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클레어 헤더의 해피엔딩을 위하여 (21)
* * *
“공작 각하.”
익숙한 인기척이 느껴진다 싶더니 집사 할아범의 목소리가 정신을 깨웠다.
잔디 위에 아무렇게나 누워 내리쬐는 햇볕 아래 낮잠을 자고 있던 리하르트는 천천히 눈을 떴다. 얼굴 위에 엎어두었던 책을 끌어 내리며 시선을 가져가자, 집사 할아범이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그 말에 리하르트는 노골적으로 성가신 얼굴을 했다. 손님이 누구인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보나 마나 또 잔소리나 실컷 늘어놓으려 윌리엄이나 제이드 녀석이 찾아왔을 게 틀림없었다. 리하르트는 집사를 향해 알겠다고 손짓한 후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오랜만에 공작저에 틀어박혀 푹 쉬고 있자니 벌써 몸 여기저기가 굳는 느낌이었다. 리하르트는 적당히 기지개를 켠 후, 책을 그 자리에 그대로 둔 채 걸음을 옮겼다. 성가신 손님을 적당히 상대하고 쫓아낸 후 다시 이 자리로 돌아와 늘어져 있을 요량이었다. 어차피 당분간은 딱히 할 일도 없으니 휴가인 셈 치고 조용히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리하르트는 주먹 쥔 손을 입가에 댄 채 길게 하품을 했다. 그동안은 줄곧 불면증으로 고생을 했는데, 요즘은 자도 자도 잠이 쏟아져서 오히려 곤란한 참이었다. 마치 그동안 못 잤던 잠을 몰아서 자기라도 하듯이.
햇볕이 따뜻하긴 하지만 그래도 날이 제법 추웠다. 그런데 둘 중 누구인지는 몰라도 저택 안이 아닌 공작저 입구 쪽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집사의 안내대로 걸어가던 리하르트는 부른 적도 없는 방문자를 향해 못마땅한 시선을 던졌다.
그가 온 것을 확인한 듯 방문자가 마차의 문을 열고 내렸다. 황실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도, 그 마차에서 내리는 이도 너무나 의외인 존재라 리하르트의 눈동자가 커졌다.
무심코 걸음을 멈춘 리하르트를 향해 클레어가 허리를 깊이 숙여 보였다. 리하르트는 더 다가가지도 못하고 멈춰선 채 클레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담담한 얼굴을 하고서 저를 마주해오는 올곧은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이미 멀어진 과거의 기억들이 떠올라 기분이 묘했다.
처음 그녀를 이곳에 데려왔을 때 겁먹은 소동물처럼 잔뜩 위축되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모습이 기억났다. 아주 조금, 귀엽다는 생각을 했었다. 언젠가 제가 이 저택의 안주인이 될 수도 있다는 기대와 욕심으로 번들거리던 눈동자들과는 달랐다. 그래서 다른 이들과 달리 그녀를 더 오래 곁에 두었고, 그녀의 곁에서 더 편안한 기분을 느꼈던 기억이 났다.
어쩌면 그때부터 조금씩 자기도 모르게 마음을 쌓아나갔던 건지도 몰랐다. 사랑에 가까운 감정이라는 걸 몰랐을 뿐, 제 안에서는 이미 조금씩 쌓여가고 있었던 것이다.
왜 그땐 몰랐던 걸까. 자신은 어째서 성녀 아리아에게 끌렸던 걸까. 성녀 아리아를 만난 순간부터 이상할 정도로 클레어 헤더의 존재가 귀찮고 버겁게 느껴졌었다. 오로지 순수하게 저만 바라보는 눈동자가 귀찮았고, 제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울고 웃는 마음이 무겁고 불편했다.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을 뿐. 분명 성녀 아리아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 모든 게 사랑스럽다고 느꼈던 감정은 남아 있었는데도.
‘이별을 고한 것도 여기서였지.’
쓸모없는 물건 취급하며 더는 네가 필요 없다, 클레어를 내친 장소도 이 자리에서였다. 저택 안으로 들이지도 않고 입구에 세워둔 채 이별을 통보했다. 잔인하고 이기적인 처사였다. 세상이 무너진 듯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고도 일말의 동정이나 연민도 없이 냉정히 등을 돌렸었다.
리하르트는 저를 기다리듯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클레어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두어 걸음 정도를 남기고 멈춰 서자, 이미 결심을 굳힌 연갈색의 눈동자가 보였다. 제 마음을 전할 때 이미 클레어가 어떤 대답을 돌려줄지는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막상 이렇게 제 마음을 거절하러 온 모습을 보니 저 멀리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차라리 그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아 주었으면 싶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확실히 제 마음을 내치고 돌아서 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둘 사이를 스치고 갔다. 가늘게 떨리는 클레어의 몸을 본 리하르트의 미간이 좁아졌다.
저러다 또 감기 걸리겠군. 계절이 바뀔 때마다 앓던 클레어를 기억하고 있는 리하르트는 그녀를 저택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일단 응접실로 가서 대화하자고 리하르트가 말을 꺼내려는 찰나였다.
“저는 2황자 전하를 좋아해요.”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저를 내려다보며 흔들리던 눈동자가 아니었다. 어느샌가 제 마음을 확인하고 결론을 내린 듯했다. 한 점 흔들림도 없이 단단해진 눈동자가 리하르트를 향해 말했다.
“앞으로도 이 마음은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 확신해요. 당신도, 다른 누구도 이제 내 가슴에 들어올 일은 없을 거예요.”
몇 번이고 연습해 미리 준비해온 말을 단숨에 내뱉은 클레어의 표정이 살짝 흐려졌다. 차분하게 말을 전하고 싶었는데, 저도 모르게 감정이 북받쳐 올라 목이 메고 눈가가 뜨거워졌다.
“하지만 이 마음과는 별개로, 당신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겠죠. 그때 날 모른척하지 않아 줘서 고마워요.”
이제는 아득하게 느껴지는 과거의 기억들이 하나둘 떠올라 그때의 애틋하고 괴로웠던 감정들까지 다시 되새기게 됐다.
“한때는 당신을 사랑했고, 한때는 당신을 원망도 했지만.”
잠깐 시선을 내린 순간 눈가에 맺혀있던 눈물이 기어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지금은 그저…… 당신이 행복하기를 바라요.”
클레어는 미안했다는 말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당신을 사랑했던 감정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감정도 잘못한 게 아니니까.
“넌 내가 예전엔 너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조용히 클레어의 말을 듣고만 있던 리하르트가 느리게 입술을 뗐다.
“아니, 사실 나도 1년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었지만.”
그는 클레어의 뺨을 타고 흐른 눈물에 시선을 둔 채로 흐릿하게 미소 지었다.
“자각하지 못했던 것뿐, 널 처음 만난 순간부터 줄곧 널 사랑하고 있었던 것 같아. 그때 널 구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어.”
예쁜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긴 속눈썹이 수줍게 내려앉으며 미소 지을 땐 이따금 심장이 꽉 조이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연갈색의 눈동자가 세상의 전부인 양 저를 바라볼 때면 참지 못하고 손을 대곤 했다. 억지를 부려도 싫은 기색도 없이 제 품에 안겨오는 가냘픈 몸을 아무리 탐해도 갈증이 나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 감정을, 사랑이라 깨닫지 못한 스스로가 있었다.
“내가 그걸 조금 더 빨리 깨달았다면 이렇게 널 놓치지 않아도 됐을까. 그랬다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됐을까.”
클레어의 눈물에 전염된 듯 리하르트 자신도 목이 메는 느낌이었다. 잠시 숨을 고르려 말을 멈췄던 그가 다시 클레어와 시선을 마주했다.
“아마 난 평생 과거의 기억에 매달린 채 후회하겠지. 네게 이별을 고했던 날을,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착각하며 등을 돌렸던 순간을. 평생.”
손을 뻗으면 너를 이 품에 안을 수 있는데, 그럴 수 없는 지금처럼. 평생을 목이 타는 갈증과 채워지지 않는 허기 속에서 살아가게 되겠지. 그래도 나는.
“네가 행복하기를 바라.”
내가 잔인하게 네게 이별을 고했던 이곳에서,
“웃어줘.”
네 행복을 빌 수 있음에 다행이라 여겼다.
“언제 어디에 있든 웃고 있어. 레이몬드 알렉 카지스의 곁에서 행복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참았던 눈물을 흘리는 모습마저도 사랑스러운 너에게,
“아니면 다시 빼앗아 오고 싶어질 테니까.”
마지막 인사를 전할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워.
리하르트는 어느새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 울음을 터뜨린 클레어가 진정할 수 있을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눈물을 닦아주지도, 품에 안고 등을 토닥여주지도 않았다.
한참 만에야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듯 클레어가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조금 민망한 듯 시선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는 그녀에게 리하르트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한 번만 안아보면 안 되겠지? 들키면 2황자가 날 가만두지 않을 것 같고.”
눈물로 얼룩진 눈가를 휘며 클레어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네, 안 돼요.”
“그럼 대신 이름으로 불러줄래? 마지막으로 한 번만.”
그가 가볍지만 깊은 감정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클레어가 잠시 놀란 눈으로 리하르트를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잘 지내요, 리하르트.”
사랑했던 사람에게, 진정한 이별을 고하는 인사였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르게 된 사랑했던 이의 이름은 생각했던 것만큼 그리 어렵지 않았다.
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서 있는 그를 올려다볼 때는 몰랐던 감정들이 솟아났다가 천천히 사그라졌다. 가슴속에 맺혀있던 아픈 기억들도, 행복했던 기억들도, 전부 눈 녹듯이 사라지고 후련해지는 느낌이었다. 비슷한 감정을 그 또한 느낀 듯 한참 동안 말없이 클레어를 바라보기만 했다.
리하르트는 지금의 순간들을, 눈앞에 있는 클레어를 바라보고 또 보았다. 잊지 않고 제 안에 남기기 위해서.
전하고 싶은 말은 수도 없이 남았지만 가슴 속으로 삼켜버렸다. 클레어가 그 어떤 불편한 감정도 남기지 않고 마음 편히 레이몬드 2황자에게 훌훌 날아가길 바라니까.
어딘가 후련해진 듯한 미소와 함께 리하르트가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안녕, 클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