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클레어 헤더의 해피엔딩을 위하여 (11)
아까 당한 게 있는지라, 살짝 거리를 두고 저를 쫓아오던 듀와 체드가 불안에 떨며 저를 바라보는 게 뒤통수에서도 느껴졌다.
유리는 뒤를 찌릿 노려보았다. 또다시 움찔하며 한 걸음 물러나는 두 사람이 리하르트 아델인 양 눈이 찢어져라 째려보다 훽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바로 앞에 보이는 건물로 성큼성큼 걸어가 이미 반쯤 열려있는 문을 일부러 발로 뻥 차냈다. 이리 오너라!를 외치며 폭군처럼 들어서자 안에 있던 마법사들이 놀란 눈으로 유리를 쳐다보았다.
“황녀 전하? 또 무슨 일이십니까.”
그 중 목각인형1이 제일 먼저 자신을 알아보며 말을 걸어왔다. 오늘은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왔느냐고 묻는 투였다. 목각인형1이란 레스티아 디어젠을 가리키는 것으로, 주로 유리 황녀 자신이나 성녀 아리아가 그의 뒷담을 할 때 쓰는 별명이었다.
유리는 레스티아를 싹 무시하고 지나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레이몬드를 발견했다.
“아, 둘째 오빠! 나 좀 봐!”
마법진 앞에 서서 다른 마법사들과 대화를 나누던 레이몬드가 유리를 돌아보았다.
“유리?”
유리는 마법진 주위를 빙 둘러싸고 선 마법사들을 밀쳐내고 꾸역꾸역 레이몬드 앞으로 다가갔다.
“억, 우악, 황녀 전하!”
유리에게 밀쳐진 마법사들이 괴상한 소리를 내며 항의 섞인 시선을 보내왔다. 물론 유리는 그들도 무시했다.
“오빠, 지금 마법진이 문제가 아니야!”
유리는 자신의 등장을 의아해하는 레이몬드의 팔을 붙들고 낑낑대며 잡아당겼다. 제 오라비를 꾸역꾸역 구석으로 끌고 가 다른 마법사들과 떨어뜨린 다음 유리가 답답함에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방금 리하르트 아델이 언니한테 어떻게 했는지 알아? 그 인간이……!”
“아델 공작이…… 뭐?”
한순간 싸늘하게 얼어붙은 금색 눈동자에 유리는 멈칫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오라버니의 차가운 표정에 당황해 유리는 잠시 어버버 허둥댔다.
“어, 아직 보고 못 받았구나.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그 인간이 우리가 언니랑 있는데 들이닥치더니 막 이렇게 어? 아련한 눈빛으로 언니 앞에 무릎 꿇고 언니보고 사랑하니 어쩌니 이랬어! 공작 나부랭이 주제에 황자의 약혼녀한테 손을 대? 미친 거 아니야? 완전 막 나가자는 거잖아 이거!”
말을 하다 보니 다시 깊은 분노가 단전에서부터 끓어올랐다. 유리는 과격하게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꽥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나 처음에 무섭게 가라앉은 표정을 보였던 것과 달리, 레이몬드의 반응이 어째 신통치 않았다. 당연히 화를 내거나, 하다못해 방금 그랬던 것처럼 무서울 만치 서늘한 얼굴로 분노하고 있다는 걸 드러내기라도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예상했던 반응이 하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무심하게 변한 눈동자가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담담한 빛을 띠어 유리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반응이 왜 이래? 빨리 오빠가 가서 한마디 해! 미친놈아, 내 아내 될 사람한테 뭔 짓거리냐, 뒤지고 싶냐고 해! 아니, 아예 저 인간 저기 셋째 오빠 있는데 보내버리자. 거기서 평생 못 나오게 해버리자. 미친놈 아냐 진짜? 아까도 허락도 없이 내 거처에 막 쳐들어왔어! 나 진짜 개놀랐다니까! 이번 일 절대 이대로 그냥 안 넘어갈 거야!”
“클레어는?”
“언니 지금 방에서 쉬고 있는데! 오빠 빨리 가봐. 내가 좀 느낌이 안 좋아서 그래. 빨리 가서 매력 어필 좀 해! 이제 절대 방해 안 할 테니까 아까처럼 막 손잡고 그윽하게 쳐다보고 그러라고!”
유리는 느긋하기만 한 레이몬드의 태도가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다시 팔을 붙들고 입구 쪽으로 끌고 가려 했으나, 아까는 순순히 잘만 따라와주던 레이몬드가 이번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당분간은 자리 못 비워. 네가 클레어 좀 잘 돌봐줘.”
“어어어어엉? 그게 뭔 소리야, 지금 언니가 돌아왔는데! 마법진이 중요해? 언니 옆에서 한 시도 안 떨어져야지! 저러다가 잘못해서 언니가 리하르트 아델에게 흔들리기라도 하면……!”
무심코 말을 내뱉던 유리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말이 씨가 된다고, 재수 없는 소린 꺼내기도 싫었다.
“아무튼 오빠는 지금 마법진이 문제가 아니라 언니 옆에 딱 붙어있어야 한다니까?”
“아뇨, 우선은 마법진입니다.”
윽, 유리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구기며 빈정 상한 얼굴을 했다.
역시나 빠지지 않고 끼어드시는구만. 레스티아 디어젠, 저 잔소리쟁이가.
“마력 무력화 마법진이 깨진 지금 황실 보안에 큰 구멍이 뚫린 거나 다름없는 상황입니다. 이 상황에서 원흉인 전하께서는 헤더 영애와 데이트나 즐기실 때가 아닙니다.”
“아니, 이 사람아! 지금은 이쪽이 더 중요하다고! 어쩌면 중대한 기로에 섰을지도 모른단 말이다!”
레스티아가 끼어들어 방해를 놓자 유리가 성난 오우거처럼 제 가슴을 쳤다. 물론 레스티아는 익숙하다는 표정으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아뇨, 어떻게 봐도 이쪽이 더 중요합니다. 황실의 안위보다 중요한 건 없습니다.”
“야, 우리 둘째 오빠가 언니한테 차이면 네가 책임질 거냐고!”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하께서 차이실 리가 없잖습니까. 그 반대면 모를…….”
있을 수도 없는 일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불쾌하다는 듯한 반응을 보이던 레스티아가 멈칫했다. 한 박자 늦게 멜린트 영지에서의 일이 떠오른 탓이었다. 제 주군의 눈앞에서 리하르트 아델과 함께 등을 돌리던 클레어 헤더의 뒷모습을 떠올린 레스티아가 입을 꾹 다물었다.
처음으로 레스티아의 말문을 막히게 만들었으나 유리는 우위를 점한 기쁨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 얘긴 뭐야? 오빠가 알렌한테 언니랑 결혼 안 한다 그랬어?”
불안함에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던 유리가 “아, 맞다!”를 외치더니 따지듯 레이몬드에게 물었다. 왜 그딴 소릴 했느냐고 묻는 비난의 눈빛도 함께 발사되었다.
레스티아도 의외의 말을 들었다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레이몬드를 바라보았다.
비난과 의문 어린 시선이 동시에 날아들자, 레이몬드는 무표정한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 가만히 내리고 있던 손을 힘주어 움켜쥐고서 거기에 시선을 둔 채 입을 열었다.
“난 클레어가 날 좋아해주기만 한다면 뭐든 할 거야.”
클레어의 이름을 언급한 순간, 서늘한 빛을 띠던 금색 눈동자에 아주 잠깐 따스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어째서 알렌에게 클레어와 결혼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인지에 대한 변명이나 해명이 아닌, 혼잣말에 가까운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클레어와 나 사이를 방해하는 게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무슨 짓을 해서라도 제거할 생각이야. 설령 그 존재가 신이라 해도 용납하지 않아. 클레어가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도 상처도 받지 않고 무사히 내게 걸어올 길을 만들어둬야 하니까. 그 과정에서 내가 얼마나 고통받고 망가진다 해도 반드시 그렇게 만들 준비가 되어있어.”
레이몬드는 스스로가 지닌 힘의 크기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영역에 발을 내디뎌 신의 반열에 가까운 힘을 손에 넣은 천재. 세상 모든 마법사들로부터 경외 받는 마탑의 주인이며, 전 대륙의 영웅이자 구원자. 세계를 멸망으로 이끌 「문」의 존재가 나타났음에도 이 세계가 지금껏 버티고 있는 건 그가 지닌 힘이 막대한 영향력을 차지하고 있었다.
무한에 가까운 방대한 마력과 그것을 담을 완벽한 그릇. 하나의 영지 전체에 거대한 결계를 펼칠 수 있는 힘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문」과 근접한 땅들은 이미 오래전에 폐허가 되었을 테니까. 어쩌면 그 이상으로 나아가 더 많은 땅들이 마물들에게 짓밟혔을지도 모른다.
제국의 황자가 아닌 마탑의 주인으로서 네 개의 바다에 거대한 결계를 세웠을 때부터 그의 존재는 신이 보낸 사자로서 각광받았다.
그래서 자만했던 거다. 지킬 수 있다고, 제가 곁에 있는 한 이제 무엇도 그녀를 다치게 할 수 없다고. 오만하게 제 힘을 과신하고서, 클레어가 자신을 밀어낸 순간 스스로 그 역할을 포기하고 물러나 버렸다.
하찮은 질투 따위에 미친 자신이 술에 취해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나쁜 꿈을 꾸고 있는 거라 생각했다.
그녀에게 거절당한 제 마음이 죽을 만큼 괴로워서, 서럽고 아파서, 그래서 끔찍하게 나쁜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누군가에 의해 결계 밖으로 밀려난 그녀가 마물에게 잡아먹혔다고 했다. 마물은 한입에 그녀를 집어삼키고 다시 「문」으로 되돌아갔다고 했다. 그리고 그 모든 걸 리하르트 아델이 직접 목도했다고 했다.
레이몬드는 어쩌면 이건 꿈이 아니라 리하르트 아델이 일부러 그녀를 감추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직접 영주성의 가장 구석진 방에 가둬진 리하르트 아델을 찾아갔다.
황실 소속 기사인 부하 한 명을 거의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간 탓이라 들었다. 그 부하가 클레어를 결계 밖으로 밀어낸 범인이라는 사실도 들었다. 어차피 정식으로 재판을 받아 평생 감옥에서 썩게 되거나 처형당할 인간을 상대로 굳이 제 손을 더럽힌 게 잘못이라면 잘못일 터였다.
아마 레이몬드 자신이었어도 같은 상황이었다면 리하르트 아델과 똑같이 행동했을 테지만.
제가 왔음에도 넋이 나간 얼굴로 침대 끝에 걸터앉아있는 리하르트 아델을 마주한 순간, 레이몬드는 후회했다. 절망과 분노로 얼룩진 눈동자를 마주하자마자 리하르트 아델이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클레어가 죽었다.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성을 잃은 머리가 제일 먼저 하기 시작한 건 사실을 부정하는 것부터였다.
클레어는 죽지 않았다. 되찾아야 했다. 중앙 정원의 연못 근처에서 다리를 다쳐 주저앉아 있었을 때처럼, 깨진 액자와 유리 한가운데서 피를 쏟고 있었을 때처럼, 잠긴 문 너머로 눈물을 흘리며 떨고 있었을 때처럼.
지금도 두려움에 떨며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 빨리 안전한 곳으로 그녀를 데려와서 눈물을 닦아주고 더는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줘야 했다.
레이몬드는 결계를 지나 「문」으로 향했다. 제게 달려드는 마물들을 터뜨리고 부수고 으깨어 바다를 검붉은 피로 물들이고, 자신 또한 온통 검붉게 물든 채 「문」의 근처까지 접근하는데 성공했다.
아마 그대로 「문」의 안쪽에 들어서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았을 터다.
―2황자 전하.
클레어의 것이 분명한 목소리가 저를 부르지만 않았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