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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클레어 헤더의 해피엔딩을 위하여 (16) (125/152)

06. 클레어 헤더의 해피엔딩을 위하여 (16)

“내 보기에 그 애 성격이면 내가 제 가족들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걸 알면 지금보다 날 더 무서워할 것 같아. 어쩌면 오히려 나를 원망할지도 모르지. 아무리 저를 그렇게 억압하고 학대했던 인간들이라도 말이야.”

구겨진 양피지 위를 의미 없는 눈으로 내려다보던 카롤리나 황후가 다시 레이몬드를 바라보았다.

“아마 너도 비슷한 이유로 지금까지 묻어두고 있는 거겠지만.”

이번에도 레이몬드는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에젯트 헤더, 벨린 트뷔에, 에이든 헤더를 시작으로 헤더 자작가 전체를 몰락시키는 건 어렵지 않다. 다만 그 과정이나 결과를 클레어가 알게 되었을 때의 반응을 확신할 수 없었다.

워낙 마음이 여린 사람이라 그 자들을 직접적으로 처벌하길 바라지 않을 수도 있다. 실제로 에이든 헤더가 저를 때렸을 때도 못본 척 해줄 수 없겠느냐 제게 매달려 애원까지 했던 그녀니까.

그리고 지금까지 클레어가 한 번도 자신의 과거에 대해 말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 걸렸다. 괜히 말을 꺼냈다가 멋대로 자신의 과거를 조사했다는 걸 알고 도리어 클레어가 상처받을 수도 있기에 더 조심스러워졌다.

레이몬드가 지금껏 얌전히 저들을 지켜보기만 하고 있는 이유는 단순했다. 클레어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으니까. 조금이라도 그녀가 제게 오는 걸 망설이게 될만한, 그 어떤 작은 방해나 불안 요소도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역시 약혼식이 먼저인 게 나으려나.”

뭔가를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카롤리나 황후가 낮게 중얼거렸다. 레이몬드도 생각에 잠겨있던 터라 한 번에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시선을 던졌다.

“혹시 클레어가 아카데미 편입을 희망한다면 말야. 황자비라고 소문이 나면 아무래도 다른 아카데미생들과 어울리기 힘들겠지. 조용히 약혼식만 치르고 얼굴이 알려지지 않게 들여보내는 게 좋겠어. 2년 정도는 거의 만나지 못하게 되겠지만 한 달에 8번 정도는 수업을 쉬니까 그때 네가 몰래 만나러 가면 될 일이고.”

설마 지금까지 그런 걸 생각하고 계셨던 건가.

카롤리나 황후는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클레어와 레이몬드의 향후 계획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게다가 지나치게 앞서가시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었다.

레이몬드는 놀랍기도 하고 살짝 당황스럽기도 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클레어와 제 관계를 반대하시는 쪽에 가깝지 않으셨던가요. 유리 때문에 약혼자 행세도 겨우 허락하실 걸로 기억합니다만.”

“그때는 클레어에 대해서 약간의 오해가 있었으니 그런 게지. 별 볼 일 없는 가문의 영애가 신분 상승을 노리고 너와 유리에게 접근한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을 했었지. 지금은 그게 아니란 걸 아니까.”

지난날의 제 실수를 말하기가 민망한 듯 카롤리나 황후가 작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리고 평생 뭘 갖고 싶다는 소리도 하지 않던 네가 처음으로 원하는 상대가 나타났는데, 내가 반대한다고 해서 포기할 것 같진 않으니 하는 말이야.”

“저 때문인 것처럼 말씀하시지만 사실 어마마마께서 클레어를 더 탐내시는 게 아닌지.”

“뭐, 그런 이유도 영 없진 않지만.”

웃음기 어린 레이몬드의 말에 순순히 수긍하던 카롤리나 황후의 왼쪽 눈썹이 찌푸려졌다. 그녀는 겉모습만은 저를 닮아 완벽한 둘째 아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넌 아직 멀어도 너무 멀었어. 애가 아무리 똑똑하면 뭘 해. 연애라곤 해본 적이 없으니, 경험치가 너무 낮아서 정말 걱정이야. 여자의 마음을 그렇게 함부로 파헤치는 게 아니란다. 알아도 모른 척 보고도 못본 척 해줘야지.”

쯧쯧, 혀까지 차가며 레이몬드의 연애 능력치를 걱정 겸 비난한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나라도 나서서 교육을 시켜야지. 이대로는 조만간 클레어에게 차이겠어.”

지금도 쑥스러우시니 괜히 저를 갖고 그러시는 듯합니다만.

학습능력이 뛰어난 레이몬드는 그 말을 조용히 속으로 삼켰다. 태연히 말씀을 잘하시다 갑자기 쑥스러운지 저를 두고 투덜거리는 어머니를 말없이 지켜보던 레이몬드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예전엔 클레어가 여러모로 눈에 차지 않으니 드러내놓고 싫은 기색을 내비치던 어머니가 이젠 먼저 결혼 얘기를 꺼내는 게 그리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클레어를 인정하고, 그녀를 좋아해 주는 것 같아 기뻤다.

하지만 그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가슴이 답답하고 불편해졌다.

이대로는 머지않아 클레어에게 차일 것 같다. 카롤리나 황후가 농담처럼 내뱉은 말이 곧 현실이 될지도 모르는 탓이었다.

레이몬드는 유리 황녀의 거처에 허락도 없이 들어간 일로 20일 동안 근신을 당한 리하르트 아델을 떠올렸다.

듣기로는 가슴이 저리도록 아주 절절하게 사랑을 고백했다는 것 같았다. 단 한 순간도 너를 잊은 적이 없노라고,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노라고. 제 마음을 고백하며 클레어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고 들었다.

그 당시 그 자리에서 있던 기사들의 입을 통해 제 귀에 들어온 이야기를 듣는 순간, 레이몬드는 또다시 자신의 음습한 마음과 마주해야 했다.

1년 전, 기사단장직을 내려놓고 자신의 영지 중 수도와 가장 멀리 떨어진 영지로 가서 조용히 살고 싶다고 했었던 리하르트 아델의 요청을 황제는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 리하르트 아델은 황제와 황태자에게 발목이 붙들려 다시 기사단장직을 맡아야 했고, 수도의 공작저에 눌러 앉혀졌다.

레이몬드는 그때 그가 바라는 대로 하게 해주자고 황제와 황태자를 설득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다. 이곳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내어 황성에는 아예 발도 붙이지 못하게 만들었어야 했는데.

리하르트 아델을 떠올리면서, 그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을 클레어를 상상하게 되었다. 어떤 표정으로, 어떤 눈빛으로, 어떤 마음으로 리하르트 아델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그리고 지금은…… 제게 어떤 말로 미안함을 전할지 고민하고 있을까.

‘……보고 싶어.’

클레어가 보고 싶었다. 오늘은 고작 몇 시간을 만나지 못했을 뿐인데 벌써 며칠이나 만나지 못한 것처럼 클레어가 그리웠다.

늦은 시각이지만 모른 척 만나러 가고 싶었다. 당황하면서도 저를 맞이해주는 그녀를 보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다정한 눈으로 저를 바라봐주고 웃어주는 클레어도 보고 싶었다.

그런데 갈 수가 없었다.

무서웠다. 무서워서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1년 전 그날처럼, 미안하다고 말하고 제게서 돌아서는 클레어와 마주하게 될까 봐.

한심한 겁쟁이가 되어버렸다.

* * *

유리는 잔뜩 심통이 난 얼굴로 씩씩대며 걷고 있었다.

아이고, 우리 황녀 전하 저러다 진짜 늙어서 고생하시지. 뒤에서 저를 따르는 듀와 체드가 또다시 쓰잘데기 없는 걱정을 해왔다.

유리는 뒤통수에서 들려오는 곡소리를 무시한 채 성녀 아리아의 거처를 찾아왔다. 이제는 하도 와서 익숙해졌는지 그녀의 호위를 맡은 성기사들도 저를 막지 않고 슬금슬금 옆으로 피했다. 어쩌면 익숙해진 게 아니라 단순히 제가 무서운 것 같기도 했다.

공룡 발소리를 내며 걷다 보니 성녀 아리아의 방문 앞이었다.

「야 이 XX XXX XX야!」

쾅! 유리는 발로 문을 냅다 걷어찬 뒤 대뜸 욕부터 내질렀다.

깜짝 놀라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뛴 아리아가 유리의 얼굴을 확인하고 인상을 그었다.

「이 미친놈, 이거 또 왜 이래?」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이 자식아!」

유리는 그에 굴하지 않고 삿대질을 하며 아리아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리아는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또 뭔데. 왜 또 그러는데.」

「리하르트 아델이랑은 대체 왜 헤어진 거냐고오오오!」

유리가 멱살을 잡아채려 손을 뻗자, 아리아는 그럴 줄 알았다며 잽싸게 그 손길을 피했다.

「아, 나도 모른다고! 그 인간이 갑자기 헤어지자고 그랬다니까!」

언제 또 공격이 날아들지 몰랐다. 아리아는 후다닥 물러나 의자를 방패로 내세우며 억울한 감정을 담아 외쳤다.

「나도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고 했잖아. 그냥 미안하다고, 헤어지자는 식으로 말한 게 다야 진짜.」

벌써 몇 번째 들었던 대답이니, 유리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몰라서 이렇게 찾아온 것도 아니었다.

분을 참지 못한 유리의 눈가가 벌게지더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또 왜 그러는데? 혹시…… 리하르트 아델이 헤더 영애 찾아갔어? 헤더 영애보고 좋아한대?」

「그래! 그 미친놈이 언니 손 잡고 널 사랑하는 걸 이제야 깨달았니 어쩌니 개소리를 해댔다고!」

「허, 역시 그랬구만.」

그럴 줄 알았다는 투였다.

자신은 이렇게 답답해 죽겠는데, 덤덤한 아리아의 반응이 유리의 분노를 더 부채질했다.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네가 똑바로 그 자식을 안 붙들고 있으니까 일이 이렇게 꼬인 거 아냐! 난 언니가 레이몬드 알렉 카지스에게 사랑받길 바랐지, 리하르트 아델 그 개자식한테 다시 돌아가길 바란 게 아니라고!」

유리가 어느새 눈물을 뚝뚝 흘리며 빽 소리를 질렀다. 아리아는 그런 유리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니, 진정해 봐. 어차피 헤더 영애도 지금은 2황자 전하를 좋아하잖아. 뭐가 그렇게 걱정이야?」

의아함이 깃든 아리아의 시선에 유리의 움직임이 멎었다. 작은 어깨가 아래로 축 처지고, 눈물로 얼룩진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모르겠어.」

유리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그렇게 답하고는 허탈한 숨을 토해냈다. 레이몬드에게 들었던 마지막 대답을 자신이 똑같이 하게 될 줄이야.

하지만 정말 그런 걸 어쩌겠나. 모르겠다는 대답밖에 할 수가 없었다.

―당연히 저는, 2황자 전하를 좋아해요.

유리는 레이몬드 알렉 카지스와 리하르트 아델을 두고 둘 중 진짜 좋아하는 이가 누구인지를 클레어에게 물었다. 대답은 금세 돌아왔다. 클레어는 한순간 멈칫하더니 무심코 제 시선을 피하며 그렇게 대답했었다.

분명 클레어로부터 레이몬드 알렉 카지스를 좋아한다는 대답을 들었음에도 유리는 가슴 속에 자리 잡은 불안을 걷어내지 못했다.

게다가 가뜩이나 불안한 마음이 드는데, 레이몬드 알렉 카지스까지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는 게 더 불안을 가중했다. 클레어가 리하르트 아델에게 돌아가겠다고 한다면,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게 뭔가. 그게 뭔 개떡 같은 소리냔 말이다.

그래도 한 번은 붙잡아 봐야지. 울고불고 클레어의 치마 끝자락이라도 붙잡고 애원해 봐야지. 어떻게 그리 쉽게 포기한다는 소리를 하냔 말이다.

그렇게나 괴로워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으면서, 리하르트 아델을 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없애버리고 싶다는 눈을 하고 있었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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