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클레어 헤더의 해피엔딩을 위하여 (10)
머리 끝까지 화가 났다는 걸 알려주듯 유리 황녀가 새된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문가에 서서 이도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 기사들에게도 그녀의 분노가 미쳤다.
“다들 지금 뭐 해? 구경났어? 빨리 이 미친놈 안 끌어내고 뭐 하냐고!”
에이든 헤더가 나를 때리는 모습을 목격했을 때보다 더 화가 난 듯 길길이 날뛰는 유리 황녀를 보며 나는 안절부절못했다. 저러다 진짜 쓰러지진 않을까 싶을 정도로 시뻘게진 얼굴이며 숨을 몰아쉬는 모습이 걱정스러웠다.
유리 황녀를 진정시키려 몸을 트는데, 리하르트 아델이 내 손을 당겨 다시 저를 보게 만들었다.
“날 좋아해 달라고 하는 게 아니야.”
유리 황녀의 명령에 문가에 서 있던 기사들이 다급히 다가오는 걸 알고, 그가 빠르게 말했다.
“그저 내 마음을 전하고 싶었어. 다시 한번. 그리고 보고 싶었어, 살아 있는 너를. 무사히 내 눈앞에 존재하는 너를.”
피하지도 못하게 손을 붙든 채 내 눈을 보며 흔들림 없는 시선을 마주해왔다.
“고마워, 살아 있어 줘서.”
유리 황녀와 다른 이들을 의식한 듯 한껏 낮아진 목소리는 아마 나밖에 듣지 못했을 것이다.
“단장님, 그만 가시죠.”
“이건 경위서로 끝날 일이 아니라고요, 진짜.”
마지막 말을 끝으로 그의 등 뒤로 다가온 기사들이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말했다. 리하르트 아델은 의외로 순순히 내 손을 놓고 물러났다. 부하들에게 끌려나가는 우스운 꼴은 보이고 싶지 않은지 그는 담백하게 물러나 먼저 문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제 볼 일은 다 봤다는 듯이.
사과 한마디 없이 그냥 나가버리는 상관을 쩔쩔매며 지켜보던 기사들이 대신 유리 황녀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황실 기사단의 부기사단장인 체스터 윌리엄입니다. 저희 단장님의 무례를 고개 숙여 사죄드립니다. 죄송합니다, 황녀 전하. 4황자 전하. 그리고 레이디 헤더.”
“아, 됐고! 꼴도 보기 싫으니까 빨리 싹 다 여기서 나가. 그리고 두 번 다시 저 인간이 언니 근처에도 못 오게 해. 한 번만 더 이런 일 있으면 진짜 저거 죽이고 나도 죽을 거야. 명심해.”
“예, 명심하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황녀 전하.”
리하르트 아델이 나간 문가를 돌아보며 이를 갈던 유리 황녀가 축객령을 내리자, 기사들이 재차 허리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우르르 방을 빠져나갔다.
소리 없이 방문이 닫히고, 다시 나와 유리 황녀, 알렌 4황자 셋만 남게 되었다. 그제야 유리 황녀는 조금 분이 가셨는지 굳어있던 표정을 풀고 투덜거렸다.
“하,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상관이 일 저지르고 부하들이 사과하러 오는 건 또 살다 살다 처음 보네. 뭐 저런 미친놈이 다 있어, 진짜.”
귓가를 파고드는 유리 황녀의 신경질적인 목소리에도 나는 멍하니 닫힌 문만 바라보았다.
―고마워, 살아 있어 줘서.
리하르트 아델이 마지막으로 내게 남기고 가버린 말이, 계속 머릿속에 남아 맴돌았다.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내 손을 잡은 채, 나만을 똑바로 응시해오던 붉은 눈동자가 머릿속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처음 그 사람과 만났던 날. 바닥을 나뒹구는 에이든 헤더를 거칠게 차내고 내게 다가온 그가 “괜찮아?:하고 물었던 그 순간의 기억만큼 내 가슴에 아주 깊이 박혀 드는 느낌이 났다. 평생 잊지 못할 그 기억과 같은 크기로 내 안에 깊이 아주 깊숙이.
내가 원치 않더라도, 그렇게.
“언니?”
“형슈님?”
닫힌 문을 응시하는 내 시야로 사랑스러운 두 사람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대답 없는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알렌 4황자와 어딘가 못마땅한 기색이 가득한 유리 황녀를 마주한 나는 당황해 허둥댔다.
“네? 아, 죄송해요. 뭐라고 하셨죠?”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알렌, 잠깐 빠져봐. 언니!”
유리 황녀가 해맑게 대답하는 알렌 4황자의 얼굴을 무자비하게 손으로 밀어냈다. 대뜸 내 양쪽 어깨를 척하니 붙들어오는 유리 황녀의 박력에 밀린 나는 소심하게 네, 하고 대답했다.
“저 미친 또라이가 갑자기 왜 저래요? 뭘 잘못 먹었나? 왜 갑자기 언니를 사랑하니 마니 이딴 개소릴 해요? 혹시 언니 저 인간하고 멜린트 영지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숨도 쉬지 않고 질문을 다다다 내뱉은 유리 황녀가 대답을 재촉하듯 내 어깨를 짤짤 흔들었다. 나는 유리 황녀가 흔드는 대로 무력하게 흔들리다 시선을 떨어뜨렸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데 나도 뭐라고 해야 할지 잘 알 수가 없었다.
“그게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그런 대답밖에 내어놓질 못했다.
“저 사람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아는 그 사람이 아닌 것 같아서 혼란스러웠다. 내게 마음 한 조각 주지 않았던 시절의 모습과도, 멜린트 영지에서 내게 장난스럽게 좋아한다고 말하던 그 모습과도, 너무도 달랐다.
내가 아는 리하르트 아델이, 내가 모르는 그 사람이,
“아니었던 모양이에요.”
마음을 어지럽혔다.
* * *
짜증이 났다. 아니, 짜증이 났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속이 부글부글 끓고, 손가락 하나 하나에 가시가 걸린 듯 거슬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유리는 일부러 발소리를 쾅쾅 내며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뒤따르던 호위기사인 듀와 체드가 “그러시면 나중에 발목이랑 무릎 망가져서 고생하십니다.”라는 둥 쓸데없는 참견을 해왔다.
활화산처럼 끓던 분노가 엄한 곳을 향했다. 그거 지금 내가 노년에 발목이랑 무릎 망가져서 고생하라고 악담하는 거냐, 나한테 악담할 시간도 있고 아주 한가한가 보다, 슬란테아로 보내 줄까.
유리는 온갖 트집을 잡아 두 사람에게 분풀이를 해댄 후 다시 목적지를 향해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둘이 그때 클레어 언니가 황성을 못 떠나게 붙잡았으면 일이 이렇게 꼬이진 않았겠지. 언니가 내 곁을 떠나는 일도, 멜린트 영지로 가서 돌아오지 않는 일도, 그곳에서 마물에게 잡아먹히는 일도 없었겠지.
유리는 1년 전, 클레어 헤더가 죽었다는 사실을 처음 들었을 때를 돌이켜보았다. 제가 아무리 원작을 비틀고 바꿔봐도 결국은 클레어 헤더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사실에 자책하고 절망했었다. 죽을 용기도 없으면서 그녀를 따라 죽고 싶다는 마음도 들었었다.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무력하게 앉아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었다. 어정쩡하게 원작 이야기를 건드려서 괜히 그녀를 더 고통스럽게 만든 걸 죽을 만큼 후회했었다.
원작대로라면 그녀의 존재 자체도 몰랐을 알렌 4황자와 카롤리나 황후가 슬퍼하며 눈물을 보였을 때 생각보다 더 일이 잘못 됐음을 느꼈다. 그리고 서브남주인 레이몬드 알렉 카지스가 처참하게 망가져 갔을 때야말로 정말 이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자신이 엉망으로 만들어놓은 이야기가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그 안에서 멀쩡히 살아숨쉬던 인물들을 어떻게 망가뜨려 놓았는지를 똑바로 마주하게 된 순간부터 온몸을 짓누르는 죄책감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건 공작 각하의 탓이 아니었잖아요.
―당신이 죄책감을 느낄 일이 아니에요.
클레어 헤더가 리하르트 아델에게 해주었던 말은 유리 자신이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죄책감을 느낀 게 아니야.
―멍청하게도 그 순간이 되어서야 널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뿐이지.
이제 와서, 이제 와서, 이제 와서! 그딴 개소릴 지껄이는 미친 자식이 아니라, 그건 유리 자신이 들었어야 할 말이었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클레어 헤더가 돌아왔고, 그녀를 통해 처음으로 신은지의 흔적을 찾아냈다. 신은지와 관련된, 잊고 있던 기억들을 전부 되찾은 데다 어쩌면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도 생겼다.
원래라면 지금은 클레어 헤더가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왔음에 순수하게 기뻐하고 있을 때였다. 그녀와의 감동적인 재회의 시간을 보낸 뒤, 천천히 신은지에 대한 얘기도 물어볼 계획이었다.
그런데 저 빌어먹을 리하르트 아델 때문에 자신의 계획이 전부 어그러지는 느낌이었다.
리하르트 아델이 끔찍하게 싫은 유리 자신마저도 그 순간만큼은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클레어 헤더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보이며 너를 사랑했노라 말하는 리하르트 아델은 빌어먹게도 가슴 설렜다. 유리 자신도 이렇게 느꼈을진대 당사자인 클레어 헤더는 어떻겠는가.
리하르트 아델은 원작에서 그녀가 죽음을 각오했을 만큼 사랑했던 남자였다. 어쩔 수 없이 마음을 접었던 상대가 저런 식으로 너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면 흔들리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유리는 넋이 나간 듯 리하르트 아델이 사라진 방향만 응시하던 클레어 헤더를 떠올렸다. 자신이 말을 걸어도 계속 헛도는 대답만 하고 생각에 잠긴 그녀의 모습이 유리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저 미친놈이 갑자기 왜 저러는 거야. 성녀랑 사이좋게 잘 사귀기나 할 것이지, 갑자기 헤어지고 난리더니. 멜린트 영지에서 그동안 뭔 일이 있었던 거냐고. 성녀 안에 있는 그 인간도 둘 사이에 뭔 일이 있었던 건지는 정확히 모르겠다는 식이었고……. 생각하니까 또 짜증나네. 애초에 그 자식이 언니한테 쓸데없는 소릴 해서 언니가 갑자기 날 떠났던 거잖아?’
클레어 헤더가 사라지고 난 뒤 같이 울고불고 난리를 치다 요즘은 그래도 제법 친해진 성녀 아리아를 떠올리며 유리가 이를 박박 갈았다. 그때는 진짜 클레어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모든 걸 포기했기 때문이었다.
비슷한 처지라고 뒤늦게나마 친하게 지낼 게 아니라 머리채를 잡았어야 했는데. 후회가 됐다.
어떡하지, 설마 이러다 진짜 클레어 헤더가 리하르트 아델에게 가버리는 건 아니겠지?
그렇지 않아도 또 원작을 멋대로 바꿨다는 이유로 신은지가 클레어 헤더에게 해코지를 하진 않을까 불안한 상태였다. 마물에게 잡아 먹힌 걸로 이야기 속에서 영원히 퇴장시킬 수도 있었던 클레어 헤더를 어째서 무사히 돌려보냈는지도 알 수 없다.
클레어 헤더를 통해 자신과 성녀에게 뭔가 전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 걸까. 신은지는 왜 우리를 이 세계로 불러들인 걸까. 그리고 앞으로 우리를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머리가 아픈 와중에 리하르트 아델이 상황을 더 골치 아프게 만들어버렸다.
불안한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결국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모습이 순간 머릿속에 그려졌다.
“아아악! 절대 안 돼!”
유리는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다 돌연 움직임을 멈추고 눈을 번뜩였다.
‘그동안 내가 레이몬드 알렉 카지스와 클레어 헤더를 이어주려고 얼마나 피똥 싸는 노력을 했는데.’
이대로 손 놓고 있다가 그걸 전부 수포로 돌아가게 만들 수는 없었다.
‘일단은 리하르트 아델부터 처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