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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클레어 헤더의 해피엔딩을 위하여 (5) (114/152)

06. 클레어 헤더의 해피엔딩을 위하여 (5)

“……클레어?”

누군가 내 왼손을 붙잡고 있는 감각과 함께 레이몬드 2황자의 떨리는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마치 그게 열쇠가 된 것처럼 그제야 눈꺼풀이 움직였다.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었던 탓인지, 한순간에 너무 많은 빛이 시야에 들어오자 눈을 뜨고도 잠시 앞이 제대로 보이질 않았다. 한 번, 두 번, 눈을 깜빡여 천천히 시야를 확보하는 중이었다.

“형슈님?”

“헤더 영애?”

겨우 시야가 돌아올 즈음, 눈앞에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온 얼굴들이 보였다.

그새 많이 커버렸는지 조금은 낯설고, 여전히 천사처럼 사랑스러운 알렌 4황자. 그렇지 않아도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뜬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성녀 아리아. 그리고 금세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레이몬드 2황자까지.

왠지 마지막에 봤을 때보다 조금 더 야윈 듯한 레이몬드 2황자의 얼굴에서 시선이 멈췄다. 아름다운 금색 눈동자 밑으로 짙게 드리워진 그림자며, 날카로워진 턱선과 메마른 입술이 안타까우면서도, 초췌해진 그 모습조차도 근사해서 나도 모르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래서 처음 눈을 떴을 때부터 계속 내 손을 붙잡고 있었던 손이 레이몬드 2황자의 것이라는 사실도 뒤늦게 알아챘다. 혹시 내가 잠든 사이에도 계속 이러고 있었던 걸까, 작은 호기심이 삐죽 고개를 내미는 순간이었다.

“언니!”

갑자기 누워있는 내 위로 유리 황녀의 자그마한 몸이 와락 안겨 들어왔다. 그러나 깜짝 놀란 내가 뭘 어떻게 할 새도 없이 유리 황녀는 레이몬드 2황자의 손에 의해 달랑 들어 올려져 침대 밑으로 끌어 내려졌다.

“커으억!”

옷이 당겨지면서 목이 졸린 듯 괴로운 소리를 내던 유리 황녀가 슬쩍 레이몬드 2황자의 눈치를 살폈다.

“나, 난…… 언니가 반가워서…….”

서늘한 눈으로 저를 노려보는 오라버니의 시선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유리 황녀의 모습이 내 눈에는 무척 귀여웠지만, 레이몬드 2황자에겐 전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레이몬드 2황자가 당장 주먹으로 저 자그마한 머리를 꿍 쥐어박을 듯한 기세여서, 나는 얼른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쥐어짜듯 말하자, 방 안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다시 내게 향했다.

“어, 언니. 괜찮아요? 나 누군지 아, 알아보겠어요?”

제일 먼저 내 옆자리를 다시 확보하고 손을 잡아온 건 레이몬드 2황자였지만, 제 오라버니의 눈치를 보면서도 먼저 말을 걸어온 건 유리 황녀였다.

초조한 듯 말까지 더듬는 유리 황녀의 불안한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에 나는 기쁜 마음을 담아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려 했다. 하지만 막상 그립고 또 그리웠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하자 아무렇지 않게 웃을 수가 없었다. 네, 하는 짧은 대답조차 꺼내질 못했다.

눈가가 뜨거워지면서 눈물이 났다. 참고 어떻게든 웃어보려 했지만 얼굴이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지기만 했다.

“어, 어, 왜, 왜요? 언니 어디 아파요? 왜, 왜 우는-.”

“형슈님 왜 울어요? 아파서 그래요?”

“얘가 방금 뛰어든 데가 아픈 거 아니야?”

“헉, 어, 어떻게 해. 나 진짜 바본가? 신관, 신관 불러야 돼. 아니, 신관 여기 있네! 빨리 치료해줘! 성력! 성력 써!”

“비켜 봐, 이 진상아! 나중에 너한테만 따로 돈 받을 테니까 그렇게 알아둬.”

“빨리 우리 형슈님 안 아프게 치료해줘!”

“아, 알았어요. 알았어. 꼬맹이 황자 전하도 이리 나와 계세요.”

나 진짜 돌아왔구나. 정말 돌아온 거구나.

드디어 이곳으로. 그토록 돌아오고 싶었고, 그토록 바랐던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곁으로.

그 사실을 자각하면서, 참았던 눈물이 터져버렸다. 부끄럽게도 아이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울어버렸다.

말없이 내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서 다른 손으로는 내 눈물을 닦아주는 레이몬드 2황자의 다정함이 좋았다. 우는 나를 보며 곤란한 얼굴로 쩔쩔매는 성녀 아리아도, 냉큼 옆으로 다가와 내 팔을 토닥여주는 알렌 4황자도, 같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다시 나를 와락 끌어안는 유리 황녀도.

다들 너무 그립고 소중해서,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그동안의 괴로웠던 기억들과 나를 힘들게 했던 모든 것들이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위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이제야 전부를 보상받고,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하고 위로를 받는 기분이었다.

두 번 다시 놓치고 싶지 않은 행복의 중심에서, 나는 레이몬드 2황자의 손을 꼬옥 마주 잡았다.

“저 다녀왔어요.”

그리고 언제가 정말 나의 집이라고 부를 만한 장소가 생긴다면 꼭 해보고 싶었던 말을 내뱉으며,

“정말 보고 싶었어요.”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그 어느 때보다도 밝게 미소 지었다.

* * *

“유리.”

유리 황녀, 알렌 4황자와 서로 꼬옥 끌어안은 채 한차례 눈물을 잔뜩 쏟고 난 뒤였다.

한동안 우리는 서로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자꾸 눈물이 나서, 잘 지냈는지 어디 아픈 곳은 없었는지 같은 흔한 안부 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계속 울기만 했다.

겨우 진정이 될 즈음에는 유리 황녀와 알렌 4황자로부터 질문 세례를 받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거냐, 정말 아픈 곳은 없냐, 또 어지럽진 않냐로 시작해서 너무너무 보고 싶었다는 말과 함께 다시 눈물의 포옹이 이어지길 한참이었다.

아마 그간의 사정은 레스티아 경으로부터 미리 전해 들은 듯, 유리 황녀가 로이안트 3황자를 언급할 때 이를 부드득 부드득 가는 모습은 조금 걱정스러웠다. 제가 나중에 알아서 처리할게요, 라고 말하던 유리 황녀의 눈동자가 너무나 진심이었기 때문이었다.

로이안트 3황자가 정말 유리 황녀의 저 가녀린 주먹에 맞아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살짝 아주 살짝 들었다.

유리를 불렀던 레이몬드 2황자가 알렌을 이어 불렀다.

“그리고 알렌.”

“어?”

“우웅?”

내 양쪽 팔에 매달리다시피 안겨있던 유리 황녀와 알렌 4황자의 몸이 붕 떠올랐다. 셋 다 놀란 토끼 눈이 되어 어리둥절해하는데, 레이몬드 2황자가 그대로 두 사람을 달랑 들어 올려 침대 옆에 내려놓았다.

마지막엔 이제 그만 가보라는 듯 슬쩍 등을 밀기도 했다. 그러고는 두 사람에게 가타부타 말도 없이 레이몬드 2황자가 곧바로 내 옆자리를 다시 차지했다.

“클레어.”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으며 눈을 마주쳐오는 레이몬드 2황자의 시선이 초조한 빛을 띠었다.

“의식을 잃기 전에 나랑 나눴던 대화 기억해요?”

“잠깐, 잠깐만. 이 상황에서 둘만의 세계를 만든다고?”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서 있던 유리 황녀가 그제야 아차 하는 표정으로 후다닥 내 옆으로 다시 다가왔다.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을 깜빡이고 있는 알렌 4황자 몫까지 유리 황녀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항의했다.

어딘가 간절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던 레이몬드 2황자의 금색 눈동자에 못마땅한 기운이 스쳤다. 하는 수 없다는 듯 유리 황녀를 돌아본 레이몬드 2황자가 똑같이 불만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말했다.

“그만하면 됐잖아. 언제까지 너희만 클레어를 독차지하고 있을 건데.”

“아니. 웃기네, 이 오빠. 어떻게 봐도 우리가 더 독차지하는 게 맞거든? 오빠보다 우리가 언니랑 떨어져 있었던 시간이 훨씬 더 길잖아! 멜린트 영지에서 오빠만 계속 언니 독차지했었고! 난 그때도 오빠가 일부러 언니 수도로 빨리 안 데려온 거 아닌지 의심하는 중이거든?”

“그래서 지금까지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우리가 언니 뭐 얼마나 오래 붙들고 있었다고! 그리고 지금 일부러 언니 안 데려온 거 아니냐는 내 합리적 의심에 부정 안 한 거 맞아?”

씩씩대며 돌진해온 유리 황녀를 상대하느라 레이몬드 2황자가 귀찮다는 눈으로 옆을 돌아보고 있었고, 그의 목 아래로 보이는 흉터가 다시 눈길을 잡아챘다.

나는 무심코 그 흉터에 손을 가져다 댔다. 내 손길이 닿자 놀란 듯 레이몬드 2황자의 몸이 흠칫 굳었다. 당황한 나는 얼른 손을 떼려 했으나, 레이몬드 2황자의 손이 더 빨랐다. 그가 내 손을 잡아 흉터 위로 누른 채 내 팔목 안쪽에 입술을 눌렀다.

시선을 내리고서 내 피부에 가만히 입술을 대고 있는 모습이, 외설적이거나 이상한 게 아니라 경건한 느낌이 더 강했다.

“이거…… 왜 이런 건지 물어봐도 돼요?”

레이몬드 2황자에게도 묻고 싶은 게 산더미처럼 있었지만, 우선은 저 흉터가 어떻게 생긴 건지 궁금했다. 그래서 먼저 물어본 것인데 선뜻 대답을 해줄 거라는 예상과 달리 그가 대답을 망설이며 머뭇거렸다.

“언니, 이 흉터 어떻게 생긴 거냐면요. 오빠가 언니 그렇게 된 거 알고, 읍!”

세모눈을 뜨고 레이몬드 2황자를 째려보던 유리 황녀가 이때다 하고 끼어들었으나, 곧바로 레이몬드 2황자에게 제압당했다. 커다란 손으로 입을 틀어막히자 유리 황녀가 다시 세모눈을 떴다.

레이몬드 2황자는 당황한 얼굴로 내 시선을 피했다. 어찌할 바를 몰라하는 눈동자가 겨우 다시 내게 향했을 때였다.

“둘째 형님이 혼자 「문」에 접근했다 다친 거라고 했어요.”

타박타박 귀여운 발소리와 함께 곁에 다가온 알렌 4황자가 해맑은 얼굴로 레이몬드 2황자의 노력을 배신했다.

“첫째 형님이 그랬는데 그때 둘째 형님이 죽인 마물들의 피로 데르카샤 해가 온통 검붉게 물들었다고 했어요!”

알렌 4황자가 대신 대답을 내어놓자 유리 황녀도 잽싸게 레이몬드 2황자의 손을 피해 다시 입을 열었다.

“첫째 오빠랑 다른 사람들 말도 안 듣고 혼자 무모하게 「문」에 접근했다가 다친 거예요. 언니가 죽었다는 걸 알고는 눈이 이렇게 훼까닥 돌아서요. 상급 개체 여러 마리를 상대하면서 잠깐 방심하는 바람에……. 레스티아 경 말로는 그 중에 언니 목소리를 똑같이 흉내내는 개체가 있었댔나? 어쨌든 그때 오빠 거의 죽을 뻔했어요. 상처가 너무 심해서 성녀랑 고위 신관 열 명이 붙어서 성력을 쏟아붓는데도 상처가 쉽게 안 나아서. 이 흉터도 그때 남은 거예요. 그때 성녀랑 신관들이 겨우 치명상만 수습하고 다 쓰러졌거든요.”

입을 틀어막힌데에 대한 반감 탓인지, 유리 황녀가 다다다 말을 쏟아내고는 레이몬드 2황자를 향해 흥! 콧방귀를 꼈다. 레이몬드 2황자는 반쯤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며 어색하게 자신의 목덜미를 매만졌다.

그제야 저 흉터가 생긴 이유를 알게 된 나는 멍하니 레이몬드 2황자를 응시하다 눈동자를 일그러뜨렸다.

혼자 무모하게 「문」에 접근했다.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래서 큰 상처를 입었고, 저토록 심한 흉터를 몸에 남겼다. 결국 저 흉터도 전부 나 때문이었다.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해졌다. 간신히 멈춘 눈물이 또 날 것 같아서, 나는 잠시 기다리다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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