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클레어 헤더의 해피엔딩을 위하여 (9)
“형슈님도 알렌 웃겨요?”
제 누님의 말에 알렌 4황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게 물어왔다. 나는 내 팔을 꼭 안은 채 커다란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는 알렌 4황자를 세상 무엇보다 사랑스러운 존재를 보듯 바라보며 답했다.
“알렌님은 세상에서 제일 멋있어요.”
“형슈님은 세상에서 제일 예뻐요!”
별 것도 아닌 내 말에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환하게 웃는 존재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여전히 아기 천사처럼 사랑스러운 알렌 4황자는 1년 사이에 키가 많이 자랐고, 젖살이 조금 빠져서 전보다 얼굴선이 뚜렷해져 있었다. 유리 황녀도 예전에는 정말 그저 예쁘장한 여자아이 같았다면, 열일곱 살이 된 지금은 외모가 더 화려해지고 제법 레이디 티가 나는 느낌이었다.
나는 1년이라는 시간 동안 두 사람의 성장을 지켜보지 못한 걸 아쉬워하며 두 사람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저기 있잖아요, 알렌은 형슈님 좋아요. 형슈님도 알렌 좋아해요?”
눈을 마주해오며 우물쭈물하기에 무슨 말을 하려는가 싶었다. 알렌 4황자가 수줍게 던져온 질문에 나는 짧게 웃음을 터뜨리며 답했다.
“너무 너무 좋아해요.”
“그럼 알렌하고 결혼해요!”
그러나 이어진 기대에 찬 외침에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려야 했다. 유리 황녀도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알렌 4황자를 바라보는 게 보였다.
“야, 미친. 너 지금 그게 뭔 소리야.”
잠깐 정적이 흐르다 유리 황녀가 그 표정 그대로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좋아하는 사람끼리는 결혼하는 거랬어요!”
알렌 4황자도 지지 않고 해맑게 말을 받아쳤다.
“야야야, 언니는 둘째 오빠꺼거든? 너 둘째 오빠가 무섭지도 않아? 아니, 애초에 지금도 네 입으로 형슈님이라고 부르고 있잖아!”
혹시 형수님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부르는 거 아냐, 얘? 유리 황녀가 미심쩍은 눈으로 알렌 4황자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둘째 형님은 형슈님하고 결혼 안 한댔어요!”
멈칫.
알렌 4황자가 당당하게 외친 말에 나는 입가에 머물던 어색한 미소를 스르륵 지워냈다. 힐끔 내 눈치를 살피던 유리 황녀가 알렌 4황자의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뜨리며 언성을 높였다.
“무, 뭐, 얘가 뭔 소릴 하는 거야, 지금! 둘째 오빠가 언제 그랬어! 언니 사라지고 나서 그 오빠가 제일 힘들어했는데! 아까도 못 봤어, 너? 둘째 오빠가 계속 언니 혼자 독차지하려는 거, 좋아죽겠다는 눈으로 언니만 쳐다보는 거!”
“그치만 그때 분명히 그랬단 말이에요. 형슈님은 둘째 형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랑 결혼한댔어.”
유리 황녀가 저를 윽박지르자 서러운 듯 알렌 4황자가 울상이 된 얼굴로 말했다. 그러고는 유리 황녀의 손을 피해 다시 내 팔을 끌어안으며 간절한 눈빛을 보내왔다.
“형슈님 다른 사람이랑 하지 말고, 알렌이랑 해요. 알렌은 형슈님이 정말 좋아요.”
뭐가 어떻게 된 걸까 알 수가 없었다. 알렌 4황자가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고,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거기다 유리 황녀도 무척 당황한 듯 어버버 입만 벙긋거리고 있는 모습이 더욱 내 불안을 가중시켰다.
―어차피 이제 곧 다 끝날 일이야.
그 순간 머리를 스친 건, 슬란테아를 떠나오던 날 로이안트 3황자가 했던 말들이었다.
―앞으로 짧게는 3일, 멀게는 봄이 올 때까지만 기다리면 돼. 그럼 다 정리가 될 테니까.
그때는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고, 수도로 빨리 가야 한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그에 대해 특별히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땐 그쪽도 정리할 수밖에 없게 될 테지.
하지만 지금 와 생각해 보니 로이안트 3황자가 나를 가리키며 했던 의미심장한 말들을 그냥 넘겨선 안 될 것 같았다.
혹시 그때 로이안트 3황자가 했던 말들이 지금 알렌 4황자가 내게 한 말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찰나였다.
“안 됩니다, 2황자 전하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들이지 말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왠지 문밖이 시끄러웠다. 문 앞에 있던 기사들과 누군가가 몸싸움이라도 벌이는 건지 우당탕탕 들려오는 소음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유리 황녀와 알렌 4황자도 놀란 얼굴로 내 팔에 안겨왔다. 나는 두 사람을 끌어안은 채로 낑낑대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부디 돌아가 주십시오. 이러시면 저희뿐만 아니라…… 단장님!”
콰앙! 문이 부서지는 소리를 내며 거칠게 열렸다. 발밑에 쓰러져 신음하는 기사들을 뒤로한 채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문을 지나 방 안으로 들어섰다.
헉, 허억. 숨을 몰아쉬던 상대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생각지도 못한 이가 불쑥 눈앞에 나타나자, 당황한 나는 믿기지 않는 눈을 깜빡이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예전보다 훨씬 짧게 자른 머리칼과 메마르고 날카로워진 얼굴이 낯설긴 했지만, 그는 분명 리하르트 아델이었다.
“뭐, 뭐야? 지금 누, 누구 허락 맡고 함부로 들어오는 거……!”
유리 황녀도 그를 알아본 듯 뒤늦게 허세를 부리며 빽 소리를 질렀으나, 어딘가 심상치 않은 그의 기세에 눌려 살짝 겁이 나는 표정이었다.
저벅저벅. 느리지만 똑바로 우리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오는 그의 발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진짜……였어.”
리하르트 아델은 무표정한 얼굴로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천천히 다가왔다. 저 사람이 갑자기 왜 저렇게 난폭하게 밀고 들어와 내 앞에 나타난 건지 알 수 없어 불안했다. 나는 긴장한 얼굴로 유리 황녀와 알렌 4황자를 내 등 뒤로 감췄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다가와 선 리하르트 아델이 몸을 숙였다. 내 앞에 무릎을 꿇은 그의 이마가 내 무릎에 살며시 닿았다.
“살아 있었구나…….”
피하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그에게 닿아있던 나는 순간 얼어붙었다. 고개를 숙인 그의 얼굴에서 투명한 물방울이 툭 떨어져 바닥을 적시는 걸 보았기 때문이었다.
“살아, 있었어.”
윽, 울음을 참아내는 신음에 섞여 다 쉬어버린 목소리가 반복해서 내뱉는 말은 그뿐이었다. 지독한 고통과 슬픔에 집어 삼켜진 간절함과 같은.
* * *
“뭐, 뭐뭐뭐뭐야? 뭐야! 뭐냐고 진짜!”
멍하니 고개 숙인 리하르트 아델의 짧은 머리칼을 내려다보고 있던 나는 유리 황녀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다, 당신 아델 공작이지! 지금 이게 뭔 무례한 행동이야!”
유리 황녀는 잔뜩 화가 나 씩씩거리며 침대 위에서 발을 쾅쾅 굴렸다.
“언젠가 만나면 가만 안 두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어?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는 건 곤란하다고! 다, 당장 여기서 나가!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오는 거야!”
유리 황녀가 삿대질과 함께 소리를 질러대도 리하르트 아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유리 황녀에게 진정하라는 말도, 리하르트 아델을 밀어내지도 못한 채 나는 그런 둘 사이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솔직히 나도 왜 그가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원래 이렇게까지 막무가내인 사람이었던가? 아니, 왜 이렇게 억지로 여기까지 온 거지?
“공작 각하.”
여러모로 혼란스러웠지만, 그래도 이 상황을 내가 어떻게든 하긴 해야 할 것 같아 나는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움찔, 숨소리조차 내지 않던 리하르트 아델의 어깨가 작게 떨렸다.
“계속 네가 사라지질 않았어.”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내 눈앞에서 마물에게 집어삼켜졌던 네가, 내게 손을 뻗었던 네가…… 내내 사라지질 않았어.”
슬픔도 원망도 아닌, 그저 지치고 지쳐서 저를 괴롭히는 감정들에도 무뎌져 버린 듯한 목소리였다.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무슨 짓을 해도, 심지어는 꿈속에서조차도 네가 사라지질 않았어.”
마치 내게 용서라도 구하는 것처럼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그를, 지금 내가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분명 리하르트 아델이 맞는데, 마치 다른 사람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처럼 낯선 기분이었다.
한 번도 상상조차 해본 적 없었다. 내 앞에서 나로 인해 눈물을 보이며 괴로워하는 이 사람을 보게 되는 상황은.
“널 구하지 못한 그 순간을 단 한 순간도 후회하지 않은 적이 없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떠오른 건, 마물에게 집어삼켜지기 직전 마주했던 이 사람의 존재였다. 필사적으로 내게 달려오던 그가 떠올랐다. 이 사람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하듯 손을 뻗었던 나 자신도.
“단 한 순간도.”
나는 그걸로 끝이었지만, 이 사람에게는 그게 아니었겠지. 눈앞에서 알고 지냈던 이가 끔찍한 형태로 죽은 것이다. 유일하게 상대를 구해줄 수 있었던 자기 자신의 앞에서.
난 간신히 지금 상황을 이해했다. 모르는 이가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을 본다 해도 충격을 받아 트라우마로 남을 만한 기억인데, 한때는 자신의 곁에 두었던 사람이 제 눈앞에서 그렇게 죽어버린 것이다. 당연히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고 오랜 시간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터다.
내가 바란 것도 아니고, 이 사람이 바란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결국 이 사람에게 오랜 시간 상처와 고통으로 남아버린 일이었다.
리하르트 아델과 내가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든,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사람에게 짙은 연민의 감정을 느꼈다.
“그건 공작 각하의 탓이 아니었잖아요.”
나는 머뭇거리던 손을 들어 리하르트 아델의 짧아진 머리카락 끝을 쓰다듬듯 조심스레 매만졌다.
“당신이 죄책감을 느낄 일이 아니에요.”
“죄책감을 느낀 게 아니야.”
바닥에 힘없이 늘어져 있던 손이 뻗어와 그의 머리카락에 닿았던 내 손을 잡아챘다. 갑자기 손이 붙들려 움찔하며 손을 물리려 했지만, 그가 오히려 더 강한 힘으로 붙들어왔다.
천천히 고개를 든 붉은 눈동자가 똑바로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멍청하게도 그 순간이 되어서야 널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뿐이지.”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하고 생각했다. 사랑한다니? 당신이 나를?
왜? 라는 물음이 먼저 떠올랐다. 이해할 수 없었다. 더는 눈물도, 망설임도 없이 올곧게 응시해오는 시선이 무섭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피할 수도, 눈을 깜빡일 수조차 없었다. 나는 이 사람이 두려워졌다. 잠시만 방심해도 그 눈동자에 온전히 잡아먹힐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유리 황녀가 낸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싸늘한 음성이 날아들었다.
퍼억! 커다란 베개가 리하르트 아델의 팔에 부딪힌 뒤 바닥에 떨어졌다.
“이제 와서 뭔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어, 이 개자식아! 네가 뭔데 우리 언니더러 그딴 소릴 해! 나가, 당장 여기서 나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