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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클레어 헤더의 해피엔딩을 위하여 (13) (122/152)

06. 클레어 헤더의 해피엔딩을 위하여 (13)

“형슈님?”

알렌 4황자가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내가 알렌 4황자의 자그마한 몸을 꼬옥 끌어안고 있었다.

당황한 나는 후다닥 알렌 4황자를 끌어안은 팔을 풀었다. 알렌 4황자로부터 딱히 기분 나빠하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허락도 없이 황족의 몸을 끌어안은 건 불경죄나 다름없었다. 일단은 사죄를 해야할 것 같아 머릿속으로 말을 고르는 중이었다.

똑똑똑.

정중한 노크 소리가 울렸다.

“형슈님. 저기 누가 왔어요.”

멈칫하며 움직임을 멈춘 내게 알렌 4황자가 문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까부터 계속 문 두드렸어요. 열어줄까요?”

알렌 4황자의 손끝을 따라 나도 문가를 돌아보았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나와 알렌 4황자가 가서 잠금을 풀어주지 않으면 문은 열리지 않을 것이다.

유리 황녀가 잠깐 나갔다 올 테니 그동안 문을 꼭 걸어 잠그고 있으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또 웬 미친놈이 올지도 모른다며,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몇 번이나 나와 알렌 4황자에게 신신당부를 하고 갔다.

“네!”

유리 황녀가 자기가 올 때까지 누가 와도 문을 열어주지 말라고 하기도 했었지만, 순간 그 얘긴 까맣게 잊은 채로 나는 허둥지둥 문가로 뛰어갔다.

쩔쩔매며 잠금을 풀고 문을 열자 제일 먼저 시녀장의 얼굴이 보였다. 정중하게 두 손을 모은 채 기다리고 서 있던 그녀가 내게 머리를 숙여 보인 뒤 옆으로 몸을 돌려 물러났다. 그리고 진짜 방문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에 보는군, 헤더 영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보다 한층 더 기품이 흐르고 아름다워진 카롤리나 황후가 내 앞으로 걸어왔다.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나는 헉 숨을 들이켜며 허리를 깊이 숙였다.

“화, 황후 폐하를 뵙……!”

“쉿.”

예법을 어긴 한심한 인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낮은 목소리가 속삭이듯 말해왔다. 가녀리고 우아한 손가락이 다가와 내 어깨를 붙잡았다. 카롤리나 황후의 손이 이끄는 대로 나는 허리를 바로 세우고 섰다.

잔뜩 긴장해 굳은 눈동자를 드니, 그녀가 검지를 입가에 대며 빙긋 웃었다.

“레이몬드와 유리가 영애를 너무 과보호하여 나한테는 영 순서가 돌아오지 않기에 몰래 왔네.”

기억 속의 모습과 너무도 다른, 다정한 눈동자가 나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철혈의 황후라 불리는 카롤리나 황후의 웃는 얼굴에 나는 바보처럼 놀란 눈만 깜빡였다.

“레이몬드에게 대충 사정은 전해 들었어. 무사히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야.”

그녀는 그대로 얼어붙어버린 나를 자연스럽게 이끌어 함께 방 안으로 들어섰다.

“어마마마!”

“이런, 나의 알렌도 함께 있었군.”

등 뒤로 문이 닫히고, 어느새 토다닥 달려온 알렌 4황자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와락 안겨들었다. 몸을 낮춰 달려오는 알렌 4황자의 등을 안고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어준 카롤리나 황후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카롤리나 황후의 시선이 다시 내게 돌아오자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나는 다급히 치마를 양손으로 붙잡고 몸을 굽혀 제대로 인사를 올렸다.

나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 거지. 인사는 제대로 올린 걸까. 두려움에 경직된 채로 나는 불안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생각해보면 난 지금 당장이라도 카롤리나 황후가 죄를 물어 나를 처벌한다 해도 변명할 말이 없었다. 멋대로 그녀와의 계약을 무시하고 유리 황녀를 떠난 것도 모자라 감히 레이몬드 2황자를 마음에 품었다.

보는 눈이 많은 황궁 안에서 그를 붙들고 좋아한다 외치고, 기어이 그의 품 안을 차지했다. 황궁 구석구석에 카롤리나 황후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을 터. 그녀도 당연히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지금부터 카롤리나 황후로부터 어떤 비난을 받고, 어떤 처벌을 받게 될지 알 수 없어 불안하고 두려웠다. 하지만 도망칠 수는 없었다. 전부 내가 책임져야만 하는 일이었다.

나는 있는 힘껏 달아나고 싶은 마음을 힘겹게 참으며 카롤리나 황후가 내게 내릴 처분을 기다렸다.

“그대를 탓하려고 온 게 아니니 너무 그렇게 떨지 말아.”

벌벌 떠는 내 어깨 위로 또다시 카롤리나 황후의 손이 닿았다. 상냥하게 어깨를 토닥여주는 손길에 나는 겁에 질린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카롤리나 황후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다정함에 덧대어 아주 조금 슬픈 색을 띤 미소가 내 시야에 가득 담겼다.

“나는 그저, 영애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그렇게 말하며 카롤리나 황후가 꺼내든 얘기는 내가 황성을 떠나기 직전 그렸던 아르가디아에 대한 것이었다. 내가 유리 황녀를 위해 그렸던, 죽은 황제의 여동생의 궁에 그렸던 수많은 아르가디아로 이루어진 꽃밭.

“헤더 영애 덕분에 잠시나마 그 아이가 살아있던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네.”

카롤리나 황후는 그 꽃밭을 본 순간 커다란 위안을 받은 기분이었다고 했다. 억지로 감춰두었던 그리움과 슬픔을 그제야 제대로 마주하고, 따스하게 위로받는 것만 같았다고.

그래서 그 벽화를 마주한 이후로 줄곧 다시 나와 만나기를 기다려왔다고 했다. 내게 고맙다는 말을 직접 전하고 싶어서.

“아마 그 애도 기뻐했을 걸세. 헤더 영애가 피워낸 아르가디아 꽃밭 속에서 행복하게 웃고 있는 그 애가 보이는 듯했어.”

처음 만났을 때와는 너무도 다른 얼굴로, 다정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는 카롤리나 황후의 앞에서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조잡한 그림 하나로 나 따위가 감히 그녀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어도 되는 것인지. 지금의 이 모든 상황이 그저 황망하여 시선 둘 곳조차 찾지 못하고 쩔쩔매기만 했다.

“그리고 그때는…… 미안했네.”

나는 방황하던 눈동자를 들어 간신히 카롤리나 황후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카롤리나 황후가 내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걸까. 의아한 시선을 던지자 그녀가 미안함이 담긴 미소를 띠며 말했다.

“내가 헤더 영애를 황후궁으로 불러들였을 때 말이야.”

아.

그제야 나는 카롤리나 황후가 말한 「그때」의 의미를 알아듣고 살짝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여전히 그녀가 내게 사과하는 이유를 알 수 없어서였다.

“왜 사과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군.”

생각하는 게 표정으로 다 드러났던 모양인지, 카롤리나 황후가 짧게 웃음을 흘렸다. 나는 부끄러움에 다시 시선을 헤매며 고개를 푹 숙였다.

“참 신기해. 이런 그대를 그때는 왜 그리도 밉게만 봤던 걸까.”

다행히 귓가에 닿는 카롤리나 황후의 목소리는 여전히 따뜻했다. 그에 용기를 내어 다시 살며시 시선을 들자 카롤리나 황후가 목소리만큼 다정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몰래 그녀를 훔쳐보려다 들킨 나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후다닥 고개를 숙였다.

“나도 결국엔 어리석은 사람인지라, 아직 사람 보는 눈이 한참 부족한 듯해.”

카롤리나 황후는 어딘가 자조 섞인 목소리로 느리게 말을 이었다.

“헤더 영애도 유리의 억지에 휘말렸을 뿐인데, 마치 처음부터 유리나 레이몬드를 노리고 접근하기라도 한 것처럼 헤더 영애를 폄하하고 무례하게 굴었던 행동에 대해 사과를 하고 싶었어.”

고개를 숙이고 있어 카롤리나 황후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목소리만으로도 그녀가 내게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다는 게 선명히 느껴졌다.

“그때는 갑자기 우리 앞에 나타난 헤더 영애가 의심스러웠어. 내 아이들에게 수작을 부려 의도적으로 접근한 건 아닌가 오해를 했어. 그래서 내가 가진 지위와 힘을 이용해 헤더 영애를 압박하고 위협해 상처를 줬지.”

나는 처음 그녀를 마주했던 때를 기억해보았다. 카롤리나 황후는 너무나도 아름답고, 또 너무나도 까마득히 높은 곳에 위치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내게는 한없이 어렵고 두렵기만한 사람이었다.

카롤리나 황후가 나를 지저분한 벌레 보듯 경멸 어린 시선을 던질 때도 화가 나기보다는 그녀가 무섭기만 했다. 도망치고 싶었다. 최대한 빨리 그녀의 앞에서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었다.

“그런데도 그대는 내가 사랑했던 이를 위해, 아르가디아를 남긴 채 이곳을 떠났고.”

그래서 설마 이런 순간이 오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내내 마음속에 짐으로 남아있었어. 헤더 영애에게 고맙다는 말을, 그리고 미안했다는 말을 전하지 못했던 지난 시간 내내.”

카롤리나 황후가 미안하다며 그날의 일을 내게 사과하는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는 도무지 믿기지가 않아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카롤리나 황후가 내 대답을 기다리듯 침묵을 지키고 있는 걸 알고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나를 향한 미안함이 담긴 금색 눈동자와 마주한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허둥지둥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그때는 황후폐하께서 충분히 오해하실만한 상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정말 괜찮으니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데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카롤리나 황후가 옅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내가 뭔가 잘못한 건가 싶어 불안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카롤리나 황후가 곤란하다는 듯 미소 짓고 있는 게 보였다.

“이렇게 사람이 좋아서야. 걱정이군. 나의 유리가 그대를 그토록 싸고 도는 것도 이제는 이해가 가.”

그녀가 어쩔 수 없다는 투로 말하고는 한 손은 알렌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내 등을 부드럽게 밀며 말했다.

“자, 이렇게 서 있지 말고 앉아서 대화를 더 할까.”

카롤리나 황후는 시종일관 내게 다정했지만, 여전히 그녀의 존재가 어려운 건 마찬가지였다. 잔뜩 얼어있던 나는 고장 난 꼭두각시 인형처럼 삐걱거리며 카롤리나 황후의 손길을 따라 움직였다.

“그래서 말인데, 조금 다른 얘기긴 하지만.”

셋이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의자에 마주 앉자 그녀가 화제를 바꾸어 말문을 열었다.

시녀장이 직접 차와 다과를 내어왔다. 알렌 4황자는 달콤한 케이크를 행복한 얼굴로 해치우고 있었지만, 나는 테이블 위의 무엇에도 손을 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혹시라도 카롤리나 황후의 앞에서 실수를 하진 않을까 바짝 얼어붙어 있는 게 다였다.

벽화에 대한 감사 인사와 생각지도 못했던 사과를 받긴 했지만, 아직 계약에 대한 얘기는 시작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카롤리나 황후가 살짝 뜸을 들이며 꺼내는 말에 나는 긴장된 침을 꿀꺽 삼키며 손바닥에 배어난 땀을 치마에 문질러 닦았다.

“괜찮다면 내가 레지나 왕립 아카데미에 내 이름으로 헤더 영애의 추천장을 써줄까 해. 영애의 의견은 어떤지 듣고 싶군.”

그리고 나온 이야기는 정말 생각지도 못한 또다른 제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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