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나의 새언니가 되어주세요! (3)
“자, 잠깐만요.”
시선을 피하고 싶어도 너무 가깝고, 고개를 숙이고 싶어도 그와 이마가 닿아있는 탓에 그것도 쉽지 않았다. 일단 잠깐 거리를 벌리고 싶었다. 그리고 잠시 참회와 속죄와 변명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내가 끙끙대며 손을 뻗어 그의 몸을 밀어내려 애쓰자, 레이몬드 2황자가 순순히 밀려나는 듯하다 다시 내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난 뭐든지 클레어가 처음이에요.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 것도, 연애도, 전부. 모르는 게 많으니까 클레어가 다 가르쳐줘요.”
빈틈없이 나를 끌어안고, 내 어깨에 얼굴을 기댄 채로 그가 속삭이듯 낮게 말했다.
그의 품에 푹 파묻히듯 안긴 채로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연애도 처음이라는 그의 말에 살짝 의문을 느낀 탓이었다. 그도 그럴 게…….
‘그런 것치고는 너무…… 익숙해 보이셨는데요?’
나는 무심코 그와의 입맞춤을 떠올리며 얼굴을 붉혔다.
평소의 그를 떠올리면 상상도 하기 힘들 정도로 진한 입맞춤이었다. 늘 올곧고 예의바르고 다정한 레이몬드 2황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깊고 야한. 짧은 입맞춤이었지만 그 순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 안쪽이 간질거리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처음이라니.
혹시 누군가를 좋아해 보거나 연애를 해본 건 아니라도, 다른 여성과 입맞춤은 자주 해보셨던 게 아닐까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나도 모르게 레이몬드 2황자가 다른 여성과 입을 맞추는 상상을 해보다 우울해진 나는 그 몰래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나도 그와의 입맞춤이 처음인 건 아니니 그가 다른 여성과 입맞춤을 했다고 기분 나빠할 처지는 아니었다.
그걸 아는데도 자꾸만 상상을 하게 되고, 속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한테 한 것처럼 그녀에게도 이리 다정하게 웃어주고, 안아주고, 입을 맞춰줬을 거라고 생각하니 자꾸만 기분이 가라앉았다.
“좋아하는 사람과의 첫 입맞춤은 머릿속에서 종이 울릴 만큼 좋다고 하던데…….”
레이몬드 2황자가 나를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며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혼자 속상해하고 이름도 모를 여성에게 질투를 느끼고 있던 나는 그 말을 곧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네?” 하고 어리둥절한 시선을 들었다.
“아까는 너무 순식간이었어서 잘 모르겠어요.”
레이몬드 2황자가 금색 눈동자를 길게 휘며 다시 내 뺨을 손으로 살며시 감쌌다. 사람을 홀리는 예쁜 미소로 내 시야를 장악하고서,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런 의미에서 한 번 더 해봐도 돼요?”
그리고 다가온 그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으려는 순간이었다.
“2황자 전하!”
쾅쾅!
무례할 만큼 거칠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와 레이몬드 2황자 둘만의 공간을 와장창 부서트렸다.
나는 깜짝 놀라 문가를 돌아보았고, 그런 나를 따라 표정을 굳힌 레이몬드 2황자도 문가를 시선을 가져갔다.
“큰일 났습니다, 진짜! 빨리 와주십시오! 황녀 전하께서 또……!”
아마도, 유리 황녀의 호위기사로 추정되는 남자의 외침에 나와 레이몬드 2황자가 재빨리 시선을 교환했다.
우리는 설마 하는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유리 황녀에 대한 걱정과 불안으로 물든 나의 눈동자와 또 성가신 일거리를 떠맡았다는 듯 구겨진 레이몬드 2황자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마주쳤다.
* * *
날이 맑았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하고, 차가운 바람도 오히려 시원하니 상쾌한 느낌이었다. 유리는 양손을 허리에 척하니 얹고서 맑은 공기를 후웁 크게 들이켰다.
‘협박하기 딱 좋은 날씨네.’
유리는 그리운 눈을 하고 창 아래로 지나다니는 성의 사용인들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꼭대기 층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썩 나쁘지 않았다. 어쩐지 괜찮은 승리의 예감이 들었다.
한동안 온갖 인성질로 주변에 아무도 다가오지 못하게 한 덕분에 여기까지 올라오는데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았다. 지금도 유리는 저를 찾아 헤매는 기사들의 눈을 피해 혼자 조용히 제 거처의 꼭대기 층에 올라와 있었다.
지난 며칠간 열심히 머리를 굴려 많은 생각들을 해보았다. 그리 좋지도 않은 머리로 고민하고 또 고민해본 결과, 가장 확실하고 효과가 좋은 방법은 역시…….
‘구관이 명관(?). 클래식은 영원하다.’
제일 처음 그랬던 것처럼 똑같이 무식하게 들이받는 게 최고라는 거였다.
유리는 오른쪽 다리부터 들어 창틀에 먼저 걸쳤다. 1년 사이에 키가 꽤 큰 덕분에 전보다 훨씬 수월했다. 오른쪽 다리를 걸친 상태에서 심호흡을 한 번, 왼쪽 다리도 올려 창틀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휘이잉. 다리 아래로 서늘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사실 그때도 그랬지만, 아무래도 좀 무섭긴 무서웠다. 실수로 재수 없게 떨어지면 바라는 바를 이루지도 못한 채 곧바로 신은지와 상봉하러 가게 될지도 모르니까.
유리는 며칠 동안 단순히 협박 방법만 고심한 건 아니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리 좋지도 않은 머리를 굴리고, 많이 떨어지는 공감 능력을 십분 발휘해 생각해보았다. 유리 자신의 입장이 아니라, 클레어의 입장에서 어떤 게 진짜 그녀를 위한 길인지 오랜 시간을 들여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한때는 원작자의 단죄가 두려워 클레어의 운명을 멋대로 좌지우지하는 일에 회의를 느꼈었다. 클레어와 레이몬드를 이어주려는 제 행동이 진정 클레어를 위한 게 아니라 자기만족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제 머리통을 마구잡이로 후려치고 싶은 충동도 느꼈었다. 아무리 노력하고 발버둥 쳤어도 결국 클레어의 죽음을 막지 못했을 때는 온몸을 덮친 무력감에 괴로워했던 기억이 났다.
그때 유리는 분노하고, 울고불고, 혼자 세상의 모든 절망을 끌어안은 양 온갖 난리를 치면서 보이지도 않는 원작자를 향해 빌고 또 빌었었다.
어차피 소설이잖아. 한 번만.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다시 리셋하게 해줘. 처음부터 시작하게 해줘. 헤더 자작가에서 클레어 헤더와 티테이블에 마주 앉았던 순간으로 회귀시켜줘.
억지로 클레어를 누구와 연결시키고 자시고 하는 생각 따위를 할 시간에 클레어와 조금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클레어가 어떤 선택을 하든 존중하고 행복해질 수 있게 도와주고 싶다고. 그러니 클레어를 다시 돌려보내 달라고. 애원했었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란 게 참 얍삽한 구석이 있다.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고 했던가.
막상 클레어가 돌아오고, 어라? 이거 이제 보니 원작자 놈이 진짜 우리 중 누구를 해치울 마음이 없는 것 같은데? 싶으니, 마음이 또 슬며시 바뀐다.
게다가 지금 자신은 질풍노도의 17세. 아니, 여기서 1년을 보냈으니 18세라고 봐야 하려나. 어쨌든 과거 사춘기의 정점을 찍는다는 15세는 지났으나, 언제 어디서 들이닥칠지 모르는 게 또 사춘기라는 녀석이 아니겠는가. 오른손에 흑염룡이 깃들 정도는 아니라도 시간마다 기분이나 계획이 수시로 바뀌는 게 사춘기의 매력(?)이 아니겠는가 이 말이다.
사춘기 청소년의 마인드로 유리는 클레어의 입장을 이해해보려 애썼고, 그녀를 위한 게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았으며, 결론을 내렸다.
‘그래도 저 똥차 새끼는 아니지. 똥차 새끼가 울고 짜고 한다고 벤츠되는 거 아니잖아. 왜 멀쩡한 벤츠 놔두고 덜덜거리는 소달구지를 타려는 건데.’
아무리 그래도 리하르트 아델은 아니야. 진짜 아니라고.
지금이야 흔들릴 수도 있겠지. 워낙 오랫동안 짝사랑했던 상대고, 당장은 그때의 그 애틋함이 남아 마음이 흔들릴 수도 있겠지. 겉은 여전히 번지르르하니 제법 괜찮아 보이기도 하고, 이 여자 저 여자 만나고 다닌 바람둥이가 정착해 저만 바라본다는 설정도 살짝 혹하긴 할 테지. 그러나.
그래 봤자 똥차는 똥차였다.
그리고 18세의 유리는 무서울 게 없는 사춘기 청소년이었다.
유리는 샌드위치를 싸들고 다니며 클레어를 말리는 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유리는 창틀을 붙든 손에 힘을 주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인간계에 강림한 마왕인 양 「우매한 인간들아, 보거라!」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은 잠시 접어두었다.
“잠깐, 여기 주목!”
배에 힘을 딱 주고 우렁차게 아래를 향해 외치자, 바쁘게 주변을 돌아다니던 성의 사용인들이 놀란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들 위를 볼 생각은 않고 제 시야가 닿는 위치에서만 두리번거리는 탓에 유리가 있는 곳을 쉽게 발견하지 못했다.
“여기! 여기라고! 고개 들어서 위를 봐, 이 사람들아!”
유리는 그제야 저를 발견하고 웅성거리기 시작한 사람들에게 재촉하듯 외쳤다.
“아무나 가서 클레어 언니랑 우리 둘째 오빠 좀 불러와!”
유리가 불러오라고 한 건 분명 클레어 헤더와 레이몬드 알렉 카지스였다. 그런데 잠시 후에 우르르 몰려온 건 주인공들보다 곁다리 조연들이 먼저였다.
“황녀 전하!”
시녀장을 필두로 한 제 거처의 시녀들이 제일 먼저 뛰어와 비명을 질러댔다. 소란을 듣고 달려온 알렌까지 “누니이이이이임!”을 외쳐대며 으앙 울음을 터뜨렸다.
“유리 너 이 자식!”
오늘은 그때보다 더 빨리 왔군.
유리는 레이몬드의 목소리를 듣고 긴장했다가 살짝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저 창 아래의 다른 사람들과 달리 레이몬드의 목소리는 창 아래가 아닌 등 뒤에서 들려온 탓이었다.
어?
예상과 조금 다른 상황에 당황한 유리가 슬쩍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잔뜩 화가 난 듯 차갑게 얼굴을 굳힌 레이몬드가 보였다.
유리는 생각과 조금 다른 전개에 당황했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 여유로운 척 턱을 치켜들고 레이몬드를 바라보았다.
“당장 안 내려와?”
“거기서 한 발자국만 더 오면 뛰어내린다, 진짜!”
성큼 이쪽을 향해 다가오려던 레이몬드의 발이 멈췄다. 생각 이상으로 화가 난 듯한 둘째 오빠가 무섭긴 했지만 유리는 애써 태연한 얼굴로 딜을 걸었다.
“언니랑 오빠랑 둘이 결혼 안 하겠다고 해도 뛰어내린다! 빨리 둘이 결혼하겠다고 말해! 아니면 나 진짜 여기서 뛰어내릴 거야!”
이렇게 레이몬드가 지척까지 다가와 있는데도 유리가 강짜를 부릴 수 있는 이유가 있었다. 다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 부서진 황성 내부의 마법 무력화 마법진을 1/5정도 복구시킨 걸로 알고 있다. 그것도 마탑 소속의 마법사들을 갈고 갈아서 겨우 여기까지 복구했다는 사실도. 여기서 레이몬드가 또 마법을 써서 자기를 구해내려고 하면 지금까지의 노력과 고생이 전부 헛수고로 돌아가는 거였다.
그렇지 않아도 본인 탓에 마법사들이 반쯤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아는 상황에서 레이몬드가 쉽게 마법을 쓸 리가 없다. 그래서 유리는 겁도 없이 대륙에서 가장 위대한 마법사를 상대로 배짱을 부릴 수 있었다.
“너 진짜 그만 안 해? 이딴 협박이 언제까지 통할 줄 알아!”
예상대로 레이몬드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버럭 화만 냈다. 저쪽은 아무래도 좀 쉽지 않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