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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클레어 헤더의 해피엔딩을 위하여 (8) (117/152)

06. 클레어 헤더의 해피엔딩을 위하여 (8)

“레스티아 경, 먼저 가서 탑에 연락을 부탁하지.”

“알겠습니다. 너무 늦지 마십시오.”

아마 레이몬드 2황자도 어렵지 않게 레스티아 경의 구겨진 왼쪽 눈썹을 발견한 듯했다. 레이몬드 2황자가 자세를 바로한 뒤 짧게 명령하자, 레스티아 경이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숙여 답하곤 얼른 자리를 떴다.

북적거리던 방 안에 갑자기 둘만 남겨지게 됐다. 다른 사람들이 함께 있을 땐 딱히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막상 둘만 남겨지자 분위기가 조금 어색했다. 나는 무의식중에 아직까지 붙잡고 있던 레이몬드 2황자의 팔을 슬며시 놓았다.

“이제 안 붙잡아도 돼요?”

“네?”

콩. 레이몬드 2황자가 내가 놓은 손을 다시 잡아 오며 아까처럼 고개를 숙여 머리를 맞대어왔다. 바로 코앞에 있는 눈이 돌아갈 만큼 아름다운 얼굴을 두고서, 나는 허둥대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나는 심장이 떨려서 숨도 제대로 못 쉴 지경이건만, 레이몬드 2황자는 태연히 근사한 미소를 흘리며 속삭이듯 말을 걸어왔다.

“클레어가 안 잡아주면 나 또 데르카샤 해로 갈지도 몰라요.”

멈칫.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리던 나는 이어진 그의 말에 당황해 움직임을 멈췄다. 지나치게 근사한 이 사람의 미소에 가슴이 떨려서 죽을 것 같은 건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레이몬드 2황자가 정말 또다시 혼자 마물들로 득실거리는 바다로 갈까봐 불안해진 나는 쩔쩔매며 말했다.

“어, 그럼 안 되는데……. 하, 하지만 제가 계속 잡고 있으면 전하께서도 불편하지 않을까요? 차라리 제가 계속 쫓아다니면서 전하를 지켜보면 어떨까요? 아니, 그건 또 그거대로 불편하실 것 같은데, 어떻게 좋은 방법이 없을…….”

흡, 하고 애써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묘하게 낯설지 않은 소리였다. 나는 진지하게 내 생각을 털어놓던 걸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예상대로 레이몬드 2황자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린 채 한 손으로 입을 막고 있는 게 보였다.

누가 봐도 웃음을 참는 게 분명한 그 모습에 나는 하려던 말을 잊고 멍하니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런 내 시선을 느낀 듯 레이몬드 2황자가 아직 웃음기가 가득 남은 얼굴로 내게 사과해왔다.

“미안, 농담이에요. 클레어가 가지 말라고 붙잡아 주는 게 너무 기분 좋아서.”

아, 농담이구나.

나는 그제야 그가 내게 장난처럼 농담을 건넨 것뿐이라는 걸 알았다.

부끄러워. 농담도 못 알아듣고 혼자 진지하게 뭐한 거람.

인간관계가 한없이 좁고 얕은 내 소통 능력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 같아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클레어.”

뺨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져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감싸는데, 조금 전과 달리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고개를 들자, 목소리만큼이나 어둡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쓸쓸한 미소를 머금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까 유리 녀석에게 방해를 받았었는데.”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떨어뜨려 표정을 감추는 모습도 이상하긴 마찬가지였다. 방금 전만 해도 내게 농담을 하기도 하고 사람 가슴 떨리게 웃기도 잘 웃었던 그였다. 갑자기 착 가라앉은 분위기가 의아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의식을 잃기 전에 나와 했던 대화들, 내게 했던 말들 기억해요?”

그러고 보니 눈을 뜨고 처음으로 대화를 하게 됐을 때도 똑같은 질문을 받았던 기억이 났다. 그의 말대로 유리 황녀에게 곧바로 방해를 받아서 대답 같은 걸 할 틈은 없었지만.

“네.”

막상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며 내 입으로 대답을 하려고 하니 조금 쑥스러웠다. 레이몬드 2황자를 따라 나도 괜히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시선을 떨어뜨리며 짧게 네, 하고 대답한 게 다였다.

그런데 내 대답을 끝으로 더는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뒤에 뭔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레이몬드 2황자가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켰기 때문이었다.

왜 이렇게 갑자기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걸까, 내가 뭘 또 잘못한 걸까. 이번에도 역시 스스로의 소통 능력 부족을 절감하며 레이몬드 2황자의 표정만 살필 때였다.

“날 좋아한다고 말했던 것…… 진심이에요?”

힘겹게, 정말 힘겹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끊어질 듯 위태로운 음성이 귓가에 닿았다.

“리하르트 아델이 아니라, 나인 거 맞아요?”

겨우 다시 시선이 마주쳤다고 생각한 찰나, 더없이 불안하게 흔들리는 금색 눈동자가 애원하듯 나를 응시해왔다.

“혹시 그 내기…….”

꼬르르르륵-.

노골적인 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우며 울렸다.

순간 머릿속의 사고가 정지했다.

예전에도 분명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 있었던 걸 기억해낸 나는 얼굴이 터질 것처럼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다급히 배를 감싸 안았다.

그 상태로 풀썩 쪼그려 앉으니 머리 위에서 레이몬드 2황자가 푸핫! 웃음을 터뜨리는 게 들렸다.

“그러고 보니 어제 점심 이후로 아무것도 못 먹었겠네요.”

레이몬드 2황자가 웃음을 멈추지 못하는 상태로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시선을 맞춰왔다. 웃음기 가득한 그의 말에 그제야 내가 꼬박 반나절을 넘게 자고 일어난 상태라는 걸 다시 한 번 자각했다.

“바로 식사를 들이라고 할게요.”

부끄러움에 고개도 못 드는 나를 달래듯 레이몬드 2황자가 다정하게 말했다. 내가 쭈뼛대며 고개를 들자 그가 내 팔을 아프지 않게 붙잡고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워주었다.

“아마 유리와 알렌이 깨면 다시 득달같이 달려올 거예요. 피곤하겠지만 조금 상대해줘요.”

헝클어진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다정하게 웃는 얼굴도 어느새 평소와 똑같이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나는…… 사고를 조금 크게 쳐서, 잠깐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계속 유리 녀석에게 시달려서 피곤할 텐데 쉬고 있어요.”

“저, 2황자 전하.”

이대로 훌쩍 방을 나가버릴 것만 같은 레이몬드 2황자의 태도에 당황해 그의 옷깃을 붙잡으려는 순간이었다. 잡고 있던 내 팔을 자기 쪽으로 당긴 레이몬드 2황자의 입술이 내 이마에 살며시 닿았다 떨어졌다. 덕분에 나는 하려던 말을 까맣게 잊고 굳어선 멍하니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애써 웃으며 시선을 마주해오는 금색 눈동자가 다시 아까처럼 쓸쓸한 빛을 띠고 있었다. 어딘가 안도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 이상으로 불안해하는 것 같기도 한 눈이었다.

“클레어도 같이 데려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으니까……. 이거 꼭 하고 있어요. 절대 몸에서 떼놓지 마요.”

달각하고 손목에 뭔가 채워지는 느낌이 났다. 익숙한 촉감에 고개를 내려보니 예전에도 한 번 레이몬드 2황자가 내게 주었던 아티펙트 팔찌였다.

“금방 다녀올게요.”

팔찌를 채워준 뒤 내 손을 놓고 돌아서서 방을 나가버린 레이몬드 2황자의 뒷모습이 계속 눈에 밟혔다.

분명 서로 마음이 통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이제 더는 저 사람이 상처받거나 괴로워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째서일까. 내 마음을 감춘 채 레이몬드 2황자의 고백을 거절했을 때처럼 마음이 무겁고 찜찜한 기분이었다.

아마 그가 리하르트 아델이 아니라 정말 내가 맞느냐고 물었을 때, 내가 곧바로 대답하지 못한 게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필 그때 그래서는…….’

나는 제 기능에 충실한 내 몸을 원망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레이몬드 2황자가 돌아오면, 이번에는 한 번 더 확실하게 대답하리라 다짐했다. 더는 리하르트 아델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내가 사랑하는 건 당신, 레이몬드 알렉 카지스 뿐이라고.

* * *

“언니이이이이이!”

“형슈니이이이임!”

레이몬드 2황자의 예상은 적중했다. 시녀들이 가져다준 음식들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잠깐 혼자 쉬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신은지라는 이름을 지닌 이 세계의 신을 어떻게 다시 만나야 할까 고민하고 있을 즈음. 문이 벌컥 열리며 입가에 침 자국이 남은 유리 황녀와 머리에 새집이 진 알렌 4황자가 두다다 달려왔다.

온몸으로 달려드는 두 사람의 몸을 버티지 못하고 뒤로 넘어간 나는 에구구 작게 신음을 흘렸다. 테이블 의자가 아니라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던 게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눈을 떴는데 언니가 안 보여서 혹시 내가 또 꿈을 꾼 게 아닌가 생각했어요.”

내 품에 얼굴을 묻은 유리 황녀가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세히 듣지 않으면 알아 듣기 힘들 정도로 자그마한 웅얼거림이라, 나는 조용히 유리 황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매일 매일 매일 꿈을 꿨어요. 언니가 무사히 돌아오는 꿈을요. 다친 곳 하나 없이 돌아와서 나랑 알렌을 꼬옥 안아주는 꿈이요. 언니가 마물에 잡아먹혔던 건 아델 공작이 언니를 감춰두려고 지어낸 거짓말이라고 하면서요. 그럼 나랑 알렌은 펑펑 울면서도 기뻐하고, 예전처럼 셋이서 같이 맛있는 걸 먹고, 웃으면서 대화하고, 밤에는 한 침대에서 끌어안고 잠드는 거예요.”

아까는 미처 듣지 못했던 이야기를 들려주는 유리 황녀의 목소리에 물기가 서렸다. 나를 힘껏 끌어안는 유리 황녀의 팔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 진짜 잠에서 깨고 나면 언니가 없었어요. 그게 너무 서러워서 엉엉 울고 있으면 다들 이제 언니는 없다고 했어요. 언니가 죽었다고,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미워 죽을 것 같았어.”

“알렌은 형슈님 계속 기다렸어요. 누님과 알렌에게 돌아와 줄 거라고 믿고 기다렸어요.”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한 유리 황녀를 따라 알렌 4황자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말했다.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오랜 시간 슬퍼했을 두 사람을 생각하면 짠하고 마음이 아팠다. 그래도 역시 나를 위해 눈물을 흘려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어쩔 수 없이 기쁘고 감동적인 일이었다.

나도, 유리 황녀와 알렌 4황자도. 서로를 잃고서 흘려보낸 시간을 어떻게 보상할 수 있을까. 어떻게 위로와 감사의 말을 전해야 할까. 내 품에 안긴 두 사람을 마주 끌어안으며 행복한 고민에 잠겼다.

가만히 내 품에 안겨 있던 유리 황녀가 눈가가 빨개진 채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알렌 4황자를 향해 흥 코웃음을 쳤다.

“믿고 기다렸다는 것치고는 알렌 너도 나만큼 서럽게 울어댔던 거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데?”

“알렌 울었지만 형슈님 기다렸어요!”

“말은 잘해요. 그런데 언니, 얘 웃기지 않아요? 똑똑한 게 이제 발음도 거의 다 정확하게 하면서 형수님만 꼭 형슈님이라고 발음해요.”

어두워진 분위기에 책임감을 느끼는 건지, 유리 황녀가 평소처럼 밝아진 어조로 말했다. 제가 언제 울었냐는 듯 소매로 콧물을 슥 닦는 모습도 씩씩하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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