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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클레어 헤더의 해피엔딩을 위하여 (4) (113/152)

06. 클레어 헤더의 해피엔딩을 위하여 (4)

* * *

“언니.”

익숙한 어둠 속에서 여자애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을 때도 나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언제, 어떻게, 내가 다시 이 어둠 속으로 끌려온 건지도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여자애가 신이라면 그런 건 숨 쉬듯 당연하게 할 수 있는 일일 테니까.

“축하해요. 언니가 이겼네요.”

웃음기 어린 목소리와 달리 무표정하게 나를 바라보는 얼굴에도 이제는 익숙해진 느낌이었다.

“처음엔 이상한 꿈을 꿨다고 생각했는데…… 나한테 일부러 보여준 거죠? 그 낯선 세계가 당신이 살던 세계인가요?”

나는 가만히 시선을 마주하며 여자애에게 말을 걸었다.

곧바로 대답이 돌아오지 않기에, 나는 한 가지 더 궁금한 점을 추가했다.

“한 사람은 모르겠지만, 혹시 김유리라는 사람이 유리 황녀 전하인가요?”

이 애가 나한테 보여준 기억들 속에서 계속 등장하던 두 사람의 모습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그 중에서 김유리라는 여자애가 유독 더 신경이 쓰였다.

단순히 이름이 비슷해서가 아니라……, 정확히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여자애가 유리 황녀라는 확신이 들었다.

“네.”

어쩌면 대답을 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생각 외로 담담한 답변이 돌아왔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성녀 아리아예요.”

더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사실도 함께.

나는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남자였잖아요?”

여자애가 웃음소리를 냈다. 그런 내 반응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지만, 성녀 아리아라는 인물을 살아 움직이게 할 때 제일 많이 참고한 사람이 재현 오빠였거든요. 김유리도 그렇고.”

내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이번에도 흔쾌히 대답을 내어준 여자애가 돌연 웃음소리를 뚝 멈췄다.

“언니는 좋겠어요, 이제 정말 행복해질 일만 남았으니까.”

무표정한 얼굴에 웃음소리만 흘리는 것도 그랬지만, 갑자기 한기가 흐르는 눈빛과 말투도 꺼림칙하긴 매한가지였다.

“하긴 처음부터 쉬운 일이었죠. 언니는 레이몬드 알렉 카지스가 언니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잖아요. 그러니까 말하기 쉬웠던 것뿐이지.”

끼에에엑.

마물들의 울음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잠시 이곳이 어딘지 잊고 있던 나를 비웃는 것처럼.

“생각해보니까 이걸 이겼다고 할 수 있나?”

여자애의 검은색 눈동자가 한순간 핵과 같은 붉은색으로 변한 듯한 착각이 들었다.

“맞아, 처음부터 내가 너무 불리했던 것 같아.”

“약속……지켜줘요.”

혼잣말 같은 기묘한 의문이 어느새 확신으로 변해가는 걸 보며 나는 초조하게 말했다.

“더는 내 주변 사람들이 다치지 않게 하겠다고 했던 것. 그리고 핵을 파괴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한 것.”

여자애가 제안한 내기의 승자는 나였지만, 여전히 우위에 서 있는 건 저쪽이었다.

계약서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내 가슴 위에 붉은 문양이 새겨졌었지만 제약을 받은 건 나뿐이었다. 내기의 결과가 어떻든 사실상 저쪽이 변심하여 말을 바꾸면 아무것도 얻어낼 수가 없었다.

“내가 왜 그 약속을 지켜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여자애가 의문이 섞인 투로 빈정거렸다.

설마했던 최악의 상황이 펼쳐지자 나는 입술을 꾹 깨문 채 상대를 노려보았다. 여자애 역시 나를 적대감 가득한 눈으로 응시해왔다.

“어차피 여긴 전부 내가 만든 세계예요. 내가 여길 엉망진창으로 망가뜨리든 뭘 하든 전부 내 마음이라고요.”

어린아이가 억지를 부리고 떼를 쓰는 듯한 말투였다. 제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목소리에 짜증이 가득했다.

“마음에 안 들어. 언니를 살려주는 게 아니었어요. 그냥 그렇게 죽게 뒀으면 좋았을 텐데. 김유리도 재현 오빠도 둘 다 내 이야기 속에서 죄책감에 휩싸인 채 살아가게 둘걸.”

내게 하는 말인지 혼잣말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낮게 중얼거리던 여자애가 잠시 말을 멈췄다.

“있죠, 언니. 그냥 이대로 죽어주면 안 될까요?”

똑바로 내 눈을 들여다보며 질문을 던져오는 목소리가 진지했다. 일부러 빈정거리거나 나를 위협하기 위한 게 아닌, 진심이 느껴지는 질문에 순간 목 근처가 서늘해졌다.

“언니한테 너무 유리한 내기였어요. 너무 쉬워서 솔직히 내기라고 할 수도 없을 것 같아요.”

하지만 이어진 말에는 나도 더는 가만히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지금 당장 눈앞의 여자애가 나를 없애버릴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래서 여자애가 너무나 두려우면서도, 화가 났다.

“유리한 내기? 쉬웠다니?”

일부러 나를 멜린트 영지가 아니라 로이안트 3황자가 다스리는 북부의 땅을 떨어뜨렸으면서, 1년이라는 시간을 허비하게 만들어 놓고, 모든 상황을 내가 이길 수 없도록 만들어 놨으면서.

그때의 나는 정말 모든 게 다 끝나버릴 거라고, 마지막이라 생각했었는데. 죽을 만큼 힘들었고, 눈물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절망적이었는데. 이제 와서 그게 전부 내게 유리한 내기였다니.

“내 인생에서 쉬웠던 건 하나도 없었어요. 단 하나도.”

에젯트 헤더에 의해 눈으로 뒤덮인 산속에서 끌어 내려졌을 때부터 암흑과도 같았던 내 유년시절이 차례대로 스쳐 지나갔다.

굶주린 배를 움켜쥔 채 잠들고, 언제부턴가 우는 법조차 잃어버렸던 어린 시절의 나와 리하르트 아델을 만나고, 그를 사랑하게 되었던 모든 순간들을 떠올렸다. 비참하게 버려지고 마음을 짓밟힌 채 울기만 했던 기억들도.

“당신이 신이라면 알 거 아냐. 지금까지 내 인생이 어땠는지! 그런데 어떻게……!”

유리 황녀와 알렌 4황자, 그리고 레이몬드 2황자를 만난 이후에도 그들을 사랑하는 내 마음조차 쉽게 허락되지 않던 기억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어떻게 쉬웠다고 말할 수 있어요?”

나는 분하고 억울하고 서러운 마음을 전부 담아 원망의 감정을 토해냈다. 당신이 이 세계를, 나를 만들어낸 낸 거라면 나를 불행하게 만든 것도 당신이라는 소리잖아. 그런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언니는 레이몬드 알렉 카지스가 언니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잖아요. 김유리도, 재현 오빠도 사실은 언니를 좋아한다는 것도. 그러니까 그렇게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었던 거잖아.”

이해할 수 없게도, 여자애는 도리어 그런 내가 더 원망스럽다는 듯 시선을 마주해왔다.

“언니는 나처럼 배신당한 게 아니니까!”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해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노려보면서, 나도 지지 않고 맞섰다.

“그 사람들도 당신을 좋아한다고 했잖아요! 두 사람 다 당신과 친해지고 싶어서 먼저 다가오고 노력했던 모습들 다 봤어요. 그리고 그때도…… 두 사람 다 진심으로 당신이 미워서 그런 말을 한 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서슬 퍼런 시선 앞에서 움츠러들면서도 나는 열심히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하려 애썼다.

“……웃기지 마.”

콰지직, 소리와 함께 여자애의 얼굴 위로 길게 금이 생겼다.

“뭘 안다고 함부로 지껄이는 거야, 어차피 내가 만들어낸 캐릭터일 뿐인 주제에!”

“그러니까 아는 거예요.”

무서웠지만 물러나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한 걸음, 여자애의 앞으로 다가섰다.

“난 당신이니까.”

그리고 또 한 걸음 천천히 다가가 여자애에게 손을 뻗었다.

“이 거울은, 그런 의미잖아요.”

어그러진 거울 너머로 손이 닿은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진짜 서로 손을 마주 댄 게 아니라, 그저 거울에 비친 모습이 그렇게 보일 뿐이라는 걸 알지만 그랬다.

“당신도 아직 두 사람을 좋아하니까, 나와 비슷한 마음이니까. 진실을 알고 싶어서 두 사람을 이 세계로 불러들인 거 아닌가요?”

솔직히 나도 자신은 없었다. 어쩌면 내가 그냥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일 수도 있다. 진짜 두 사람은 정말 이 사람을 미워하고 멀어지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도. 내가 포기하지 않았던 것처럼 신은지라는 이름을 가진 눈앞의 여자애도 포기하지 않았으면 했다.

나는 당신이니까.

당신이 나를 언제든 죽일 수 있었으면서도 진짜 없애버리지는 않았듯이. 일부러 내기라는 말로 부추겨 당신이 이루지 못했던 걸 나를 통해 이뤄내려고 했듯이. 아마 당신도 사실은…….

“……시끄러워.”

거울 속에서 마주 닿아있던 손이 떨어졌다. 신경질적으로 귀를 틀어막은 여자애의 검은색 눈동자가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그제야 처음으로 진짜 신은지라는 나의 신을 마주하게 됐다고 생각했다.

“시끄럽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잘난 듯이 말하는 거 더는 못 들어주겠어.”

파지직, 콰직, 금세라도 깨어질 듯 거울에 여러 갈래로 금이 생겼다.

낯설지 않은 상황에 나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당황한 눈으로 깨진 거울을 바라보고만 있는 사이, 여자애의 모습이 완전히 부서져 버렸다.

“너, 짜증나니까 그만 가.”

* * *

[흐어어어엉! 빨리 우리 언니 살려내, 이 돌팔이 새끼야! 언니 살려내라고!]

[미친놈 아냐, 이거 진짜? 그냥 잠든 것뿐이라고 몇 번 말했냐! 너네 언니 멀쩡히 살아있다고!]

[근데 왜 못 깨어나냐고, 돌팔이 새끼야!]

[내가 성녀지, 의사냐? 나 말고 아까 그 영감탱이 불러와서 뭐라 하라고!]

[성력인지 뭔지 좀 써보라고! 힘 아껴뒀다가 뭐 하냐고, 수프 끓여 먹을 거냐고!]

[성력으로 맞고 싶냐?]

[나 때리는데 쓸 성력으로 빨리 우리 언니부터 살려내! 살려내에에에에!]

낯선 언어. 의미는 알 수 없지만 시끌벅적하게 대화를 나누는 목소리만큼은 익숙한 이들의 것이었다.

유리 황녀와 성녀 아리아. 사이좋게 얘기를 나누는 건지, 싸우는 건지 경계가 모호한 대화 소리에 이어 또 하나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유리 크리스틴 카지스. 조용히 안 할 거면 나가.”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게 아닌, 낮게 내리깔리는 음성이 더 무섭게 느껴졌다.

레이몬드 2황자였다. 애써 화를 억누르는, 어딘가 지치고 무겁게 잠긴 목소리가 조금 신경 쓰였다.

레이몬드 2황자의 경고가 떨어지자 신기할 정도로 주변이 조용해졌다.

귀여운 아기 오리처럼 꽥꽥 소리를 질러대던 유리 황녀도, 그에 똑같이 어울려주던 성녀 아리아도 한순간에 입을 꾹 다물었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왠지 머릿속으로 상황이 그려져서 웃음이 나왔다. 눈을 떠서 직접 그 모습을 보고 싶은데 바위처럼 무거운 눈꺼풀이 꼼짝도 하질 않았다.

답답함에 절로 몸에 힘이 들어가고, 간신히 손가락 끝을 움찔하며 움직였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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