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클레어 헤더의 해피엔딩을 위하여 (18)
알렌 4황자가 티테이블에 앉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을 즈음 즐거운 티타임 시간이 끝났다. 호위로 따라온 기사의 도움을 받아 알렌 4황자를 방으로 옮겨 침대에 눕혀 재운 뒤, 나는 다시 혼자 남겨졌다.
유리 황녀가 임시로 내어준 내 방으로 돌아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아마 지금은 바빠서 그런 거겠지.’
침대에 털썩 누워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으니 제일 먼저 떠오른 이는 레이몬드 2황자였다.
레이몬드 2황자가 황성을 감싸고 있던 마법진을 깨뜨리는 바람에 그걸 복구하는데 시간을 들이고 있다는 사실은 첫날 이미 대충 들어서 알고 있다. 그래서 아마 나를 만나러 올 시간도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또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자 생각이 달라졌다. 유리 황녀도 레이몬드 2황자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의도적으로 내 시야에 들어오지 않으려는 것처럼.
4일째가 되던 날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내가 뭔가 잘못한 걸까 걱정도 됐고, 아주 조금 서운하다는 기분도 들었다. 그리고 5일째가 되던 날은 쓸쓸하다거나 서운한 감정보다 그가 보고 싶다는 감정이 더 앞섰다.
그래서 오늘은 내가 직접 찾아가 보기로 큰 결심을 하고 나섰다. 만나서 무슨 말을 할지도 모르는 채로, 무작정 레이몬드 2황자가 보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움직였다.
당연하다는 듯 따라붙는 호위 기사들에게 부탁해 레이몬드 2황자가 있다는 곳으로 찾아갔다.
“죄송하지만 지금 전하께서는 빠져나오실 수가 없습니다. 다음을 기약하시죠.”
마법진이 그려진 건물 안으로는 아무나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하기에 주변을 돌아다니던 다른 마법사에게 대신 전달을 부탁한 거였다. 그리고 돌아온 건 그를 만날 수 없다는 거절의 답변이었다.
레스티아 경이 직접 와서 말을 전해주었다. 아는 얼굴이 보여 안심한 것도 잠시, 레스티아 경이 가져온 단호한 대답에 나는 실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대로 그냥 돌아가야 하는 걸까. 이대로 돌아가면 언제 그를 만날 수 있는 걸까. 시무룩한 얼굴을 하던 나는 우물쭈물하며 레스티아 경을 바라보았다.
“저, 잠시라도 시간을 내주실 수 없는지 여쭤봐 주시면 안 될까요.”
레스티아 경의 눈동자에 의외라는 빛이 떠올랐다. 자기 말에 쉽게 수긍하고 돌아갈 줄 알았던 내가 순순히 물러나지 않자 조금 놀란 듯했다.
“아뇨, 오늘은 안 될 겁니다. 일단 돌아가서 기다리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같았다. 레스티아 경은 레이몬드 2황자에게 돌아가서 물어보지도 않고 곧바로 확신하듯 답했다. 레스티아 경이 혼자 그렇게 판단해서 답하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레이몬드 2황자에게서 그렇게 답변을 받아온 느낌이었다.
평소의 나라면 그걸 눈치챈 시점에서 풀이 죽어선 조용히 돌아섰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5일 동안 홀로 남겨진 채 혼란스러운 감정들에 이리저리 치여왔던 나는 많이 지친 상태였다.
너무 지쳤고, 가슴 속은 여전히 어지럽게 술렁거렸고, 그리고…… 레이몬드 2황자가 보고 싶었다. 결론이 조금 이상했지만 그게 솔직한 마음이었다.
이대로 그를 만나지도 못한 채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알겠어요, 고마워요.”
나는 레스티아 경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 후, 출입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건물의 입구 옆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건물 벽에 기대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벌써 해가 꽤 기울어 있었다. 앞으로 서너 시간만 지나면 완전히 해가 저물 듯했다. 겉옷을 더 두껍게 챙겨입고 오지 않은 게 후회됐다. 해가 지면 지금보다 더 추워질 텐데.
“뭐 하시는 겁니까?”
내 움직임을 눈으로 쫓던 레스티아 경이 어이가 없다는 투로 말을 걸어왔다.
“설마 거기서 기다리시려고요?”
황당함으로 가득한 시선에 찔끔했지만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일이 끝나실 때까지 기다릴게요.”
“아뇨, 안 됩니다. 날도 추운데 거기서 언제까지 기다리시려고요. 옷도 그렇게 얇게 입고 나오셔서는. 어서 따뜻한 방으로 돌아가 쉬세요.”
내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정말 몰랐다는 듯, 답지 않게 당황한 레스티아 경이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때마침 건물 안에서 걸어 나오던 마법사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이쪽으로 와닿았다. 늘 무표정한 레스티아 경이 처음 보는 여자에게 쩔쩔매고 있으니 신기해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나는 마법사들 사이에 혹시 레이몬드 2황자가 있지는 않을까 살펴봤지만 아쉽게도 그는 없었다. 내가 마법사들을 살피는 시선을 눈치챈 레스티아 경이 자기 몸으로 내 시야를 막아섰다.
“이러고 계셔도 소용없습니다. 전하께선 정말 바쁘셔서 시간을 내실 수 없습니다. 얌전히 돌아가서 기다리시죠. 며칠간 막내 황자 전하와 잘 지내시더니 갑자기 왜 이러시는 겁니까.”
“내가 알렌님과 잘 지내는 걸 보고 받고 있었나 봐요. 2황자 전하의 명령인가요?”
내가 담담하게 내뱉은 질문에 레스티아 경이 살짝 허를 찔렸다는 듯 멈칫했다.
머릿속이 차분하게 가라앉으며, 가슴 속의 답답함이 더 깊어졌다. 나는 느리게 시선을 내리깔며 작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제가 잘 지내는 건지 신경은 쓰이지만 잠깐이라도 만나러 오실 시간은 없는 걸까요.”
“아니, 저, 그런 게 아니라. 그, 어쨌든 여기서 이러고 계시지 마시고…….”
“헤더 영애?”
레스티아 경이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어떻게든 말을 수습하려 애쓸 때였다. 귓가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린다 싶어 고개를 드니, 성녀 아리아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마법사들처럼 건물 안에서 걸어 나온 그녀가 호기심 어린 눈을 하고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헤더 영애가 여긴 어쩐 일이에요?”
내가 도리어 묻고 싶은 질문이었다. 성녀 아리아가 여긴 어쩐 일이냐고. 혹시 지금까지 계속 2황자 전하와 같이 있었던 거냐고.
사실 그녀 안에 있는 건 이 세계의 다른 사람이며, 남자라는 걸 알면서도 불쑥 낯선 감정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이곳으로 돌아왔을 때 레이몬드 2황자와 부쩍 친밀해 보였던 그녀의 모습이 새삼 떠올랐다.
혹시 그녀 안에 있는 건 남자라도, 그동안 레이몬드 2황자와 특별한 감정을 주고받았던 건 아닐까. 성녀 아리아는 아니더라도 레이몬드 2황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 아닐까. 둘 다 무척 아름답고 매력적인 사람이니까.
생각이 말도 안 되는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걸 느낀 나는 황급히 머릿속에 제동을 걸었다.
성녀 아리아가 뭐라고 물었더라.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내 대답을 기다리는 그녀의 시선을 어색하게 받아내며 대답했다.
“2황자 전하께서 바쁘다고 하셔서 일이 끝나고 나오실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려고요.”
“예에?”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성녀 아리아가 눈을 크게 떴다. 성녀 아리아는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한쪽 손을 입가에 댄 채 목소리를 낮춰 물어왔다.
“헤더 영애가 왔다는데도 2황자 전하가 안 나온대요?”
“네.”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성녀 아리아가 잠시 뭔가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질문을 던져왔다.
“혹시 2황자 전하가 헤더 영애를 피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욱신.
가슴 속에서 둔탁한 통증이 퍼져나갔다.
지난 5일간 한 번도 레이몬드 2황자를 만나지 못했던 것. 기다리다 못해 직접 그를 찾아왔지만 바쁘다는 말로 나와 만나주지 않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레이몬드 2황자가 나를 피하고 있다는 건 바보라도 알 수 있는 거였다. 모르고 있던 사실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새삼 이렇게 성녀 아리아의 입을 통해 재확인하게 되자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쯧,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쓸데없는 소리를.”
레스티아 경이 못마땅한 눈길로 성녀 아리아를 응시하더니 다시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닙니다, 헤더 영애. 지금은 전하께서 자리를 비울 틈이 나지 않으셔서 그런 거니 걱정하지 말고 돌아가서 기다리시죠.”
“아니, 제가 볼 땐 별로 안 바빠 보이시던데요.”
열심히 나를 설득하던 레스티아 경이 성녀 아리아를 찌릿 노려보았다. 제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성녀 아리아가 못마땅해 죽겠다는 눈빛이었다. 성녀 아리아도 지지않고 레스티아 경의 시선을 받아치며 헹 코웃음을 쳤다.
왠지 서로를 대하는 태도가 익숙한 느낌인 게, 두 사람은 평소에도 이런 분위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 분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서로를 거슬린다는 눈빛으로 노려보던 두 사람이 동시에 나를 돌아보았다.
“뭔데요?”
“뭡니까.”
나는 간절함을 담아 양손을 꼭 모아쥔 채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슬란테아에서 로이안트 3황자의 입을 통해 들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마음에 걸렸던 얘기였다. 기적처럼 레이몬드 2황자와 마음이 이어진 지금까지도 내내 가슴 속 한구석에서 불편하게 자리한.
“슬란테아에 있을 때 3황자 전하께서 제게 그러셨어요. 3일 뒤, 혹은 봄까지만 기다리면 2황자 전하에 대한 제 감정을 정리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요. 그때 3황자 전하께 말했던 3일 뒤라는 날짜는 제가 수도에 도착한 날이었어요. 여기에 오면 자연히 알게 될 거라는 식으로 말씀하셨었는데, 아직도 그게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어쩌면 그때의 그 이야기가 지금 레이몬드 2황자가 나를 피하는 이유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불안했다. 혹시 내게 좋아한다고 말한 걸 후회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에게 달리 사랑하는 여인이 생겼던 건 아닌지. 무섭지만 더는 모른 척 할 수는 없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혹시 두 분은 이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계신가요.”
원래는 유리 황녀나 레이몬드 2황자에게 직접 묻고 싶었으나, 두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지금은 다른 이들에게 매달려볼 수밖에 없었다.
성녀 아리아는 몰라도, 최소한 레스티아 경은 알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때 그 자리에 레스티아 경도 있었고, 분명 로이안트 3황자의 말에 동의하듯 침묵을 지키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