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클레어 헤더의 해피엔딩을 위하여 (15)
* * *
“별일이구나. 네가 먼저 날 다 찾아오고.”
오늘 새로이 올라온 보고서를 읽어내리던 카롤리나 황후가 들고 있던 양피지를 책상에 내려놓으며 고개를 들었다. 희미한 웃음기가 어린 눈동자가 밤늦은 시각의 방문자에게 향했다.
“그러고 보니 1년 전쯤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가.”
“클레어에게 찾아가셨다 들었습니다.”
1년 전쯤, 클레어 헤더를 황후궁으로 불러들였을 때와 똑같이 불쾌함이 서린 목소리가 제게 따지듯 말을 걸어왔다.
꽤 오랜만에 마주하는 것임에도 인사 한마디도 없이 곧바로 용건부터 따지고 드는 태도가 무척 날이 서 있었다. 그 태도에 언짢은 기분이 들기에 앞서, 신기하다는 생각이 먼저였다.
카롤리나 황후는 제 외모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아들들 중에서도 유독 더 저를 닮은 둘째 아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릴 때부터 누구보다 아름답고 똑똑하며 어른스러운 아이였다. 항상 먼저 원하는 걸 말하는 법도 없고, 실제로 무언가를 원하지도 않았다.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결핍된 것이 없으니 그만큼 간절히 원하는 것도 없었다. 오히려 뭐든 귀찮아하고 성가셔하는 쪽에 가까웠다. 그게 물건이든 사람이든.
그래서 예전부터 이 아이가 갖고 싶어 하는 게 생기면 어떻게 될까 궁금했었다. 애타게 바라고 필사적으로 그것을 쫓는 모습이 보고 싶기도 했다.
그토록 기다려왔던 존재가 설마 이름도 없는 가문의 평범한 영애가 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아니, 평범하다고는 할 수 없나.’
카롤리나 황후는 책상에 내려두었던 양피지에 다시 시선을 주었다. 보고서의 제일 윗줄에는 클레어 헤더라는 이름이 단정하게 쓰여있었다.
“레이몬드, 너도 참 보기랑 다르게 과보호구나.”
다시 레이몬드를 바라본 카롤리나 황후의 눈동자가 아주 흥미로운 것을 보듯 반짝였다.
“네게 사랑하는 이가 생기면 어떤 식으로 연애를 할까 궁금하긴 했었는데 말이지.”
“클레어에게 무슨 말씀을 하신 겁니까. 또 전처럼 괜한 말로 겁주고 울리신 건 아닌지 걱정되네요.”
레이몬드는 클레어와 가짜 약혼 얘기가 오갔던 날, 카롤리나 황후가 그녀를 황후궁으로 불러들였던 일을 상기하며 서늘한 시선을 던졌다.
중앙정원의 연못 근처에서 주저앉아 울고 있던 클레어의 모습이 떠올라 그의 기분을 가라앉게 만들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카롤리나 황후를 찾아왔었다. 제대로 된 대답을 듣지는 못했으나, 제 어머니가 그녀를 불러들여 무슨 말을 했을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분수에 맞지 않는 마음을 먹지 말라는 식으로 클레어를 몰아세웠을 게 분명했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가문이나 그녀의 과거들을 들먹이며 일부러 상처를 줬을 거라는 사실도.
그때는 제가 다 알아서 할 테니 더는 그녀와 저 사이에 참견을 마시라 엄포를 놓았었다. 그 뒤로 카롤리나 황후가 직접적으로 클레어와 접촉하는 일은 없어 이쪽은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그랬건만, 오늘 또 카롤리나 황후가 클레어를 찾아갔다는 말을 듣고 이렇게 득달같이 달려오고 말았다.
카롤리나 황후가 클레어의 그림에 관심이 많다는 건 알지만, 단순히 그 이유만으로 찾아간 게 아닐지도 모르니 불안했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어지간히 소중한가 보구나.”
카롤리나 황후는 놀랍다는 투로 덤덤히 말했다. 레이몬드의 태도가 기분이 나쁠 법도 한데 그보다는 흥미롭다는 감상이 먼저였다. 웬만해선 제 감정을 잘 드러내지도 않는 아이가 저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래도 너무 그렇게 하나하나 간섭하려고 들면 금세 차일 텐데.”
그렇다고 또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어서, 빙긋 웃으며 일부러 레이몬드를 자극할 만한 소릴 꺼냈다. 예상대로 무표정하던 얼굴에 금이 갔다. 저를 닮아 근사한 금색 눈동자가 못마땅한 빛을 띠며 일그러졌다.
“클레어를 찾아가신 이유나 말씀해주시죠. 오늘은 대답을 들려주시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레이몬드가 뭐라고 받아쳐 올지 기대했던 카롤리나 황후는 살짝 흥이 깨진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클레어에게 레지나 왕립 아카데미에 편입할 의향이 없는지 물어봤단다.”
“레지나 왕립 아카데미요?”
“그래, 재능은 충분한 것 같으니 내가 거기에 살짝 날개를 달아줄까 해서.”
카롤리나 황후가 이제 슬슬 귀찮다는 투로 대답했다.
제 어머니가 쉽게 거짓말을 하는 이는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레이몬드가 그제야 살짝 안도했다. 혹시 또 저와의 관계로 인해 클레어가 상처를 받진 않았을까 긴장했던 마음이 이제 조금 풀리는 듯했다.
그나저나 클레어가 레지나 왕립 아카데미에 편입한다라. 전교생이 기숙사 생활을 해야 하는 아카데미 교칙을 떠올린 레이몬드의 표정이 굳었다.
만약 클레어가 정말 아카데미에 편입하게 된다면 최소 2년은 강제로 떨어져서 지내야 한다는 뜻이었다. 클레어가 편입을 희망한다면 당연히 그걸 응원해줘야겠지만, 2년이나 그녀와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머뭇거려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굳이 아카데미에 편입해야 할까. 달리 클레어의 재능을 세상에 선보일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그의 머릿속에 순간 떠오른 사람이 있었다.
시오네트라 버젯. 일찌감치 클레어의 재능을 알아본 건지 멜린트 영지에서 머무는 내내 클레어의 주위를 맴돌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 사람에게도 클레어의 소식을 전해줘야겠군요.”
레이몬드가 생각난 김에 무심코 말을 내뱉자, “그 사람?”하고 카롤리나 황후도 관심을 보여왔다.
“시오네트라 버젯 교수요. 어마마마께는 알테노이즈라는 이름이 더 익숙하시겠군요. 클레어가 그렇게 된 걸 안 뒤로 충격이 컸던지, 약속했던 제단화도 그리지 못하겠다고 연락이 와서 한 번 난리가 났었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알테노이즈가 헤더 영애를 어떻게 알고?”
“아마 제자로 들이고 싶어 하는 것 같았습니다. 클레어를.”
“그 알테노이즈가?”
카롤리나 황후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가문의 규율도 그렇고, 문하생은 절대 들이지 않는 걸로 유명한 사람인데 어찌…….”
마치 있을 수가 없는 얘기를 들은 것처럼 경악의 감정이 서렸던 그녀의 눈동자가 멈칫했다. 카롤리나 황후는 클레어가 그려냈던 벽화를, 그리고 분명 그녀가 그린 게 틀림없을 그림들을 떠올렸다.
“아니, 확실히 알테노이즈도 반할 만한 재능이긴 했지.”
잠깐 싸늘하게 가라앉았던 눈동자가 길게 휘었다. 그녀는 오늘 낮에 재회했던 클레어를 떠올리며 입가에 미소를 되돌렸다.
“그럼 내가 추천장을 써주니 마니 할 필요도 없었던 거로군. 네 말대로 정말 괜한 참견이었어.”
카롤리나 황후가 말을 마치며 책상 위에 내려놓았던 양피지를 레이몬드 쪽으로 돌렸다. 한 번 읽어보라는 듯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양피지를 내밀자 레이몬드가 책상 앞으로 두어 걸음 더 다가왔다.
클레어 헤더의 이름이 제일 위에 적힌 양피지는 그녀와 연관된 모든 조사가 이루어진 보고서였다. 얼핏 리하르트 아델의 이름도 보였지만 레이몬드는 보지 못한 척 다시 카롤리나 황후를 올려다보았다.
또 무슨 얘길 하시려고 이런 걸 보여주는 것이냐는 시선을 보내자, 그녀가 다시 양피지를 제 앞으로 끌어오며 입을 열었다.
“벨린 트뷔에, 그리고 에젯트 헤더.”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레이몬드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변했다.
“처음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는데 아무리 봐도 이상해서 말이지. 현재 레지나에서 알테노이즈 다음으로 명성이 자자한 화가와 이름도 없는 가문의 전 자작부인이 왜 이렇게 자주 어울려 다녔던 걸까 호기심이 생기지 않겠니.”
갑작스러운 얘기에도 레이몬드가 당황하긴커녕 제 말에 동의하듯 침묵을 지키자, 카롤리나 황후가 예상했다는 투로 말했다.
“표정을 보니 너도 이미 파악하고 있었던 듯하고.”
손가락 끝으로 책상을 두드리는 그녀의 손길에서 다 숨기지 못한 불쾌하고 언짢은 감정들이 드러났다.
“이 둘을 어떻게 처리할지도 클레어에게 먼저 말을 하는 게 좋을지, 아니면 내가 독단적으로 손을 댈지 고민중이다만.”
“저도 적절한 시기를 보고 있는 중이니, 일단은 조금 더 덮어두시죠.”
이쪽이 다 알아서 할 텐데 중간에서 끼어드는 게 달갑지 않다는 투였다. 선을 긋는 듯한 레이몬드의 말에 카롤리나 황후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내가 그 여자의 그림을 몇 점이나 샀는지 알고 하는 말이니. 정확히는 그 여자의 이름으로 내걸렸던 클레어의 작품이겠지.”
그 가문에서 오래 일했던 사용인들에게 돈만 제법 쥐여주니 술술 털어놓아서 알아내는 건 숨 쉬는 것만큼이나 쉬웠다. 주인의 행태가 그 모양이니 밑에서 일하는 사용인들도 충성심이라고는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는 게 일을 더 쉽게 해주었다.
에젯트 헤더가 꽤나 신뢰하여 늘 데리고 다니는 사용인이라 들었다. 덕분에 보고 들은 게 많은 고발자는 이쪽으로부터 상당한 금화를 손에 쥐고 좋은 정보를 많이 알려주었다. 오래전부터 타국의 귀족인 그녀가 헤더 자작가를 들락거렸던 것부터, 클레어가 그린 그림들을 어딘가로 조용히 빼돌리고 있었던 사실까지.
“생각할수록 괘씸하군. 어떻게 짓밟아야 가장 비참하게 밑바닥으로 내리꽂히게 만들 수 있을지.”
카롤리나 황후는 책상을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 긴 손톱으로 양피지 위를 주욱 그었다.
감히 겁도 없이 이 자신을 상대로 사기를 친 것도, 대리 화가를 써서 미술계의 이름을 더럽힌 것도 용서가 되지 않건만…… 그 과정에서 희생당한 이가 하필 또 클레어 헤더였다.
“그리고 헤더 자작가 자체도.”
에젯트 헤더와 벨린 트뷔에의 관계를 알아내는 와중에 알게 된 사실들이 카롤리나 황후의 분노를 더 부채질했다.
올라온 보고서에는 클레어가 어떻게 지금의 헤더 자작가로 들어왔으며, 그 안에서 어떤 취급을 받고 자랐는지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끊임없이 학대받았던 그 애가 가엾고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편견과 경계의 시선을 걷어내고 바라본 클레어가 얼마나 선하며 여린 사람인지 알게 되었기에 더더욱.
카롤리나 황후는 그 보고서를 읽는 내내 당장 헤더 자작저에 불을 질러 폭삭 내려앉게 만들라는 명을 내리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
“전부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을 만큼 잘근잘근 밟아줘야 조금이나마 이 분노가 가실 것 같아.”
그녀가 늘 그렇듯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레이몬드는 동의하듯 침묵을 지켰다.
“망설이고 있는 이유는 하나야. 클레어가 이 이상 날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해. 원인을 제공한 건 나지만, 그래도 나만 보면 잔뜩 겁에 질려선 벌벌 떠는 게 싫더군.”
탁. 습관처럼 그녀의 손가락이 다시 책상을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