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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클레어 헤더의 해피엔딩을 위하여 (19) (128/152)

06. 클레어 헤더의 해피엔딩을 위하여 (19)

“아아, 그거라면.”

예상대로 성녀 아리아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지만, 레스티아 경은 단번에 알아듣고 말을 꺼냈다.

“그때 원래 예정대로라면 레지나 왕국의 왕녀가 사절단과 함께 교류차 제국에 올 예정이었습니다. 폐하께서 2황자 전하께 직접 국경에서부터 사절단을 맞이하여 무사히 수도까지 데려오라 명령하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사절단 맞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셨지만 아마 2황자 전하와 왕녀가 자연스럽게 만나게 하기 위한 초석을 까신 거겠죠. 폐하의 의도대로 두 사람이 좋은 관계로 발전했다면 봄이 돌아올 때쯤 약혼이든 결혼이든 뭐든 하지 않으셨을까 싶고요.”

레스티아 경이 별일 아니었다는 어조로 덤덤하게 말을 잇다 성녀 아리아에게 휙 시선을 던졌다.

“그런데 도중에 왕국 측에서 사정이 생겨 사절단은 없던 얘기가 됐고, 기다렸다는 듯 그즈음부터 성녀와 전하께서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는 소문이 황성 내에 퍼졌죠.”

“아! 그거 말한 거였구나.”

멀뚱멀뚱 레스티아 경의 말을 듣고만 있던 성녀 아리아가 그제야 알은 체를 해왔다.

“헤더 영애, 그 얘기라면 걱정 마요. 그거 전부 유리 황녀가 일부러 퍼뜨린 얘기니까.”

성녀 아리아는 뭘 그런 걸 신경 쓰고 있었냐는 듯 웃으며 내 등을 토닥였다. 나는 내심 놀라 움찔거렸으나 그 손길을 피하지는 않았다.

“2황자 전하가 1년 전에 헤더 영애 잘못된 거 알고 엄청 크게 다쳤었잖아요? 약혼녀가 죽은 충격으로 2황자 전하가 그렇게 됐다는 걸 안 황제가 자꾸 2황자 전하 곁에 다른 레이디들을 붙여주려고 하는 거예요. 마침 전 약혼녀에 대한 기억도 잃었겠다 이때다 싶었나 봐요.”

레스티아 경과 마찬가지로 성녀 아리아도 정말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는 식으로 말했다.

“막판에는 이러다 진짜 레지나의 왕녀랑 약혼하게 될지도 모른다 싶었는지, 사절단 얘기가 없어지자마자 유리 황녀가 일부러 저랑 2황자 전하를 엮은 거예요. 그즈음 2황자 전하도 계속 간섭받는 상황에 조금 지쳐 있었던 터라 쉽게 납득해줬고요.”

성녀 아리아가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가며 설명해주는 대로 머릿속에서 상황들이 하나씩 그려졌다.

나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레이몬드 2황자와 그런 그가 답답하고 불안했을 유리 황녀의 모습들이 어렵지 않게 상상이 갔다. 억지로 유리 황녀에게 휘말렸을 성녀 아리아와 레스티아 경의 모습도.

“아마 3황자에게는 연락이 늦게 가서 그 사실을 몰랐던 거겠죠. 이 사람은 알면서도 모른 척한 걸 테고.”

말끝에 성녀 아리아가 눈짓으로 레스티아 경을 가리켰다. 그 시선을 따라 레스티아 경을 돌아보자, 그가 슬쩍 내 시선을 피했다. 레스티아 경이 전혀 반박하지 않는 태도로 봐선 성녀 아리아가 해준 말들을 전부 사실로 봐도 무방할 것 같았다.

“2황자 전하께 달리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다던가 그런 일은 없었으니까 안심해요.”

성녀 아리아가 다정하게 웃으며 다시 내 등을 토닥였다. 처음엔 갑작스러운 친밀한 행동에 조금 놀랐지만 이제는 고마운 마음만 남았다.

나는 머뭇거리던 시선을 들어 성녀 아리아를 바라보았다. 예전처럼 성녀 아리아가 무섭다거나 무작정 피하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성녀 아리아가 지닌 비밀을 일부나마 엿본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는 예전과 달리 진심으로 나를 대해주는 마음이 느껴져서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거기엔 더는 우리 사이에 리하르트 아델이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이유도 있을 터다.

겨우 잊고 있던 남자의 존재가 떠오르자 나는 의식적으로 그 남자가 아닌 레이몬드 2황자에 대해 생각하려 애썼다.

‘그럼 왜 나를 피하는 걸까.’

레이몬드 2황자에게 달리 좋아하는 여성이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가 지금 나를 피하는 이유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역시 2황자 전하가 헤더 영애를 피하는 거 맞군요?”

지금 내가 소리 내서 말했나?

흠칫 놀라 고개를 들자 성녀 아리아가 다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나는 이렇게 속상한데, 아주 재미있는 걸 발견했다는 얼굴로 웃는 성녀 아리아가 조금 원망스러워질 때였다.

“그거 아델 공작 때문에 그런 거 아니에요?”

성녀 아리아가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꺼낸 이름에 나는 물론, 레스티아 경도 꽤 놀란 얼굴로 성녀 아리아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성녀 아리아는 태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 사람에게 고백받았다면서요? 유리 황녀와 다른 기사들이 보는 앞에서 아주 세기의 사랑 고백을 했다던데. 당연히 2황자 전하의 귀에도 그 얘기가 들어갔을 거고.”

성녀 아리아의 말에 나는 생각지도 못한 부분을 찔린 것처럼 얼어붙었다.

그래, 나는 어떻게 그 얘기가 레이몬드 2황자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왜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지. 곁에 유리 황녀도 있었으니 당연히 레이몬드 2황자도 전부 알게 되었을 텐데.

“그런 상황이면 나라도 불안할 거 같은데요. 내 여친이 전 남친한테 다시 시작하자는 말을 들었다고 하면, 게다가 여친 쪽에서는 헤어지고 싶지 않았던 걸 알고 있다면 더더욱.”

한순간 표정이 어두워진 성녀 아리아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혹시 그 사람에게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닐까, 아무래도 불안한 마음이 생기겠죠.”

말을 마친 성녀 아리아의 시선이 조용히 내 얼굴 위로 닿았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넋이 나간 얼굴을 했다.

한심했다. 그동안 바보같이 내 마음에만 무게를 두고,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리하르트 아델을 만났던 일을 전해 들었을 레이몬드 2황자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그리고 지금은 또 어떤 마음으로 나를 피하고 있는 건지. 하나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런데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대놓고 피하는 건 너무하지 않아요? 헤더 영애가 직접 찾아오기까지 했는데.”

이기적인 내 마음이 부끄러워 고개도 들지 못하는 내게 성녀 아리아가 한숨을 푹 내쉬며 투덜거렸다.

“솔직히 엄청 실망인데요, 2황자 전하. 이런 건 남자답지 못하다고요.”

잠깐 무겁게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튀는 느낌이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하며 시선을 들자, 성녀 아리아가 더 과장되게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내 양 어깨에 척하니 손을 얹고서 시선을 마주해왔다. 바로 옆에서 레스티아 경이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노려보는 건 보이지도 않는 듯했다.

“이러다 진짜 그 또라이……가 아니고, 황녀가 뭔가 일낼 것 같아서 무서우니까.”

내가 피하지도 못하게 어깨를 붙든 채로 성녀 아리아가 어딘가 심술이 묻어나는 짓궂은 미소를 흘렸다.

“우리가 먼저 선수를 치죠?”

* * *

어디로 가면 좋을까. 어디로 움직여야 다음 길이 보일까. 쉽게 답이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나는 긴장한 숨을 삼켰다.

달각, 탁.

체스판을 내려다보며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말 하나를 직선으로 두 칸 움직였다. 내가 움직인 흰 말로 알렌 4황자의 검은 말을 잡으려는 찰나였다.

“안 돼요. 지금 이 폰은 앞으로 한 칸만 움직일 수 있어요. 여기 앞에 다른 말이 있으니까.”

내가 움직인 체스 말을 보던 알렌 4황자가 진지한 얼굴로 내 실수를 지적해주었다. 첫 번째 판을 시작한 지 5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세 번째 지적이었다.

나는 부끄러움에 뺨을 붉히며 얼른 폰을 원래 자리로 되돌려놓았다.

체스는 예전에 에젯트 헤더가 억지로 배우게 했던 탓에 적당히 규칙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다른 이와 직접 체스를 둬본 적은 없는 터라 사실 할 줄 안다고 말할 수도 없는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왜 알렌 4황자와 체스를 하고 있느냐고 하면, 낮잠을 실컷 자고 일어난 알렌 4황자가 당연하다는 듯 내 방으로 놀러 왔고, 방안에서 둘이서 같이 할만한 놀이가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 나온 게 체스였기 때문이었다.

이제 겨우 여섯 살이 된 알렌 4황자가 체스를 할 줄 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해서 얼떨결에 같이 하게 됐다.

내 형편없는 실력은 금세 들통났지만, 다행히 알렌 4황자는 지루한 기색 없이 진지하게 체스판을 응시하고 있었다. 커다란 금색 눈동자가 체스판 위의 말들을 차분히 내려다보며 이기기 위한 전술을 짜는 모습이 아무리 봐도 낯설고 신기했다.

평소엔 아기토끼처럼 말랑말랑 귀엽기만한 알렌 4황자였기에 더 차이가 뚜렷하게 느껴졌다.

나는 알렌 4황자의 말대로 폰을 한 칸만 전진하고 내 차례를 마쳤다. 그리고 눈동자를 굴려 시계를 확인하고 창가로 시선을 가져갔다. 유리창 너머로는 어느새 어둠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성녀 아리아와 헤어진 지도 벌써 꽤 시간이 지나 있었다. 성녀 아리아는 자기만 믿으라며 내 등을 떠밀었다.

―이대로 내가 헤더 영애를 데리고 들어가서 2황자 전하를 만나게 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그래서는 왠지 해결이 안 될 것 같거든요.

―저쪽에서 먼저 다가오도록 유인하죠. 절대 피하지 못할 덫을 놓고 기다리는 거예요.

일단 유리 황녀의 거처로 돌아가 있으라는 말을 듣고 난 그에 얌전히 따랐다.

―레스티아 경, 협조 좀 부탁해요. 그러니까 2황자 전하에게 가서 ……말을 하는 거예요. 그리고 ……식으로 슬쩍 말을 흘려주면 더 좋고요.

―웃기지 마십시오. 제가 ……을 할 것 같습니까?

―하는 게 좋을 걸요. 나중에 가서 ……하고 싶지 않으면.

―……이번 한 번만입니다.

돌아선 내 등 뒤로 두 사람이 투닥투닥 언쟁을 벌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미 거리가 꽤 멀어져 있던 탓에 정확히 뭐라고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피하지 못할 덫이라는 게 뭘 말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레스티아 경의 협조가 필요한 일인 모양이었다.

나는 갑자기 격의 없이 친밀하게 다가오는 성녀 아리아가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나를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모습까지 거짓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성녀 아리아의 말대로 유리 황녀의 거처로 돌아와 지금까지 조용히 방 안에서 머물렀다.

‘정말 날 만나러 와줄까?’

알렌 4황자에게 몇 번이나 혼나고도 여전히 게임에 집중하지 못한 채로 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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