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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클레어 헤더의 해피엔딩을 위하여 (14) (123/152)

06. 클레어 헤더의 해피엔딩을 위하여 (14)

놀란 눈을 들어 겨우 카롤리나 황후와 시선을 마주하자, 그녀가 왠지 무척 상기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내가 학원장과 꽤 친분이 있기도 해서 헤더 영애를 입학시키는 건 어렵지 않아. 물론 헤더 영애가 아카데미에 입학할 실력이 충분하다는 걸 알기에 하는 제안이야. 지금은 입학 시즌이 지난 상태라 도중 편입을 위해서는 따로 추천장이 필요하거든.”

예상과 너무 다른 얘기가 나오는 바람에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무례라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카롤리나 황후만 응시하고 있으니, 그녀가 본래의 당당하고 자신만만한 미소를 되찾은 채 말했다.

“나는 헤더 영애가 지금보다 훨씬 더 높이 날 수 있는 새라고 생각하네. 어쩌면 이 카지스 제국에서 제2의 알테노이즈가 탄생하는 것도 그리 멀지 않은 일이라 여겨져. 그러니 한 번 생각해보겠나.”

쿵쾅쿵쾅! 닫힌 문 너머에서 마치 코끼리가 뛰어오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어마마마!”

문이 벌컥 열리고 유리 황녀가 헉헉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

“아, 정말 한시도 방심을 못 하겠네!”

“그렇게 숨이 턱에 찰 정도로 뛰어오다니, 누가 보면 내가 헤더 영애를 잡아먹기라도 하는 줄 알겠구나.”

깜짝 놀란 나와 달리 카롤리나 황후는 이 상황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태연한 반응이었다. 유리 황녀는 귀여운 볼을 잔뜩 부풀린 채 카롤리나 황후의 앞으로 쿵쿵 걸어왔다.

“어마마마, 제가 언니 아직 아파서 안 된다고 했잖아요!”

“내 보기엔 멀쩡해 보인다만.”

“겉보기만 그런 거라고요! 아직 회복할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카롤리나 황후는 툴툴거리는 유리 황녀가 귀엽다는 듯 쿡쿡 웃더니, 다시 나를 돌아보며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헤더 영애, 내 제안을 한번 잘 생각해 봐.”

“제안이라뇨? 무슨 제안이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유리 황녀가 험악하게 눈을 뜨며 끼어 들어왔다.

“레지나 왕립 아카데미에 다녀볼 생각이 없는지 물어봤을 뿐이란다. 헤더 영애의 재능을 이대로 썩히긴 아까운 것 같아서.”

“레지나 왕립 아카데미가 뭔데요? 언니 보고 지금 학교 다니란 거예요? 아니, 그보다 레지나면 옆 나라 아니에요? 언니를 거기로 보낸다고요?”

“당장 그렇게 하자는 게 아니라, 헤더 영애에게 의견을 물어본 거야.”

카롤리나 황후와 유리 황녀의 눈동자가 동시에 내게 향했다. 케이크에만 열중하던 알렌 4황자마저도 분위기에 휩쓸려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말 그대로 내 의견을 묻는 무언의 시선들에 나는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아,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시온이 비슷한 제안을 해왔을 때와 똑같았다. 바라던 기회가 눈앞에 왔음에도 어째서인지 나는 선뜻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너무 갑작스러워서일까. 아니면 다른 문제들이 더 마음에 걸려서일까. 나는 감히 카롤리나 황후를 기다리게 만들고서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참, 더 중요한 말을 깜빡했군.”

그런 나를 눈치챈 건지, 카롤리나 황후가 앉아있던 의자에서 우아하게 일어나며 화제를 돌렸다. 나는 그녀를 따라 얼른 의자에서 일어났다. 카롤리나 황후가 테이블을 지나 한 걸음 더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대가 이렇게 돌아올 수 있었던 건 신께서 우리에게 준 선물이라 생각해.”

가늘고 아름다운 손가락이 다가와 내 뺨에 살며시 닿았다. 스치듯 내 뺨을 쓰다듬고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아주 작게 “너무 마른 것 같은데.”라고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졌으나, 나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아름다운 눈동자가 길게 휘어졌다.

“무사히 우리 곁에 돌아와 줘서 고맙네.”

생각지도 못한 제안과 생각지도 못한 미소, 그리고 분에 넘치는 환영 인사까지. 카롤리나 황후의 미소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내게 그녀는 끝까지 다정한 태도로 나를 대해주었다.

“편히 쉬는데 내가 너무 방해를 한 것 같군. 무사한 모습을 봤으니 난 이만 가봐야겠어.”

시종일관 긴장하여 굳어있는 나를 배려함인지, 카롤리나 황후가 돌아가 보겠다며 인사를 건넸다. 나는 또다시 얼뜨기처럼 허둥대며 카롤리나 황후를 향해 허리를 꾸벅 숙여 보였다.

끝까지 허둥대기만하는 내 모습이 꽤 우스웠던 모양이었다. 카롤리나 황후가 재미있다는 듯 또 한 번 쿡쿡 웃었다.

“뭐든 좋으니 혹시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말해주게, 클레어.”

그러고는 마지막엔 내 이름까지 다정하게 불러준 뒤 방을 나섰다. 나는 카롤리나 황후가 내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고, 기뻤고, 감격했다.

그런데 본인인 나보다 유리 황녀가 더 놀란 눈으로 카롤리나 황후가 나간 문을 멍하니 바라보는 게 보였다. 왜 그런가 하고 의아한 시선을 던지니, 유리 황녀가 “대박.”이라는 뜻 모를 소리를 내뱉고는 말했다.

“어마마마도 언니가 마음에 엄청 들었나 봐요. 어마마마가 오라버니들과 저, 알렌을 제외하고 저렇게 친밀하게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진짜 깜짝 놀랐다는 듯 유리 황녀가 그렇지 않아도 큰 눈을 더 크게 뜨고서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돌연 어딘가 심란한 표정으로 가슴 앞으로 팔짱을 척하니 꼈다.

“왠지 점점 라이벌이 늘어나는 기분이라 달갑지 않으면서도, 어마마마도 언니를 인정해준 것 같아서 기쁘기도 하고……. 으음, 복잡한 심경이라고 할까요.”

나는 유리 황녀를 지나 문가를 돌아보며 콩콩 뛰는 가슴께를 손으로 꾹 눌렀다. 아직도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오랫동안 동경해온 사람이자 최고의 화가로 이름 높은 시온에게 인정을 받을 때와는 또 달랐다. 황후궁에서 복도에 커다랗게 내걸린 내 그림을 봤을 때와도 달랐다. 카롤리나 황후에게 진짜 나 자신만으로 인정받은 것 같아서 더할 나위 없이 기쁘고 가슴이 벅찼다.

다른 누구도 아닌 카롤리나 황후가 내게 고맙다고 했다. 내 재능을 인정해주었다.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불러주었다. 현실이라고 믿기지 않는 꿈같은 일들이 일어나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저, 언니.”

나도 모르게 양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벅차오르는 감정들을 애써 가라앉히는데, 유리 황녀가 타박타박 내 옆으로 걸어와 말을 걸었다. 네, 하고 대답하자 유리 황녀가 조금 뚱한 얼굴로 내 눈을 피했다. 뭔가 말을 하려는 듯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 시무룩해져선 알렌 4황자의 옆 의자에 털썩 앉았다.

잠깐 안 본 사이에 얜 얼굴이 왜 이래. 유리 황녀가 투덜거리며 크림이 덕지덕지 묻은 알렌 4황자의 입가를 냅킨으로 닦아주기 시작했다.

나는 유리 황녀의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럽게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유리 황녀가 나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한다는 느낌을 받아서였다.

“예전에 내가 언니를 어떻게 알게 된 건지, 그리고 왜 언니를 좋아하게 된 건지, 나중에 말해주겠다고 한 거 기억나요?”

달그락 달그락.

알렌 4황자가 새로운 케이크 접시에 포크를 가져다 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무거운 분위기에 조심한다고 했는데도 소리가 나자 슬쩍 눈치를 살피는 모양새가 귀여우면서도 조금 안쓰러웠다.

나란히 테이블 너머에 앉은 천사 같은 얼굴의 남매. 케이크에 열중하는 알렌 4황자와 진지하게 나를 바라보는 유리 황녀. 꼭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게 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그립고 반가운 마음이 퐁퐁 솟아났다.

“「문」의 안쪽에서 신은지와 만났다고 했죠? 언니가 보기엔 어때 보였어요? 괜찮아……보였어요?”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는 유리 황녀가 제 옆자리의 귀여운 동생을 자랑스럽게 가리키며 당당하게 내게 제 오라버니와의 결혼을 제안해왔었다. 그랬던 유리 황녀가 지금은 자신 없는 표정과 목소리로 머뭇거리며 내게 물어왔다.

“아니, 아니에요. 지금 질문은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하지만 이내 그 질문도 내키지 않는 듯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없던 걸로 해달라 요구해왔다. 나는 가만히 그녀의 요구에 따라 아무것도 듣지 못한 양 조용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유리 황녀는 할 말을 머릿속으로 고르는 것처럼 한참을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이 세계는 사실 전부 신은지가 만들어낸 이야기예요. 언니도, 알렌도, 유리 황녀도.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인물들이 전부 다 신은지가 만들어낸 거죠. 신은지가 혹시 이것도 말해주던가요?”

“네, 대충은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유리 황녀가 어색하게 제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언니를 처음 알게 된 건 신은지가 쓴 소설 속에서였어요. 소설 속에서 언니는 주인공이 아니었어요. 사실 언니는 이 소설의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을 위기에서 구하고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는 조연에 불과했어요. 소설에 의해 철저히 짓밟히고 희생당하고 마지막 순간조차 주인공들의 극적인 전개를 위해 이용당할 뿐인 역할이었죠.”

먼 곳을 응시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나는 알지 못했던 나의 이야기를 천천히 되짚어가듯이.

“그런데도 언니는 너무나 착하고 다정하고, 누군가를 원망할 줄도 모르는 바보고……. 그래서 계속 언니한테 마음이 갔어요. 소설의 여자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에 불과한 언니에게요.”

느리게 말을 잇는 유리 황녀의 고개가 점점 아래로 떨어졌다. 나와 시선을 마주하는 게 힘들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원래 다른 세계에 살던 김유리라는 이름을 지닌 고등학생이었어요. 사고를 당했고, 눈을 뜨니 이 세계에서 유리 크리스틴 카지스 황녀의 몸으로 눈을 뜨게 됐어요.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방법이 보이지 않았어요. 그래서 뭐든 이곳에서 살아갈 이유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때 떠오른 사람이 언니였어요.”

말 끝을 흐리는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유리 황녀가 망설이듯 잠시 말을 멈춘 채 가쁜 호흡을 가다듬었다.

“언니를 지켜주고 싶었어요. 언니를 주인공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언니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었어요. 어쭙잖은 영웅 심리란 건 알아요. 그래도 그게 내가 이 세계로 오게 된 사명 같은 거라고 믿고 있었어요. 둘째 오빠처럼 머리가 잠깐 고장 나서는, 내가 진짜 왜 어떻게 여기로 온 건지도 까맣게 잊은 채로요.”

불안하게 만지작거리던 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리며 유리 황녀가 고개를 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언니 마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참견할 권리는 없다는 것도 알아요.”

절실함을 담은 눈동자가 똑바로 시선을 마주해왔다.

“그래도 딱 한 번만 묻게 해줘요.”

덜컥 겁이 났다. 나는 저런 눈을 하고 있는 사람이 무서웠다. 이번엔 내가 그녀의 시선을 피하고 싶어졌다.

“지금 언니 마음속에 가장 크게 자리한 사람은 누군가요?”

유리 황녀는 내가 숨거나 도망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주인공도 아닌, 일개 조연에 불과했던 나의 이야기를 줄곧 지켜봐 준 독자로서 내게 요구해왔다.

“레이몬드 알렉 카지스인가요, 아니면…… 리하르트 아델인가요.”

어쩌면 이 이야기의 결말과 직결된 내 마음의 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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