈, 이거 위험하게 이럴 줄 알았다니까!”
언제 어떻게 숨어서 여기까지 다가온 건지, 아리아가 유리의 손을 붙잡고서 질렸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덕분에 칼만 안 들었지 강도나 다름없는 유리의 공갈 협박 사건이 이대로 무사히 종결되나 싶었다. 레이몬드와 클레어의 얼굴에도 안도의 빛이 스쳤다.
“자, 이제 네가 원하는 대로 됐으니 내려……왁?”
하지만 그것도 잠깐. 콰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가 앉아 있던 창틀과 벽이 부서져 내렸다.
“어?”
“어?”
당황한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유리의 몸이 미끄러지듯 떨어지면서 손을 잡고 있던 아리아 역시 그대로 창밖으로 딸려 나갔다.
“유리님!”
여러 사람의 비명이 난무하는 와중에도, 제 이름을 외치는 클레어의 목소리가 정확히 귓가에 박혀드는 게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이게 사랑의 힘인가. 나 대체 언니를 얼마나 좋아하는 거지.
조금은 맹하고 실없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갑자기 눈앞이 새까매졌다. 의식을 잃은 것도 아닌데 시야가 검게 물들며 몸이 끝없이 아래로 추락하는 느낌이 났다.
그제야 두려움이 일며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허공에서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발버둥 치던 유리의 몸도 곧이어 새까만 어둠 속에 잠식당해 사라졌다.
* * *
아으, 머리야. 머리가 왜 이렇게 아파.
설마 나 거기서 머리부터 떨어진 건가. 진짜 죽은 건 아니겠지.
유리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감싸 쥔 채 천천히 눈을 떴다.
“뭐야?”
눈을 뜨자마자 무심코 나온 말은 그거였다. 뭐야, 이게 다.
사방이 깜깜한 어둠 속이었다. 빛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듯한 공간 속에서 유리는 멍하니 주위를 돌아보았다. 돌아봐도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아오씨, 머리야.”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흠칫하며 돌아보자, 웬 처음 보는 남자가 인상을 팍 찡그린 채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외모도, 옷차림도 전부 낯설고 이상한 남자였다.
저 사람은 또 뭐야. 유리가 잔뜩 경계 어린 시선을 던지는데 남자도 이내 유리를 발견하고 시선을 던져왔다.
“야, 너 이 진짜……!”
남자는 유리를 보자마자 삿대질을 하며 험악한 얼굴을 했다. 자존심 상하게도 순간 쫄아 붙은 유리가 똑같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 뭐, 뭐야!”
“아오, 저거 잘못되든가 말든가 그냥 내버려 두는 건데 괜히 오지랖을 부려서 나까지 이게 뭔 꼴이야. 여긴 또 어디냐. 설마 너랑 같이 죽어서 저승에 온 건 아니겠지.”
남자가 몸을 일으켜 앉으며 신경질적인 어조로 투덜거렸다. 유리는 경계심을 거두지 않은 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남자는 꼭 자신을 잘 아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게다가 목소리는 다르지만 저 말투는 왠지 꼭…….
“설마 성녀 아리아?”
“그럼 내가 지금 뭐 헤더 영애로 보이냐?”
“진짜 성녀 아리아라고? 꼴이 왜 그래?”
“꼴이라니, 말본새하고는. 내 꼴이 어때서…… 엥?”
유리의 말에 남자가 시선을 내려 제 몸을 보더니 펄쩍 뛰며 놀랐다.
“뭐야, 이거 내 옷…… 내 몸이잖아! 뭔데?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남자는 경악과 환희가 뒤섞인 얼굴로 제 몸 여기저기를 더듬으며 확인하더니 다시 유리를 휙 돌아보았다.
“야, 이거 진짜 어떻게 된 거야? 나 원래대로 돌아온 거야?”
유리는 아직도 눈앞의 남자가 성녀 아리아라는 걸 믿지 못해 경계하는데, 남자는 태연히 유리를 향해 다가오며 물었다.
“그런데 넌 왜 유리 황녀 그대로야?”
남자의 말에 유리는 고장 난 로봇처럼 삐걱거리며 고개를 내려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눈처럼 새하얀 유리 황녀의 손과 그녀가 평소 주로 입는 화려한 드레스가 보였다. 유리 황녀의 몸이었다. 지금 김유리가 빙의되어있는.
스스로가 성녀 아리아라고 주장하는 눈앞의 남자는 원래의 제 몸으로 돌아왔다고 하는데. 자신은 그대로였다.
유리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제 손과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원래 내 몸이 뭐지……? 난 어떻게 생겼었고, 어떤 옷을 입고 있었지? 김유리는…… 나는 누구였지?
신은지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었을 때처럼 아무것도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리고 여긴 대체 어디야? 진짜 저승이고 이런 거 아니야? 우리 아까 거기서 떨어진 거 맞지?”
말도 없이 멍하니 서 있기만 하는 유리의 어깨를 재현이 붙잡고 흔들었다. 그에 겨우 정신이 든 유리가 재현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두 사람이 선 방향의 끝에 눈부신 빛이 파앗! 하고 퍼져 나왔다. 깜짝 놀란 두 사람이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주춤했다.
「119 언제 불렀어? 왜 이렇게 안 와?」
「학생! 괜찮아? 정신 차려, 학생!」
「어어, 저기 119 온다!」
빛 너머로 웅성거리는 사람들 목소리와 함께 희미한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그리고 재현의 눈에 들어온 건 아스팔트 도로 위에 아무렇게나 쓰러져있는 두 사람이었다. 한쪽은 재현 자신이었고, 다른 한쪽은 신은지와 같은 학교의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었다.
재현은 놀란 눈으로 빛이 보여주는 장면을 바라보다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저거…… 지금 우리보고 저기로 오라고 말하는 거 같지 않아?”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고, 어떤 표식도 없었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다. 재현은 홀린 듯 손을 들어 빛을 가리키며 유리를 돌아보았다.
“우리, 돌아갈 수 있는 거 아니야?”
흥분과 기대에 찬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빛 너머로는 점점 가까워지는 사이렌 소리가 크게 들려오고 있었다.
“가야 해, 저기로 가야 한다고!”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것처럼 멀뚱히 빛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기만 하는 유리의 귓가로 재현의 외침이 닿았다. 재현은 재촉하듯 유리의 팔을 잡아당기다 돌연 천천히 놓아주었다.
“난 갈 거야.”
그리고 한 발자국 먼저 빛을 향해 걸어가며 유리를 돌아보았다.
“너도 결정해, 기회는 지금밖에 없을지도 몰라. 원래 세계로 돌아갈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유리는 빛으로부터 시선을 떼고서 재현을 바라보았다. 재현은 이미 결심을 굳힌 표정이었다. 저 빛을 따라가서 원래 세계로 돌아가겠다는 확고한 결심이 서려 있었다. 그 시선을 마주한 유리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돌아갈 수 있다. 원래 내가 살던 세계로.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진짜 김유리가 있는 곳으로.
클레어 헤더가, 레이몬드 알렉 카지스가, 알렌 스위티 카지스가, 그리고 유리 크리스틴 카지스를 아는 모두가 없는…… 김유리가 살던 대한민국으로.
그토록 돌아가고 싶었고, 그토록 그리워했던 이들이 있는 현실로 돌아갈 수 있다.
기대조차 않았던 길이 열렸다. 눈앞에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있다. 마치 이제 네 역할은 끝났고, 무대 위의 이야기도 무사히 엔딩을 맞이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돌아가면 된다. 돌아갈 수 있다.
다시 빛의 너머로 시선을 가져간 유리의 입술이 작게 달싹였다.
“나는…….”
* * *
“유리님! 유리님!”
클레어는 정신없이 유리의 이름을 외쳤다. 레이몬드의 품 안에서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는 유리의 모습에 클레어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얼어붙은 채 눈물을 그렁이는 유리 황녀의 시녀들, 알렌의 겁에 질린 울음소리가 더 두려움을 부추겼다.
레이몬드가 겨우 복구되기 시작한 마법진을 다시 망가뜨리는 걸 감수하고, 땅에 부딪치기 직전 마법으로 유리의 몸을 허공에 띄웠다는 건 알고 있다. 그래서 작고 여린 몸 어디에도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하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곧바로 의식을 되찾을 줄 알았던 유리가 벌써 몇 분째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레이몬드 2황자의 품에서 축 늘어진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내가 우물쭈물하지만 않았어도 유리님이 또 이런 일을 벌이지 않았을 텐데. 내가 유리님을 불안하게 만든 거야. 전부 내 탓이야.’
참았던 눈물이 왈칵 터진 클레어가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레이몬드의 눈동자가 그런 클레어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