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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클레어 헤더의 해피엔딩을 위하여 (17) (126/152)

06. 클레어 헤더의 해피엔딩을 위하여 (17)

「그보다 너 괜찮아?」

「……뭐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아리아가 말을 걸어오자, 유리는 콧물을 훌쩍이며 시큰둥하게 반문했다.

아리아는 먼저 말을 꺼내놓고는 잠시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은지가 우릴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았잖아. 멋대로 원작을 바꾸는 걸 원치 않는다는 사실도. 그런데 계속 그렇게 이 이야기에 관여할 거야?」

아리아가 방패로 내세우고 있던 의자를 당겨 앉으며 물었다. 이번엔 유리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굳은 얼굴로 아리아를 가만히 바라보던 유리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신 뒤 입을 열었다.

「내 추측일 뿐이지만 난 왠지 신은지가 우리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아. 신은지가 유리창 박살냈을 때 클레어 언니가 외쳤던 말도 그렇고, 언니를 통해 우리한테서 뭔가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것 같기도 해.」

진지하게 말을 잇던 유리의 눈동자가 못마땅한 빛을 띠며 일그러졌다.

「그런데 비겁하게 우리 앞에 나타나지는 않고 있지.」

쯧, 짜증스럽게 혀를 차는 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할 말이 있으면 앞에 나오라고 전하는 거야. 그리고 그땐 나도 신은지한테 하고 싶은 말을 할 거야.」

「그래서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계속 원작을 망쳐놓겠다고?」

허, 기가 막혀 하는 허탈한 숨소리가 아리아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지금 은지 녀석 정상 아닌 거 알지? 너 그러다 진짜 죽기라도 하면 어떡할 건데.」

무모해 보이는 유리의 계획에 아리아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지금의 신은지를 예전의 그 신은지로 생각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진짜 이 세계의 신이 되어 뭐든지 좌지우지할 수 있는 그 애를 상대로 도발을 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너무 위험했다.

하지만 유리는 오히려 몸을 사리는 아리아의 태도를 무시하듯 흥 콧방귀를 꼈다.

「애초에 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죽일 거면 진작 죽였겠지. 머리 위로 깨진 유리가 떨어지게 하는 식으로 치졸한 위협을 할 게 아니라. 그리고 진짜 원작을 망쳐놨다고 화풀이를 하려던 거였으면 애초에 언니를 우리한테 돌려보내지도 않았을 거고.」

그래서 이판사판이다?

이글거리는 유리의 눈동자를 본 아리아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눈썹을 들어 올렸다. 혼자서 거기까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가.

내심 감탄도 하는데, 유리가 주먹 쥔 오른손으로 왼쪽 손바닥을 퍽 소리가 나게 치며 말했다.

「그리고 신은지를 제쳐두고라도 이대로는 안 돼. 내 두 눈에 흙이 갈 때까지 아니, 흙이 들어가도 클레어 헤더와 리하르트 아델은 절대 안 돼. 신은지가 개연성 감정선 다 말아 먹은 내용 쓸 때마다 일일이 지적해준 게 나야. 신은지가 무서워서 계속 벌벌 떨고만 있을 거라 생각했다면 경기도 오산이다.」

「야, 요즘 급식들 그딴 아재 개그하고 노냐. 그리고 미리 말해두는데 난 절대 안 도와줄 거다?」

「잊고 있었는데 내 좌우명 그거야.」

아리아가 질렸다는 투로 태클을 걸어왔으나 깨끗이 무시했다. 유리는 투지로 불타오르는 눈을 번뜩이며 한 글자 한 글자에 힘을 실어 외쳤다.

「못 먹어도 고.」

* * *

금방 다녀올게요.

나는 내 왼쪽 손목에 있는 금색 팔찌에 시선을 둔 채 레이몬드 2황자가 이 팔찌를 채워주며 말했던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해보았다. 금방이라는 건 어느 정도의 시간을 두고 말하는 걸까. 사람마다 금방이라는 말에 두는 의미가 많이 다른 걸까.

나는 정말 하루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라고 여겼는데, 어쩌면 레이몬드 2황자에게는 그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말하는 걸지도 몰랐다.

벌써 3일째 레이몬드 2황자의 머리카락 한 올도 보지 못한 탓에 자꾸 생각만 많아지는 나였다.

첫날은 불쑥 내 앞에 나타난 리하르트 아델로 인해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됐고, 그 다음날은 모습을 보이지 않는 레이몬드 2황자 때문에 밤새 잠들지 못했다. 그리고 오늘은.

“형슈님, 나 이거 다 만들었어요!”

알렌 4황자가 꽃으로 만든 팔찌를 가져와 내 눈앞에 내밀었다. 어설프지만 자그마한 손으로 열심히 꽃줄기를 얽어서 만든 팔찌를 보자마자 절로 미소가 나왔다. 마찬가지로 꽃을 엮어 화관을 만들고 있던 나는 최대한 밝은 얼굴로 웃으며 그에 대꾸했다.

“와, 정말 잘 만드셨네요. 너무 예뻐요.”

“헤헤.”

기뻐 보이는 얼굴로 해맑게 웃던 알렌 4황자가 내 손에 팔찌를 덥썩 안겨주었다.

“이거 형슈님 줄게요. 선물이에요!”

“저 주시는 거예요?”

“네! 형슈님 주려고 만든 거예요!”

얼떨결에 팔찌를 받아든 나는 만들고 있던 화관을 내려놓고 오른쪽 손목에 조심스럽게 팔찌를 차보았다. 크기도 맞지 않고 모양도 어설프기 그지없지만, 알렌 4황자 만큼이나 사랑스러운 팔찌였다. 정말 할 수만 있다면 이 모양 그대로 평생 간직하고 싶을 정도로.

“고마워요, 소중히 할게요.”

알렌 4황자가 건네준 깜짝 선물에 잠시나마 생각이 많은 머릿속이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진심을 담아 감사 인사를 전하며 더없이 진귀한 것을 보듯 꽃팔찌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반대쪽 손목에 있는 금색 팔찌에 다시 시선이 간 순간부터 머릿속이 다시 어지러워졌다.

레이몬드 2황자가 금방 돌아오겠다고 말하고 가버린 뒤, 지난 3일 동안 나는 줄곧 알렌 4황자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함께 산책하고, 책을 읽고, 식사하고, 다시 잠드는 순간까지 계속 말이다.

레이몬드 2황자는 물론, 유리 황녀까지 그날 이후 한 번도 모습을 비치지 않고 있었다.

유리 황녀 쪽은 어느 정도 이유가 짐작이 갔다.

아마 유리 황녀가 내게 진정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가 문제였을 것이다. 당연히 레이몬드 2황자를 좋아한다고 대답하면서,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면서도, 무심코 그녀의 시선을 피하는 내가 있었다.

대체 왜 그랬던 걸까.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나는 레이몬드 2황자를 좋아한다. 나는 리하르트 아델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게 당연한 건데, 그게 옳은 일인데. 왜 한순간 대답을 망설였던 걸까. 왜 유리 황녀의 시선을 피했던 걸까.

나도 그 순간의 내가 이상하다고 느꼈는데 유리 황녀는 오죽할까. 이해할 수 없는 망설임이 묻어나는 대답에 실망했을 것이다. 나라도 이렇게 우유부단하고 제 마음조차 모르는 여자가 제 오라버니의 곁에 있다면 싫을 터였다.

그리고 유리 황녀와 레이몬드 2황자 대신, 중간에 카롤리나 황후가 한 번 더 나를 찾아왔었다. 함께 차를 마시며 넌지시 리하르트 아델에 대해 묻는 걸로 보아 그에 대한 얘기를 전해듣고 온 듯했다.

나는 그 사람과는 예전에 벌써 끝난 관계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카롤리나 황후의 시선 앞에서 어지러운 내 마음이 다 내비치는 것만 같아 부끄러웠다. 불안하게 그녀의 눈을 피하며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유리 황녀의 앞에서 그랬듯이.

나는 무의식중에 한숨을 길게 내뱉으며 왼쪽 손목의 금색 팔찌를 쓰다듬었다.

어쩌면 그동안 레이몬드 2황자를 만나지 못한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상태로 레이몬드 2황자를 만나서 괜히 또 그에게 상처를 주게 되는 건 아닐지 불안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그 반대라고 해야 할지. 유리 황녀 거처의 유리창을 전부 박살 낸 뒤로 신 역시 더는 제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다.

지난 3일간 알렌 4황자나 내게 위협을 가하는 일도 없었다. 그래도 아직은 방심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때때로 불안해질 때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돌아본다. 그럼 유리 황녀가 내게 억지로 붙인 호위기사들이 보인다. 어딜 가든 반드시 따라붙어 감시하듯 나를 지켜보는 기사들이 불편한 면도 있으나 그 이상으로 무척 든든했다. 그래도 호위가 아홉 명이나 되는 건 좀 과하다 싶기도 했지만.

“형슈님 형슈님.”

“네, 알렌님.”

옷깃을 살며시 잡아당기는 손길에 나는 얼른 알렌 4황자를 내려다보았다. 나를 빤히 올려다보는 강아지 같은 눈동자에 다시 심장이 아팠다. 너무 귀여운 건 오히려 심장에 해롭다는 걸 알렌 4황자를 통해 처음 알았다.

“오늘은 꼬옥 안 해줘요?”

아이가 잠깐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내뱉은 말에 나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꼬옥이 뭐지? 하고 생각하다 아! 하고 뒤늦게 깨달았다. 아마 며칠 전에 한 번 알렌 4황자를 무심코 꼬옥 끌어안았던 때를 말하는 것 같았다. 그 뒤로 종종 저렇게 내게 선물을 건네거나 하고는 뭔가를 바라는 듯 쳐다보던 시선이 그런 의미였던 모양이었다. 그때처럼 꼬옥 안아달라는.

이 아이는 정말 심장에 해롭다. 어떻게 여기서 더 귀여울 수가 있는 걸까.

나도 모르게 입가가 헤벌쭉 벌어져선 다정한 눈으로 알렌 4황자를 바라보았다.

“꼬옥 해봐도 돼요?”

알렌 4황자를 향해 팔을 벌리며 묻자, 아이가 먼저 내 품에 와락 안겨들었다.

헤헤,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내 품에 얼굴을 묻은 아이의 작은 몸에서 콩콩 심장이 뛰는 게 느껴졌다. 작고 따스한 몸을 안은 채 아이의 심장 소리를 듣고 있자니 불안하던 마음이 차츰 안정되는 게 느껴졌다.

지금 이 순간이 너무 행복하니, 이제 다른 건 뭐든 아무래도 좋다는 마음마저 들었다.

―올해 5살의 우리 황실 늦둥이 막내 알렌입니다. 우리 오빠랑 결혼해주시면 이렇게 귀엽고 깜찍한 도련님이랑 매일 티타임도 가능하십니다.

유리 황녀가 첫만남에서 내게 당당하게 외쳤던 말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그때도 무척 매력적이었던 그 조건만은 완벽하게 충족되고 있었으니까.

최근 며칠간 매일 같이 알렌 4황자와 시간을 보낼 수 있긴 했다. 티타임은 당연했고, 지금은 정원의 꽃밭 옆에 주저앉아 둘이서 오순도순 대화도 나누며 함께 꽃을 엮고 있었다. 유리 황녀가 선물해준 예쁜 드레스에 흙이 묻고 풀물이 드는 게 조금 걱정스럽긴 했지만.

이후에도 함께 점심을 먹고, 디저트도 나눠 먹으며 알렌 4황자와 즐거운 티타임을 보냈다. 알렌 4황자의 웃는 얼굴을 보고 있으면 잠시나마 복잡한 생각이나 감정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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