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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클레어 헤더의 해피엔딩을 위하여 (7) (116/152)

06. 클레어 헤더의 해피엔딩을 위하여 (7)

“그런 게 아니야. 절대 아니야. 난, 나는…….”

“그땐 진심이 아니었어.”

횡설수설하는 유리 황녀의 불안정한 목소리 위로 성녀 아리아의 덤덤한 목소리가 겹쳐졌다.

“진짜 그 애가 싫었던 게 아니야. 그날 했던 말 중에 진심은 하나도 없었어. 전부 분풀이였어. 그 앤 아무 잘못 없어. 그냥 병신 같은 내가 다 잘못한 거야.”

시선을 내리깐 채 무표정하게 말을 잇는 성녀 아리아의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받아주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그냥 들어주기라도 했으면 좋겠어.”

별다른 표정이 드러나지 않아서, 얼핏 보면 그저 차분하고 평온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유리 황녀보다 먼저 눈물을 보인 건 성녀 아리아 쪽이었다.

“미안하다고, 상처 줘서 미안하다고. 내가 잘못했으니까 무사히 돌아와주기만 하라고.”

무표정한 뺨 위로 눈물 한줄기가 타고 흘러내렸다. 엉엉 소리내어 우는 것보다 더 서글프고 아프게 느껴지는 눈물이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양 담담하게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내는 모습도 그랬고.

“나도, 나도 진심이 아니었어.”

성녀 아리아를 조용히 지켜보며 훌쩍거리던 유리 황녀도 자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일부러 은지를 상처 주거나 배신하려는 게 아니었어. 내가 바보여서, 쓸데없는 자존심 세우고 허세 부리느라 그런 것뿐이야.”

소매로 흐르는 눈물을 꾹꾹 눌러닦으며 말을 잇다 허탈한 웃음을 흘리기도 했다.

“나 진짜 이상해. 어떻게 신은지를 잊고 있었을 수가 있지. 둘째 오빠 욕할 자격도 없네.”

“누님…….”

애써 눈물을 참아보던 유리 황녀가 양손에 얼굴을 묻으며 울음을 터뜨리자, 알렌 4황자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유리 황녀의 등을 토닥였다.

유리 황녀는 다가온 제 동생을 꼬옥 끌어안고서 어린아이처럼 소리내어 울었다. 성녀 아리아는 눈물을 흘리는 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지, 아예 반대편으로 몸을 돌린 채 등을 보이고 섰다.

유리 황녀의 울음 소리만 가득한 공간에서 나는 불안하게 주위를 살폈다. 이상할 정도로 잠잠했다. 아까 일을 생각하면 분명 어디선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뜻일 터인데, 두 사람이 이렇게까지 말했음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마치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다시 화를 내든, 혹은 모두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든, 뭐든 반응이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짐작과 달리 상대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나는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내가 잘못 생각한 걸까. 방금 유리가 깨진 것도 그냥 우연일 뿐인 걸까. 뭐가 정답인지 고민하는 사이 한참을 울다 지쳐 잠든 유리 황녀와 알렌 4황자가 유모의 품에 안겨 나갔다. 레이몬드 2황자가 두 사람 다 밤새 잠든 내 곁을 지키느라 한숨도 자지 못했다는 사실을 넌지시 알려주었다.

“헤더 영애가 어떻게 은지를 알고 있는 건지 물어봐도 될까요?”

다시 내 앞으로 가까이 다가온 성녀 아리아가 잠긴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조금 전까진 몰랐는데, 가까이서 본 그녀의 눈동자에 희미하게 두려운 기색이 내비쳤다.

당연한가 싶었다. 성녀 아리아는 처음부터 신은지라는 신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사람이 정한 이야기의 틀을 벗어나려 하면 어떤 형식으로든 보복을 받게 된다는 사실도. 실제로 누구보다 더 죽음에 가까운 형태로 단죄받기도 했고.

지금 성녀 아리아는 힘겹게 두려움을 이겨내고 내게 다가와 묻고 있는 거였다. 나는 그 마음을 이해하고 그동안 내가 겪었던 일들을, 신은지라는 소녀를 만났던 기억들을 차분히 되짚어 말해주었다.

마물에게 잡아먹힌 뒤 「문」의 안쪽에서 눈을 뜬 순간부터, 작고 가냘픈 여자애의 모습을 한 신의 존재를 만난 것, 그리고 그 애와 나눴던 대화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말해주었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레이몬드 2황자가 그런 내 손을 깍지 껴 잡아왔다. 내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왠지 내 손을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 붙잡힌 손이 조금 아프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움찔하며 아파하는 걸 알고는 재빨리 손에서 힘을 풀어주어서 괜찮았다.

“그럼 지금도 우리 얘길 듣고 있을지도,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거네요.”

모든 이야기를 듣고난 뒤에 성녀 아리아가 기운 없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얘기해줘서 고마워요. 지금은 저도 혼란스러워서, 혼자 생각을 좀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생각이 많은 표정이었다. 내게 고맙다고 말한 성녀 아리아는 뭐라고 붙잡을 틈도 없이 그대로 방을 나가버렸다. 축 처진 어깨와 슬퍼 보이는 뒷모습이 눈에 밟혔다. 성녀 아리아의 가녀린 겉모습과 달리 그 속에 든 이가 사실은 키도 덩치도 훨씬 커다란 남자라는 걸 알고서도 그랬다.

성녀 아리아도 정말 신은지라는 소녀를 가족으로서 좋아하고 아껴왔고, 한순간의 실수로 소중히 쌓아온 관계를 전부 무너뜨린 거라면, 그래서 지금까지도 서로 상처받고 아파하고 있는 거라면…….

“크흠.”

낮은 헛기침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바로 옆에 있는 레이몬드 2황자를 올려다보았으나, 그는 이미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가니 레스티아 경이 문가에 서서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무심코 그에게 「아직 거기 있었어요?」라는 의미의 시선을 보냈고, 레스티아 경은 내게 「네, 계속 있었습니다. 아무도 제 존재를 신경 쓰지 않았지만요.」라고 말하는 듯한 시선을 보내왔다.

왠지 말을 하지 않고 눈빛만으로 레스티아 경과 의사소통이 된 듯한 느낌이라, 지난 이틀간 함께 마차를 타고온 시간이 그리 헛되진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저로서는 상황이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만, 일단 마법진 복구가 우선입니다. 제가 먼저 가서 다른 마법사들을 소집해두겠습니다. 전하께서도 적당히 대화를 마무리하고 최대한 빨리 와주십시오.”

‘아.’

레스티아 경의 굳은 표정을 응시하던 나는 내가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레스티아 경!”

나는 다급히 레스티아 경의 앞으로 다가가 외쳤다.

“「핵」이 있어요!”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간 나로 인해 레스티아 경이 당황스러워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나는 마음이 바빠 말까지 더듬어가며 내가 알고 있는 걸 전하여 애썼다.

“「문」의 안쪽에 있는 「핵」을 파괴하기만 하면 더는 마물들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을 거예요!”

“……예?”

갑자기 너무 두서없이 말을 전한 탓인지, 레스티아 경이 무슨 소린지 도통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 순간 갑자기 우리 사이에 손 하나가 슥 끼어들었다. 뭔가 하고 시선을 돌리니 레이몬드 2황자가 자연스럽게 나와 레스티아 경의 거리를 벌리고 내 옆에 와 섰다.

내가 뭘 잘못했나? 그 행동의 의미를 몰라 의아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레이몬드 2황자가 다정한 얼굴로 시선을 맞춰왔다.

“클레어, 그 얘길 더 자세히.”

다행히 레스티아 경 대신 레이몬드 2황자가 내 말에 귀를 기울여주었다. 나는 어떻게든 두 사람이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을 전해야 한다는 강박에 휩싸여 초조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까 「문」의 너머로 가야 해요. 전부 연결되어있으니까 어디든 상관은 없어요. 「문」의 안쪽에 붉은색의 거대한 「핵」이 있어요. 그걸 파괴하기만 하면 마물들이 이쪽 세상으로 넘어올 수 없다고 했어요. 마물들은 그 「핵」을 통해 이쪽 세계로 넘어오고, 다시 각각의 「문」을 통해 세상에 나타나 혼란을 초래하는 거예요.”

“그게 무슨…… 아니, 헤더 영애께서 그걸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레스티아 경으로부터 의심과 불신이 뒤섞인 눈빛이 날아들었다. 나는 이걸 어떻게 증명해야 좋을지 고민하다 그냥 떠오르는 대로 솔직하게 답했다.

“신을 만났어요. 「문」의 안쪽에서. 나와 약속했어요. 「문」에 접근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핵」을 파괴하기만 하면 더는 마물이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 정말이에요.”

“그 약속이란 게, 아까 성녀 아리아에게 말했던 내기와 관련된 건가요?”

“맞아요! 내가 이겼으니까 약속대로 「핵」을…….”

레이몬드 2황자가 내 말을 헛소리 취급하지 않고 진지하게 들어주는 것 같아 기뻤다. 하지만 말을 하다 보니 걸리는 게 있었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 애가 나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겠다는 식으로 말했던 기억이 뒤늦게 떠오른 탓이었다.

어떡하지. 괜히 나 때문에 또 누군가가 다치기만 하고, 「핵」을 없애지도 못하게 되면…….

갑자기 말끝을 흐리며 머뭇거리는 내게 두 사람의 어리둥절한 시선이 닿았다.

“클레어?”

“아니, 아니에요. 사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 사람이 약속을 지켜줄지 자신이 없어요.”

혹시라도 당장 두 사람이 「문」에 가진 않을까. 두려워진 나는 다급히 말을 정정하고는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확실하지도 않은 얘기로 혼란스럽게 해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아니, 괜찮아요. 클레어를 못 믿는다거나 클레어를 탓할 생각 같은 건 전혀 없으니 신경 쓰지 마요.”

“어차피 저는 처음부터 영애의 말을 크게 귀담아듣지도 않았으니 괜찮습니다.”

“그게 지금 위로야, 레스티아 경?”

“제 딴엔 그런 의미였습니다.”

시무룩해져 있는 나를 위함인지 두 사람이 무거워진 분위기를 가볍게 넘겨주었다.

“어쨌든 헤더 영애의 말이 사실이라고 쳐도 「문」의 너머로 가야 한다니, 과연 그게 가능할지 의문이군요. 전하께서도 결국 가까이 접근하는 것조차 실패하셨던 터라.”

거기다 레스티아 경이 의외로 내 말을 완전히 무시하지 않고 진지하게 고심하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그에 레이몬드 2황자도 생각에 잠긴 얼굴로 답했다.

“그래도 한 번 시도해볼 가치는 있을 것 같은데.”

“설마 또 전하께서 단신으로 가시려는 건 아니겠죠.”

레스티아 경의 의심과 힐난 섞인 시선이 날아들었으나, 레이몬드 2황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못 들은 척 시선을 피하는 모습이 꼭 같은 일을 반복할 것만 같은 느낌이라 불안해졌다. 나는 양손으로 레이몬드 2황자의 팔을 힘껏 붙잡고서 고개를 저었다.

“그, 그건 절대 안 돼요. 또 다치시면 어떡해요.”

절대 아무데도 보내지 않겠다는 듯 내가 힘주어 팔을 붙들자, 레이몬드 2황자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다 눈동자를 길게 휘었다.

“안 그럴게요. 계속 클레어 옆에만 있을까요?”

그리고 왠지 기분이 무척 좋아진 듯 웃으며 고개를 숙여 이마를 맞부딪쳐왔다.

“크흠흠.”

불만과 짜증이 뒤섞인 헛기침 소리가 재차 울렸다. 레스티아 경이 무표정하게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내 눈에는 아주 미세하게 구겨진 왼쪽 눈썹이 보였다. 지금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다는 의미 같았다. 그 차이를 알아본 게 왠지 조금 뿌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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