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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클레어 헤더의 해피엔딩을 위하여 (6) (115/152)

06. 클레어 헤더의 해피엔딩을 위하여 (6)

“저 때문에 그렇게 다치신 거였군요.”

그렇게 묻는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괜히 또 눈물을 보이기 싫어서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려 했는데, 막을 새도 없이 눈가에 물기가 차올랐다.

그런 나를 바라보던 레이몬드 2황자가 잠시 떨어졌던 손을 다시 붙잡아왔다. 그리고 똑바로 시선을 맞춰오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클레어. 전부 어리석고 미련한 내 탓이었습니다. 절대 클레어의 탓이 아니에요.”

콕콕.

레이몬드 2황자와 금세라도 울 것 같은 눈동자로 서로를 응시하고 있는데, 누군가 내 팔을 콕콕 조심스럽게 찔러왔다. 뭔가 하고 보니 어느새 반대편으로 걸어온 알렌 4황자가 내 옆에 앉아 순진무구한 시선을 던져왔다.

“그래서 그때 형님이 머리도 크게 다쳐서 형슈님을 기억 못 했어요! 다른 건 전부 기억하는데 형슈님만 까맣게 잊어버렸어요!”

“알렌.”

레이몬드 2황자가 화가 난 듯 낮은 음성으로 이름을 불렀다. 제 형님의 서늘한 시선을 마주한 알렌 4황자가 움찔하며 내 팔 뒤에 숨었다.

형님이 화가 난 것 같긴 한데,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는 듯 동그랗게 뜬 눈동자가 안쓰러웠다. 유리 황녀도 지금은 슬쩍 눈치를 살피며 침묵을 지켰다.

레이몬드 2황자도 알렌 4황자의 그 사랑스러운 눈망울 앞에서 더 화를 낼 기운은 없는 듯했다. 그가 또 한 번 한숨을 짧게 내쉬고는 내 눈을 피해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맞아요, 그래서 그때 클레어를 알아보지 못한 겁니다.”

그러면서도 내 손을 빈틈없이 붙잡는 손길에서 옅은 불안이 전해져 왔다.

“부디 날 용서해줘요.”

아름다운 금색 눈동자가 애처롭게 흔들리며 내게 용서를 구해왔다.

“너무 괴로워서, 당신이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이 죽을 만큼 고통스러워서, 그래서 그랬던 것 같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죽어버릴 것 같으니, 머리가 멋대로 당신을 잃어버린 거겠지.”

혹시라도 내게서 손을 뿌리쳐질까 힘껏 손을 붙잡고 있으면서도, 초조하게 변명하듯 말을 잇고 있으면서도, 내 표정을 확인하기가 두려운 듯 눈을 마주쳐오지는 않았다.

“그래도 지금은 오히려 그게 다행이었다고 생각해요. 잠시라도 당신을 잊지 못했다면 정말 죽어버렸을지도 모르니까. 그랬다면 지금 이렇게 클레어와 다시 재회하지도 못했겠죠.”

레이몬드 2황자가 괴로운 얼굴로 눈을 감으며 내 손등에 제 이마를 기댔다.

“지금의 이 기적을 신께, 세상 모든 존재들에게 감사해.”

결국 내 손등 위로 눈물 하나가 툭 떨어졌다.

“이렇게 다시 당신을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뻐서 죽을 것 같아.”

나는 천천히 손을 뻗어 레이몬드 2황자의 뺨을 만졌다. 그런 내 움직임에 레이몬드 2황자가 고개를 들었다. 금색 눈동자에서 흘러내린 투명한 눈물이 뺨을 타고 턱 끝에 맺혔다. 눈물을 흘리는 그 모습조차도 지독하게 근사해서, 나는 홀린 듯이 그 눈물을 닦아주며 물었다.

“왜 이렇게 말랐어요. 식사는 제대로 하고 계신 거예요?”

“그러는 클레어는요.”

레이몬드 2황자가 내 손에 제 뺨을 기대오며 슬프게 미소 지었다.

“저기, 정말 죄송하지만.”

도저히 못 견디겠다는 듯 떨떠름한 목소리가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레이몬드 2황자의 표정에 또다시 불쾌한 기색이 스쳤다.

“지금 두 분만 계신 게 아니니 그런 건 나중에 하시면 안 될까요.”

무의식중에 레이몬드 2황자 외에 다른 이들은 까맣게 잊고 있던 나는 당황해 시선을 들었다. 성녀 아리아가 침대에서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 앉아 지루한 얼굴로 이쪽을 향해 응시하고 있었다.

“그보다 저는 마물에 잡아먹혔던 헤더 영애가 어떻게 이렇게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건지가 궁금한데요. 레스티아 경도 그 부분에 대하선 전혀 들은 부분이 없다고 하고.”

마지막에 보았을 때와 달리 무사한 그녀의 모습에 새삼 감격하고 있던 나는 네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내게 몰려드는 걸 알았다. 레이몬드 2황자도 굳이 입밖으로 내어 말하진 않았지만 무척 궁금한 모양이었다.

나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다 멈칫했다.

“대신 셋째 오빠가 우리 언니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는 다 들었지. 로이안트 반셀 카지스, 절대 가만 안 둔다. 일단 그 예쁜 머리털을 다 뽑아서 빗자루로 만든 다음에…….”

“유리님, 그리고 재현님.”

내가 사랑하는 이들과 재회한 것에 기뻐 잠시 잊고 있던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나는 유리 황녀의 말을 끊으면서까지 다급히 두 사람의 이름을 외쳤다. 재현이라는 이름을 들을 때는 쉬워보였는데 이상하게 내가 말하려고 하니 생각보다 발음이 어려워 조금 허둥댔다.

“뭐야, 헤더 영애가 어떻게 그 이름을…….”

유리 황녀는 갑자기 제 이름을 부르니 단순히 의아한 얼굴이었지만, 성녀 아리아는 유령이라도 본 듯 경악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제가 하는 말이 이상하게 들리실 수도 있지만.”

나는 성녀 아리아의 반응을 살피며 초조하게 말을 이었다.

“혹시 신은지라는 이름을 알고 계시나요?”

이번엔 유리 황녀로부터도 반응이 있었다.

“두 분은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

움찔하며 표정을 굳힌 유리 황녀의 눈동자를 확인하고 진짜 묻고 싶은 걸 입 밖으로 내려는 순간이었다.

파직, 하고 뭔가 무서지는 듯한 소리가 귓가를 스치더니 한순간에 방 안에 있던 유리창이 전부 깨졌다.

꺄아악! 유리 황녀와 알렌 4황자의 비명이 방안을 울렸다.

“클레어!”

반사적으로 두 사람을 돌아보려했으나 레이몬드 2황자가 내 몸을 힘껏 감싸 안는 바람에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우우웅. 우리가 있는 공간뿐만 아니라 황성 전체가 진동하는 듯한 기묘한 울림이 느껴졌다.

레이몬드 2황자의 가슴에 폭 안겨있던 나는 살짝 겁에 질린 눈을 들어 주위를 바라보았다. 제일 먼저 유리 황녀와 알렌 4황자의 안위를 확인하니, 다행히 둘 다 성녀 아리아의 품에 안긴 채 다친 곳 없이 무사한 모습이었다.

“……젠장.”

작게 안도의 숨을 내쉬던 나는 나직이 욕설을 내뱉는 레이몬드 2황자의 음성에 놀란 눈을 깜빡였다.

눈동자를 움직여 그가 응시하는 방향을 바라보니 깨진 유리 파편들이 금빛에 감싸인 채 허공에 멈춰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기이한 광경에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하지만 레이몬드 2황자는 그 상황이 그리 달갑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는 한 팔로는 나를 끌어안고서 다른 손으로는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동시에 허공에 떠올라있던 파편들이 후두둑 바닥에 떨어져내렸다.

“클레어, 괜찮아요?”

레이몬드 2황자는 어딘가 무척 지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나를 안았던 팔을 스륵 풀어주었다. 괜찮다고 했음에도 한참을 내가 다친 곳은 없는지 이리저리 확인하는 눈동자가 바빴다.

“어, 오, 오빠. 지금 마법 쓴 거지?”

조금 전의 일로 크게 놀란 듯 두 팔로 머리를 감싸쥔 유리 황녀가 레이몬드 2황자를 향해 물었다.

“마법진 어떡해? 방금 그걸로 다 박살난 거지?”

유리 황녀가 말까지 더듬으며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이 뭔가 일이 잘못돼도 크게 잘못된 느낌이었다. 레이몬드 2황자도 굳은 표정으로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타다다닥!

굳게 닫힌 문 너머로 여럿이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익숙한 목소리도 들려왔다.

“전하, 레스티아입니다! 지금 황성 내부의 마법진들이……!”

유리창이 전부 깨지고 부서진 창가를 돌아보던 레이몬드 2황자가 몸을 돌려 문가로 걸어갔다. 아직 상황 파악도 제대로 못하고 있던 나는 얼떨결에 그에게 손을 붙잡힌 채로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전……!”

“알아, 내 탓이야. 그러니 진정해.”

문이 열리자마자 레이몬드 2황자 옆에 붙어서있는 나를 보고 멈칫하는 레스티아 경에게 그가 한숨처럼 말했다. 일이 무척 귀찮게 됐다는 듯 레이몬드 2황자가 머리를 쓸어넘기며 혀를 찼다.

“내 실수야. 너무 놀라서 반사적으로 진을 깨뜨리고 실드부터 걸었어.”

“아니, 어쩌다가 전하께서 그런…….”

애매하게 말끝을 흐린 레스티아 경의 시선이 다시 내게로 옮겨왔다. 혹시 또 당신 때문이 아니냐고 묻는 듯한 그 시선에 살짝 위축이 된 찰나, 레이몬드 2황자가 내 손을 당겨 자기 등 뒤로 슬쩍 감췄다.

“클레어는 상관없어. 그냥 내가 잘못한 거야. 순간 또 잃게 될까 봐 무서워서… 지나치게 몸을 사렸어.”

그럼 역시 헤더 영애의 잘못도 아예 없진 않은 것 같다고 말하는 듯한 시선이 날아들었지만, 레이몬드 2황자가 깨끗이 무시해버렸다.

“어떡하실 겁니까, 이거. 복구까지 앞으로 대체 얼마나 시간을 들여야 할지……. 가뜩이나 네번째 「문」 때문에 인력이 부족한 판국인데.”

생각보다 일이 더 심각한 듯 레스티아 경이 한탄하며 말했다. 평소엔 무서울 정도로 표정이 없는 사람이 저러니 더 일의 심각성이 크게 와닿았다.

레스티아 경이 네번째 「문」에 대해 말한 순간, 나는 굳은 눈동자로 뒤를 돌아보았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유리 황녀와 알렌 4황자의 등 뒤로 깨진 유리조각들이 널려 있는 게 보였다.

바람이 세게 불었다고 해서 유리가 저렇게 깨질리는 없고, 무언가 유리를 깨뜨릴 만한 게 날아온 것도 아니다. 갑자기 이유도 없이 유리가 왜 깨진 걸까. 뒤늦게 위화감을 느낀 나는 설마 하는 표정으로 창가를 바라보았다.

만약 지금 레이몬드 2황자가 없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또다시 내 소중한 사람들이 다칠 뻔하지 않았나.

더는 다치게 하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나랑 약속했으면서. 또다시.

울컥 하고 치미는 감정에 나는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방해하지 않겠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마치 눈앞에 신의 존재가 있는 것처럼 텅 빈 허공을 향해 화를 내며 소리쳤다. 놀란 눈으로 나를 돌아보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이 보기엔 내가 미친 사람처럼 보일 거라는 걸 알지만, 개의치않고 씩씩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

“약속 지켜요! 내가 이겼으니까 방해하지 마요!”

“클레어?”

나는 아예 레이몬드 2황자의 손을 벗어나 유리 황녀와 성녀 아리아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솔직하게 말해줘요, 두 분은 신은지라는 이름의 소녀를 어떻게 생각하나요?”

놀란 눈만 깜빡이며 나를 응시해오는 두 사람의 손을 덥썩 붙잡았다. 그 사람이 이번에는 또 어떤 식으로 방해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은 채로 나는 두 사람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물었다.

“정말 싫어하나요? 그 사람이 귀찮고 성가셔서 그렇게 냉정히 외면하고 내쳤나요? 그전까지 함께 웃으며 사이좋게 지냈던 날들도 전부 가식이고 거짓일 뿐이었나요?”

“아니야”

“절대 아니야!”

두 사람으로부터 동시에 대답이 터져나왔다. 쫓기는 사람처럼 다급히 외치고는 각자 정반대의 얼굴을 했다. 유리 황녀는 금세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었고, 성녀 아리아는 화가난 사람처럼 붉어진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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