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클레어 헤더의 해피엔딩을 위하여 (12)
상급 개체들의 공격이 쉴 새 없이 날아드는 와중에 그는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클레어가 아닌 마물이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푸른색으로 칠해진 듯한 마물이었다. 인간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지만 인간은 아닌.
그 뒤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마 방심한 사이에 상급 개체들의 공격에 당해 죽을 뻔했었던 기억은 설핏 났다. 뒤늦게 달려온 레스티아와 다른 마법사들에 의해 간신히 목숨만 구했다는 사실도 들어서 알고 있다.
그리고 이어진 그의 세계는 검은색 물감으로만 채워진 그림과 같았다.
이 세상에 더는 그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곁에 있을 수는 없더라도, 멀리서나마 그녀를 지켜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다시는 만날 수 없다. 두 번 다시 그 사랑스러운 눈동자에 제가 비치는 일은 없다. 그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약한 자신은 클레어의 존재 자체를, 그녀와 연관된 모든 걸 잃어버림으로써 살아남고자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죽어버릴 것 같았으니까. 스스로 이 목숨을 끊는 죄를 범하든지, 심장이 부서져 내리는 듯한 고통 속에서 서서히 말라죽든지.
기억을 잃고도 그는 쉬이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클레어 헤더라는 이름 자체도 기억하지 못하면서,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괴로움 속에 살았다.
매일 밤 이름조차 모르는 여인의 꿈을 꿨다. 그녀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그녀로 인해 고통받았다. 꿈속에서조차 닿지 않는 그녀의 존재가 애타고 원망스러웠다. 죽을 만큼 갖고 싶어서 발버둥 쳐도 언제나 꿈의 마지막 순간에 그녀는 제 손이 닿지 않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눈물로 범벅된 얼굴로 잠에서 깨고 나면, 늘 중요한 것 잊고 있는 듯한 허망함에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클레어가 존재하지 않는, 그녀를 잃어버린 지난 1년간의 그는 죽어있던 것과 다름없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듣고, 무엇을 겪었어도 전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좋아해요!
클레어가 제 손을 잡아주었을 때, 저를 향해 웃어주었을 때, 제게 좋아한다고 말해주었을 때에야 겨우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제 손을 잡아준 클레어가 다시 도망치듯 달아나려는 순간 새까맣게 칠해진 세상에 원래의 색이 돌아왔다. 잃어버렸던 기억들을 되찾음과 동시에 그는 밀려드는 감정에 파도에 휩쓸려 다급히 손을 뻗었다.
눈앞에 있는데도 행여나 놓칠까 두려웠다. 돌아선 클레어의 손을 붙들고 그 자그마한 몸을 제 품에 힘껏 끌어안았다. 그제야 숨이 쉬어졌다. 다시는 손에 넣지 못할 거라 여겼던 존재가 제 품에 있었다. 어떻게 제게 이런 행운이 온 걸까 믿을 수 없었다. 벅차오르는 감정들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두 번 다시 놓치지 않을 거라 여겼다.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거라고, 내 곁에서 한 시도 떨어뜨려 놓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하지만.
―신이 내게 말한 조건은 두 가지였어요. 2황자 전하께 좋아한다고 말할 것. 그리고 똑같은 말을 전해 받을 것.
만약 그녀가 자신을 좋아했던 말들이, 겨우 닿았다고 여겼던 마음이, 전부 거짓이라면?
신이란 존재가 그녀에게 내기를 제안했고, 클레어는 살아남기 위해 그 내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클레어가 다시 살아 돌아와 준 것만으로도, 제 눈앞에서 무사히 살아 있는 그녀를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었다.
그러나 사람 마음이라는 게 어디 그렇던가. 하나를 가지면 다른 하나를 더 가지고 싶은 게 욕심일진대 오히려 겨우 손에 넣었던 하나마저 내어놓으라니, 억울하고 서러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만약, 정말 만약에…… 저를 향해 사랑을 고백해왔던 그녀의 마음이 거짓이라면. 신과의 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해야 했던 거라면?
‘그러면 나는…… 어떡하지?’
그때부터 레이몬드는 발밑이 꺼지는 듯한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였다. 당장이라도 클레어가 사실은 거짓말이었다고, 나는 당신이 아니라 리하르트 아델에게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면 어떡하나. 무서웠다.
간신히 제 품에 안은 그녀를 또다시 보내줘야 하는 걸까, 저를 외면하고 돌아서는 그녀의 뒷모습만 봐야 하는 걸까.
밑도 끝도 없이 저를 덮여오는 불안감에 레이몬드는 도망치고 싶었다. 미안함이 담긴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는 그녀를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클레어의 입에서 또다시 리하르트 아델의 이름이 나오게 되면, 그대로 무너져 그녀의 발목을 붙들게 될 것 같았다. 동정이라도 연민이라도 좋다고 곁에만 있어 달라고 울며 애원하게 될 것 같았다.
그리하면 마음이 여리고 약한 사람이니 제 곁에는 있어줄지도 모른다. 진정 사랑하는 이에게 돌아가지 못한 채 언제나 슬픈 얼굴로 제 곁에 남아줄 클레어를 떠올려보았다. 그리고 그 곁에서 그녀의 슬픈 눈동자를 못 본 척 외면하며 행복한 척 웃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최악이었다. 제 욕심을 위해 클레어의 마음을 무시하고 그녀의 발목에 저라는 족쇄를 채우고서 웃고 있는 스스로가 역겹고 끔찍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그렇게라도 클레어를 곁에 두면 좋겠다고, 최소한 레이몬드 자신만은 행복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 이기심이 그를 유혹해왔다. 구역질이 치밀었다.
그래서 레이몬드는 도망쳤다. 간신히 되찾은 그녀를 홀로 내버려둔 채 마법진을 핑계로 도망치고 말았다. 그녀에게 상처받고 싶지 않은 마음과 그녀를 상처입히고 싶지 않은 마음이 비겁한 자신을 기어이 도망치게 만들었다.
클레어에게서 자신을 떨어뜨려 놓은 뒤, 레이몬드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밀려드는 불안과 싸우며 자신의 행복과 그녀의 행복을 저울질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결국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것이나 다름없다. 애초에 레이몬드에게 클레어의 행복을 짓밟고 제 이기심을 채우겠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제 가슴을 열어 심장을 뜯어내는 기분으로 레이몬드는 스스로 답을 내렸다.
클레어가 진짜 자신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하지만 만약 그 반대라면.”
그래서 진정 사랑하는 이에게 돌아가고 싶다고 한다면.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아.”
그 후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신은 또다시 그녀를 보내줄 수밖에 없을 거라는 걸.
“그게 무슨 소리야?”
얌전히 레이몬드의 말을 기다리고 있던 유리의 눈동자에 사나운 빛이 깃들었다.
“그럼 언니가 리하르트 아델한테 간다 해도 안 붙잡겠다는 거야?”
흥분해 소리를 지른 그녀의 외침에 다른 마법사들의 시선이 단숨에 이쪽으로 몰려들었다. 웅성거리던 소음이 멎으며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렇지 않아도 불안했던 마음에 불을 지피는 레이몬드의 말에 유리는 화가 나서 머리가 어떻게 될 것 같았다.
그동안 자신이 두 사람을 이어주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데. 이제야 겨우 제가 바라는 결말에 근접해 왔다고 여겼는데. 이럴 순 없었다. 갑자기 미치기라도 한 건지 클레어에게 돌진해오는 저 리하르트 아델 따위에게 클레어를 빼앗길 순 없었다. 절대로.
저 쓰레기가 클레어를 어떻게 내쳤었는지, 원작에서 클레어가 저 자식 때문에 어떤 꼴을 당했으며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 유리는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설령 리하르트 아델과 이어지는 게 클레어 헤더에게는 더없이 행복한 결말이라 하더라도 유리는 절대 그걸 두고볼 마음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협조적으로 나와야 할 레이몬드가 저렇게 나오니, 유리로서는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클레어에게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고, 지금은 누구 봐도 그녀에게 사랑에 빠진 남자 그 자체면서도!
“아니, 저는 애초에 왜 헤더 영애가 전하께 마음이 없다고 전제를 두시는 건지 이해가 안 됩니다만.”
레이몬드의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로 씩씩대는 유리를 제치고 레스티아가 끼어들었다. 그가 무표정을 깨고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눈빛으로 레이몬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헤더 영애도 전하를 좋아한다고 했잖습니까?”
제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요, 그 대단한 고백 장면을 바로 눈앞에서 직관한 사람이 접니다. 주변을 의식해 뒷말은 애써 삼켰다.
“글쎄.”
레이몬드는 힘껏 쥐고 있던 손을 힘없이 늘어뜨렸다. 감정을 지운 무표정한 눈동자를 내리깐 채 그가 나직이 답했다.
“모르겠어.”
* * *
―날 좋아해 달라고 하는 게 아니야.
언제부턴가 가장 좋아하는 색은 붉은색이 되어있었다. 언젠가 딱 한 가지 보석을 가질 수 있다면, 붉은 핏빛의 루비를 갖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해가 질 무렵 붉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는 게 좁고 낡은 내 방에서의 유일한 낙이었다. 무심코 내 안에서 가장 좋아하는 색이 되고, 갖고 싶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게 느껴졌던 건.
전부 한 사람의 눈동자와 닮은 것들이었다.
무심하게 나를 바라봐주기만 해도 기뻤던, 그 눈동자 속에 내가 비치면 나도 모르게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언제까지고 나만이 비치기를 바랐던…… 붉은색의 아름다운 눈동자.
―그저 내 마음을 전하고 싶었어. 다시 한번. 그리고 보고 싶었어, 살아 있는 너를. 무사히 내 눈앞에 존재하는 너를.
그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며, 내게 사랑한다 말했다. 그걸 이제야 깨달았노라고, 오롯이 나만을 그 시야에 담은 채로 말했다.
한때는 그토록 바랐던 말이었다. 죽을 만큼 갖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이 사람을 가질 수만 있다면 내가 가진 전부를 포기할 수도 있다고 여길 만큼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나의 전부였고, 나는 그의 일부조차 되지 못한 존재였다.
그런데.
―고마워, 살아 있어 줘서.
지금은 그 사람이 마치 내가 전부인 것처럼 나를 바라보고, 내게 사랑을 속삭여왔다.
이유는 나도 알지 못한다. 어째서 그 사람이 이제 와서 나를 사랑하게 된 건지, 어째서 그토록 가슴 아프게 나를 원하는 눈을 하게 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긴 시간 고통 속에서 헤매던 눈동자에 비친 건 단 한 점의 거짓도 없는 진실뿐이었다. 그 눈동자마저도 거짓이라, 혹은 착각이라 말할 수 없었다.
리하르트 아델은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더는 그 사실을 부정하고 외면할 수는 없었다.
“형슈니이임.”
내 팔을 꼬옥 끌어안으며 자그마한 머리가 기대어오는 게 느껴졌다. 생각에 잠겨있다 놀란 시선을 내리자, 나를 올려다보고 있던 아기 천사가 활짝 미소 지었다.
“헤헤, 드디어 이쪽 봤다.”
세상의 모든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을 다 모아둔 존재가 있다면 이 아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내 팔을 끌어안은 채 나를 올려다보는 알렌 4황자가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가슴이 다 지끈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