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나의 새언니가 되어주세요! (2)
‘빨리, 더 빨리.’
레이몬드 2황자에게 가고 싶었다.
리하르트 아델에 대한 마음을 한 조각도 남기지 않고 홀가분해진 지금, 그에게 내 마음을 한 번 더 확실히 전하고 싶었다. 그가 더는 불안해하지 않게, 안심할 수 있게. 레이몬드 알렉 카지스만을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빠르게 달리는 마차가 거북이보다 더 느리게 느껴졌다. 분명 황성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을 터인데 아무리 달려도 먼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아델 공작저는 수도에서 가장 황성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기에 거리는 마차로 2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그런데도 나는 그 잠깐의 시간을 견디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
그 사이에 레이몬드 2황자의 마음이 변할 리도 없는데. 고작 20분 정도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데. 그런데도 초조하고 불안했다.
계속 재촉하는 나로 인해 20분을 다 채우기도 전에 마차가 황성에 도착했다. 마차가 멈춰서자마자 나는 뛰어내리듯 마차에서 내려 달리기 시작했다.
“어? 어어!”
당황한 기사들이 허둥지둥 말에서 뛰어내려 나를 뒤쫓는 소리가 들렸다.
중앙정원을 가로질러 유리 황녀의 거처로 쉴새 없이 내달렸다. 중간에 긴 드레스자락을 밟고 발이 엉키면서 한번 우당탕 넘어졌다. 금세 나를 따라잡은 기사들이 으악! 비명을 지르며 내 주위로 몰려들었다. 나는 기사들이 내민 손을 보지도 않고 스스로 비틀거리며 일어나 다시 내달렸다.
달리는 내내 흙바닥에 찧은 무릎이 아프고 쓸린 피부가 따끔거렸다. 구두는 어디 갔는지 흙바닥을 내딛는 발도 아팠다. 아마 넘어지면서 옷이나 머리도 엉망이 되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런 걸 전부 신경 쓸 새도 없이 나는 레이몬드 2황자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숨이 차올라 계단을 힘겹게 올랐다. 그리고 겨우 유리 황녀가 내게 내어준 방 앞에 서서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레이몬드 2황자가 있었다.
없을지도 모른다고, 바쁜 사람이니 이미 마법진을 고치러 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있었다.
이곳을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창을 통해 길게 들어온 햇볕 아래 반짝반짝 빛이 나는 듯한 모습으로.
우당탕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기사들과 함께 방으로 돌아온 나를, 레이몬드 2황자가 놀란 눈으로 응시해왔다. 무심코 내 이름을 부르려는 듯 입술을 뗐던 그가 표정을 굳혔다.
“클레어, 왜 이런……!”
엉망진창인 내 모습을 보고 그가 화가 난 얼굴로 다가왔다. 나는 그보다 먼저 레이몬드 2황자에게 뛰어갔다. 그리고 그의 상의 옷깃을 잡아채고 힘껏 당겼다. 방심하고 있던 레이몬드 2황자가 내 손길에 따라 몸을 숙이게 됐고, 나는 그대로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눌렀다. 맞닿은 입술을 통해 내 것인지 그의 것인지 모를 두근거림이 전해져 왔다.
나는 그대로 돌이 되어버린 듯한 레이몬드 2황자의 옷깃을 놓아준 후 입술을 뗐다. 완전히 넋이 나간 얼굴로 멍하니 나를 바라보기만 하는 그의 손을 잡아 내 가슴 위에 얹었다.
“더는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제가 좋아하는 건 2황자 전하 한 사람뿐이라고 그 사람에게 말했어요.”
움찔. 붙잡은 그의 손이 떨렸다. 단순히 당황하고 놀란 것뿐인지, 계속 굳어있는 레이몬드 2황자의 표정을 쉽게 읽을 수가 없었다.
“저는 2황자 전하를 좋아해요. 지금 이토록 가슴이 뛰는 것도, 제가 먼저 이, 입을 맞춘 사람도 전부 2황자 전하뿐이에요.”
어떻게 해야 이 마음을 다 전할 수 있을까, 초조하게 말을 잇던 나는 얼핏 레이몬드 황자의 시선이 내 등 뒤로 가닿는 걸 보았다.
“앞으로도 평생 2황자 전하 외에 누구도 사랑하게 되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러니 이제……읍!”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쾅! 등 뒤로 급하게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내가 말을 채 다 마치기도 전에 다가온 레이몬드 2황자의 입술이 내 입술을 집어삼킬 듯 부딪쳐왔다.
어느샌가 그의 팔이 내 허리를 감싼 채 깊이, 더 깊이 입을 맞춰왔다. 그의 안에서 내내 억눌려있던 감정들이 폭발하듯 내 안으로 전해져오는 것만 같았다.
놀란 눈을 깜빡이며 멍하니 레이몬드 2황자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가 천천히 입술을 떼며 눈을 떴다. 아름다움을 넘어 신비롭기까지한 금색 눈동자가 속이 다 비칠 만큼 가까웠다.
심장이 콩콩 뛰는 소리가 너무 커서 레이몬드 2황자에게 들릴까 걱정되고 부끄러웠다.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하고 나도 모르게 시선을 내리자, 긴 손가락이 내 턱 끝에 닿았다. 조심스럽지만 강압적인 손길이 내 얼굴을 들어 그와 시선을 마주하게 만들었다.
다시 근사한 얼굴이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조금 전에 내가 먼저 레이몬드 2황자에게 입을 맞췄던 용기는 어디로 갔는지, 나는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며 시선을 피하려 용을 썼다. 뺨은 화르륵 달아올라 지금쯤이면 새빨간 사과처럼 빨개졌을 게 틀림없었다.
“여기서 기다리는 내내…….”
서로의 이마가 먼저 닿고, 코끝이 스치듯 닿았다.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속삭이듯 말을 이으며 내리뜬 금색 눈동자가 느리게 다시 시선을 마주해왔다.
“그럼 다시 빼앗아 와서라도 내 곁에 두겠다고 막 다짐한 참이었어요.”
서늘하게 가라앉은, 그래서 꼭 다른 사람을 보는 듯한 눈동자였다. 나는 꼼짝도 못 한 채 그 눈동자에 사로잡혔다.
“클레어가 행복하기만 하면 내가 불행해지는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마차를 불러 달라며 내게 등을 보이고 가는 뒷모습을 보니 안 되겠다 싶었거든요.”
어느새 내 턱 끝에 닿아있던 손가락은 치워지고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조금 전처럼 고개를 숙이거나 시선을 피하지 못했다.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레이몬드 2황자의 눈동자에 시선을 빼앗긴 채 홀린 듯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 남자에게 잠시 보내줬던 건 그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어요. 다녀오겠다고 했으니까, 내게 다시 이별을 고하러 오든 뭘 하든 내게 다시 돌아올 테니까. 다시 돌아온 즉시 붙잡아서 내 곁에 억지로라도 둬야지, 아무도 못 보게 가둬둬야지.”
쉬이 감정을 내비치지 않고 무표정하게 내 눈을 들여다보던 눈동자가 서늘한 빛을 띠었다.
“거짓말이라도 좋아. 내내 울기만 해도 좋아. 우는 그대를 안아주고, 달래주고, 평생 그렇게 살아도 좋다고, 이제 막 다짐하고 있었어요.”
내게는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표정과 눈빛이 섬뜩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무섭고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내가 사랑하고 있는 이가 내게 보이는 독점욕에 가슴이 설렜다. 아름다운 금색 눈동자 안에 오롯이 나만이 비치는 있다는 사실에, 나를 향한 열망으로 물든 눈동자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런데 또 진짜 우는 걸 보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서. 그 남자에게 돌아가게 해달라고 내게 매달려서 울면 나도 같이 울고 싶을 것 같아서. 그땐 어떻게 내 마음을 다잡아야 할까 그걸 고민하고 있었어요.”
무표정하던 얼굴이 흐릿하게 웃었다. 멀어졌던 손이 다시 다가와 내 뺨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소중한 걸 만지듯 내 눈가를 천천히 쓸었다. 마치 울고 있는 나를 달래고 눈물을 닦아주는 연습이라도 하는 것처럼.
“거짓말이었다고 해도 날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전부 포기하고 무너져버렸던 마음을 클레어가 다시 끌어냈으니까. 이제 평생 날 책임져야 해요.”
“거짓말이 아니에요.”
그가 나직이 이어가는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내가 긴장한 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낯설고 무섭지만 가슴 떨리게 근사한 금색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했다.
“저는 2황자 전하를 좋아해요. 설령 언젠가 전하께서 제게 질린다 해도 제 마음은 변하지 않을 거예요.”
“예전에도 비슷한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요.”
레이몬드 2황자가 담담하게 내뱉은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가, 다음 순간 말문이 막혔다.
내가 언제 그에게 이런 말을 했던가, 기억을 되짚기 시작하자마자 떠오른 기억이 있는 탓이었다. 레이몬드 2황자가 리하르트 아델에 대해 물었던 날, 한심하게도 눈물을 쏟으며 그 사람 외에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던 과거의 내가 떠올랐다.
당황한 나는 곧바로 시선을 피하며 허둥댔다.
“그, 그때는 그러니까 그게…….”
갑자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내가 좋아하는 건 너뿐이라며 상대의 마음을 가지고 노는 바람둥이가 된 기분이었다. 쉽게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고, 거짓말로 상대를 농락하는.
이게 아닌데. 왜,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정말인데. 이제 정말 좋아하는 사람은 레이몬드 2황자 뿐이고, 앞으로도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될 일은 없을 텐데.
과거에 내가 했던 말이 내 발목을 잡았다. 변명의 여지도 없이.
“괜찮아요.”
허둥대는 내가 우스웠던지, 레이몬드 2황자가 짧게 웃었다. 그 미소에 그나마 평소의 다정한 그로 돌아온 것 같아 조금 안심됐다.
“이제 클레어가 나를 꼴도 보기 싫을 만큼 미워해도 보내주지 않을 거니까. 달리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도, 그 예쁜 얼굴로 울며 애원해도.”
하지만 레이몬드 2황자가 웃음을 멈추자마자 예의 그 서늘한 분위기가 금세 다시 돌아왔다. 나는 내가 바뀐 그의 분위기로 인해 움츠러들었다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애써 씩씩한 척 대답했다.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오히려 전하께서 저한테 질려버리시는 게 빠를 걸요. 솔직히 지금도 왜 전하께서 저를 좋아해 주시는 건지…… 저는 이해가 잘 안 되기도 하고요.”
“내가 왜 클레어를 좋아하는지 이유를 말하라면 얼마든지 말해줄 수 있는데요.”
“아뇨, 저. 부디…… 참아주세요.”
그대로 두면 그가 정말 손가락을 접어가며 나를 좋아하는 이유를 줄줄줄 늘어놓을 것 같아 나는 괴로운 얼굴로 답했다.
“그리고 클레어에게 질리다니, 나야말로 그럴 일은 없을 걸요. 난 클레어와 달리 누군가를 이렇게 강하게 원해본 적이 없으니까. 클레어 외에는 누구도.”
또다시 말문이 턱 막혔다. 레이몬드 2황자는 딱히 내가 당황하고 괴로워하는 걸 보고 싶어서 말한 건 아닌 듯한데, 나는 내 과거를 지적하는 듯한 그의 발언이 이어질 때마다 그저 쥐구멍에 숨고만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