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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클레어 헤더의 해피엔딩을 위하여 (20) (129/152)

06. 클레어 헤더의 해피엔딩을 위하여 (20)

성녀 아리아는 내가 리하르트 아델에게 고백받았기 때문에 레이몬드 2황자가 불안함에 나를 피하고 있을 거라 말했다. 하지만 아직도 그렇게나 근사하고 대단한 사람이 나 같은 걸 좋아한다는 사실조차 의심스러운 나로서는 그 말을 쉬이 믿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레이몬드 2황자가 이제라도 정신을 차려서 나를 떨쳐내고 싶어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쪽으로 더 생각이 기울 수밖에 없었다.

고민하고 생각해야 할 문제는 많은데 마음은 여유가 없었다.

과거, 나의 전부였던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고백받게 되었다. 그토록 두렵기만 했던 카롤리나 황후로부터 내 실력을 인정받고 레지나 왕립 아카데미의 편입을 제안받았다.

한때는 너무나도 바랐던 일들이 지금 내 손안에 온전히 떨어졌음에도 왠지 나는 전혀 기쁘지가 않았다. 내가 정말 무엇을 바라는 건지도 이제는 알 수 없게 되었다.

달각, 탁.

알렌 4황자의 비숍이 나의 룩을 잡았다. 시작부터 이미 정해진 승패의 게임이었지만, 드디어 알렌 4황자에게 완전히 승기가 기운 순간이었다.

콰앙!

누군가 다급하게 달려오는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거칠게 문을 내리치는 소리가 울렸다. 깜짝 놀란 나와 알렌 4황자가 문가를 돌아보았다. 문 너머로 헉헉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다른 기사들이 딱히 제지하지 않는 걸 봐선 혹시 또 유리 황녀나 리하르트 아델이 찾아온 걸까 생각하던 나는 멈칫했다.

문가로 걸어가려 몸을 일으키자 겁에 질린 표정의 알렌 4황자가 내 손을 잡고 쪼르르 따라왔다. 문 앞에 서서 문고리를 잡으려는 찰나, 그보다 먼저 문이 활짝 열렸다.

열린 문 너머로 시야에 들어온 건 땀으로 범벅된 얼굴의 레이몬드 2황자였다. 초조한 눈동자가 다급히 방 안으로 들어서려다 나를 발견하고는 움직임을 멈췄다.

“클레어?”

마치 여기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라도 본 것처럼 레이몬드 2황자가 내 이름을 불렀다. 가슴이 들썩일 만큼 숨을 가쁘게 몰아쉬면서 넋이 나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그에게 반갑고 그리웠던 감정에 앞서, 꼭 낯선 이를 바라보듯 나를 보는 레이몬드 2황자의 태도에 살짝 위축됐다. 왜 그러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어 알렌 4황자의 손만 꼭 붙잡고 있을 때였다.

“몸은요? 괜찮아요?”

갑자기 정신이 든 듯 내 앞으로 성큼 다가온 레이몬드 2황자가 양손으로 내 팔을 붙잡고서 질문을 쏟아냈다.

“쓰러졌다면서요. 갑자기 왜요? 또 어디가 아픈 거예요? 의원은요?”

“진정하세요, 2황자 전하.”

어디서부터 달려온 건지, 숨을 몰아쉬는 얼굴이 창백했다. 나보다는 그가 더 걱정스러운 상태라 나는 얼른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저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아.”

그제야 정말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내 모습이 눈에 들어온 건지, 레이몬드 2황자의 초조한 눈동자가 빠르게 안정돼가는 게 보였다.

“다행이에요. 너무 놀라서…….”

레이몬드 2황자의 손에 힘이 풀리며 붙잡고 있던 내 팔을 스르륵 놓아주었다.

레이몬드 2황자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던 나와 그의 시선이 마주쳤다. 조금 전까지 내 얼굴이며 몸 여기저기를 살피듯 바라볼 땐 아무렇지 않더니,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가 내 시선을 피했다.

“미안해요, 잠깐 들린 거라 다시 가봐야겠어요.”

그러고는 정말 그대로 가버릴 것처럼 몸을 돌렸다. 놀란 나는 알렌 4황자의 손을 놓고 다급히 그의 팔을 잡아챘다. 혹시나 놓칠까 양손으로 그의 팔을 힘주어 붙잡았다.

손을 붙잡는 순간 레이몬드 2황자의 몸이 눈에 띄게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혹시 손을 뿌리쳐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는 얼어붙은 것처럼 멈춰선 채 가만히 있었다. 그래도 나를 돌아봐 주진 않는 모습에 서운함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사실 하나도 괜찮지 않아요.”

그제야 다시 나를 돌아봐 주는 눈동자가 나에 대한 걱정과 애정으로 가득한 게 보였다. 불안했던 것과 달리 정말 내가 싫어져서 나를 피하는 건 아닌 것 같아 안도하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서운함은 남아있어서, 나는 아주 약간의 원망의 감정을 담아 그에게 말했다.

“혹시 이제 저를 보기도 싫으신가요?”

“그런 게 아니……!”

당황한 듯 목소리를 높였던 레이몬드 2황자가 슬프게 일그러졌다.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럼 어째서요?”

낮게 속삭이듯 말하며 다시 내 시선을 피하려는 그의 눈동자를 집요하게 쫓으며 내가 물었다.

“왜 저를 피하고 계신 건가요?”

내게 붙잡힌 손을 밀어내지도 못한 채 금색 눈동자가 괴로운 빛을 띠었다. 가까이 있는 만큼 그의 감정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느껴졌다. 나와 시선을 마주한 채 말을 꺼내려다 망설이고, 다시 눈을 피하며 이를 악무는 모습이 차례대로 시야에 들어왔다.

“무서워서요.”

그 순간 나는 내가 던진 질문을 후회했다.

“그때처럼 클레어가 날 떠나겠다고 할까 봐 무서워서요.”

내 감정만 앞세워 왜 나를 피하느냐고 그에게 원망을 내비친 이기적인 마음이 부끄러웠다. 아직 내 마음조차 확실히 하지 못했으면서 그에게만 답을 강요한 내가 밉고 싫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레이몬드 2황자의 대답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충격으로 굳어버린 나를 알아챈 레이몬드 2황자가 다시 천천히 눈동자를 들었다. 벙어리가 되어 버린 듯 그의 움직임을 따라 시선을 옮기기만 하는 나를 보며 레이몬드 2황자가 힘없이 미소 지었다.

“날 좋아한다고 했던 게 신과의 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말한 것뿐이면? 그날 후원에서 내 손을 밀어냈던 그 마음 그대로 리하르트 아델에게 가고 싶다고 하면?”

내가 그랬던 것처럼 원망을 내비치는 게 아니었다. 내게 대답을 강요하는 것도 아니었다.

“난 이제 그때처럼 그 남자에게 가라고 손을 놔줄 수도 없는데, 날 사랑하지 않는 당신을 내 곁에 억지로 붙들어두고서 슬퍼하는 얼굴을 마주할 용기도 없는데.”

그저 너무 괴로워서, 토해내지 못한 슬픔이 너무 아파서, 내내 참기만 했던 고통을 알아 달라 호소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당신을,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레이몬드 알렉 카지스는 클레어 헤더를 이토록 사랑하고 있노라고 내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레이몬드 2황자의 금색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도 더는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계속 우리의 시간은 그날에 멈춰 서 있는 것만 같았다. 멜린트 영지의 후원에서 내가 그를, 그가 나를,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그날에.

어느새 둘 다 겁쟁이가 되어 그날로부터 단 한 걸음도 걸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꼼짝도 하지 않고 서로를 바라보기만 한지 얼마나 지났을까. 레이몬드 2황자가 자기 팔을 붙든 내 손을 조심스럽게 밀어냈다.

느리지만 분명하게 내 손을 밀어내는 손길에 순간 발밑이 무너지는 듯한 두려움이 일었다. 나는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레이몬드 2황자의 팔을 더 강하게 붙잡았다.

바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언제까지고 이렇게 있을 수 없다는 걸 아는데. 지금 레이몬드 2황자가 가버린다고 영영 만나지 못하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는데.

이대로 이 손을 놔버리면 모든 게 끝나버릴 것만 같아 두려웠다. 이제 정말 내게 질려서, 이 사람이 떠나가 버릴 것만 같았다.

리하르트 아델이 나를 찾아와 내 손을 붙잡았을 때와는 달랐다. 내게 사랑한다 속삭이던 눈동자 앞에서 나는 그저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 눈동자로부터, 나를 붙잡는 손으로부터 달아나고만 싶었다.

황성으로 돌아와 레이몬드 2황자를 만나고, 그의 품에 끌어안겼을 때. 그가 나를 아직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 순간에 느꼈던 가슴이 저리고 아플 정도로 기쁘고 설렜던 감정은 없었다.

또다시 충격을 받은 머릿속이 멍해졌다. 나는 이제야 진짜 내 마음과 마주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미 답이 나와 있던 문제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잘못된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눈을 한 번 느리게 감았다 뜬 나는 붙잡고 있던 레이몬드 2황자의 팔을 놓아주었다.

마지막까지 아무런 말이 없는 내게 레이몬드 2황자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씁쓸한 미소를 흘렸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레이몬드 2황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주실 수 있을까요, 전하.”

기다려 달라니? 뜬금없는 말에 의아한 빛을 띤 레이몬드 2황자의 눈동자가 그렇게 묻는 듯했다.

나는 설명을 덧붙이지도 않고서 그대로 그를 지나쳐 문밖에 시립해있던 기사들에게 달려갔다.

“마차, 마차를 준비해주세요!”

그리고 그 중 제일 얼굴이 낯익은 이를 붙잡고 외쳤다. 기억하기로 아마 예전에 내가 황성을 나갈 때 헤더 자작저까지 따라왔던 두 명의 기사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불행히도 내게 붙잡힌 기사는 경악한 얼굴을 하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 안 됩니다! 황성 밖으로 나가시는 건 절대로!”

“아델 공작저로 가야 해요!”

나는 기사의 비명과 같은 외침을 무시한 채 내 의사만을 전했다.

며칠 전 한 번 더 나를 찾아왔던 카롤리나 황후가 말했었다. 리하르트 아델이 유리 황녀의 거처를 허락도 없이 들어온 일로 근신 당해 공작저에서 한 걸음도 못 나오게 됐다고.

그 말대로라면 분명 지금도 아델 공작저 안에 머무르고 있을 터. 그 사람을 만나려면 그곳으로 가야 했다.

당당하게 아델 공작저로 가겠다는 나의 외침에 복도에 늘어서 있던 기사들이 내 등 뒤로 시선을 가져가며 눈치를 살폈다. 기사들이 전부 레이몬드 2황자의 눈치만 살피며 내 말에는 대답도 해주지 않자 나는 초조하게 발을 굴렀다.

기사들이 안 된다면 성의 다른 사용인들에게라도 부탁해볼 생각이었다. 혹시 주변을 지나가는 시종이 없는지 두리번거리는데, 등 뒤에서 레이몬드 2황자가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다가오던 발소리가 내 바로 등 뒤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원하는 대로 하게 해줘. 뭐든지.”

쉬이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무덤덤한 목소리가 기사들을 향해 명령했다.

나를 대할 때와는 다른 분위기의 레이몬드 2황자가 조금 낯설고 무서웠다.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질 않는 느낌이었다.

나는 머뭇거리는 시선을 돌려 레이몬드 2황자를 돌아보았다. 내 왼쪽 손목에 있는 금색 팔찌에 닿아있던 그의 눈동자가 느리게 올라와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래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여전히 슬픔이 묻어나는 미소와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다녀와요.”

우리가 한 걸음도 걸어 나오지 못한 채 머무르고 있던, 후원에서의 그날처럼 더없이 다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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