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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클레어 헤더의 해피엔딩을 위하여 (3) (112/152)

06. 클레어 헤더의 해피엔딩을 위하여 (3)

나는 믿기지 않는 눈으로 어린아이처럼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레이몬드 2황자를 내려다보았다.

간신히 보이는 그의 옆얼굴과 목선 아래로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상처가 보였다. 목선을 타고 길게 이어진 상처는 생긴 지 꽤 시간이 지난 흉터 같았지만,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

어지간한 상처는 신관의 치유력으로 말끔히 지워냈을 터인데 이렇게까지 흉터가 크게 남았을 정도면, 본래의 상처가 얼마나 깊고 심했던 건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그래서 잃어버린 거야. 하나도 남김없이 깨끗이. 살기 위해서, 당신을 지워버렸어.”

어쩌다 이런 상처를 입게 된 건지, 옷 아래로 감춰진 몸에 다른 상처는 없는 건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내 허리를 꼭 끌어안은 채 꼼짝도 하지 않는 레이몬드 2황자로 인해 나도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제 이 세상에 없는 당신을 떠올릴 때마다 죽고 싶었으니까. 당신을 따라 죽으면 만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내가 있었으니까.”

살기 위해서, 당신을 지워버렸어. 그가 애써 고통을 삼키듯 이를 악문 채 나직이 내뱉은 말이 한 박자 늦게 가슴에 스며들었다.

그래서였던 거구나. 나를 보고도 감정 한 조각 내비치지 않고 무심하게 지나쳤던 게. 나를 잊어버려서, 나를 기억하지 못해서, 그래서 그랬던 거였구나.

아직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정신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도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너무 현실감이 없어서, 나는 바보처럼 눈을 끔뻑이다 느리게 시선을 내렸다. 레이몬드 2황자의 등을 마주 끌어안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허공에 떠 있는 내 손이 보였다.

“왜, 왜…… 이제야 온 겁니까.”

나를 원망하며 절절하게 이어지는 목소리가,

“나는 매일이 지옥 같았는데. 당신의 존재를 잊고도 매일 밤 기억도 나지 않는 여인의 꿈을 꾸고, 고통스럽게 잠에서 깨어났는데.”

내 허리를 끌어안은 강한 팔의 힘이,

“그리고 돌아와 겨우 내 손을 잡아주는가 싶더니, 왜 그렇게 쉽게 놓아버리는 겁니까.”

내 어깨를 적시는 눈물이,

“난 당신에게 정말 그것밖에 안 되는 겁니까?”

전부 현실로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이미 죽어서, 내가 그토록 원했던 미래를 꿈꾸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이 아니라 내가 바랐던 꿈의 중심에 떨어져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나타나지 말았어야지.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나서 내 가슴을 뛰게 만들지 말았어야지. 내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 간 눈동자로 나를 원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지 말았어야지. 내 귀를 먹게 만든 목소리로 나를 좋아한다 말하지 말았어야지.”

화를 내고 있었다. 나를 힘껏 끌어안은 채로 화를 내고, 원망하고…… 울고 있었다.

“도망갈 기회를 준 건 그때 한 번뿐입니다.”

레이몬드 2황자가 여전히 내 어깨에서 고개조차 들지 않고서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이제 절대로 못 놔줘. 아무데도 못 가.”

말만 들으면 그가 나를 위협이라도 하는 듯한 말투인데, 소중한 걸 빼앗길까 겁에 질린 아이처럼 겁에 질린 모습이 무섭긴커녕 오히려 안쓰러운 느낌만 들었다.

“좋아해. 나야말로 더는 어떻게 할 수도 없을 만큼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

잠잠해졌던 왼쪽 가슴의 문양이 다시 불에 타는 듯 뜨거워졌다. 신기하게도 통증은 없었다. 그리고 마치 그 문양이 지워져 나가듯 서서히 뜨거운 기운도 사라져갔다.

“그러니 제발…….”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 곁에 있어 줘, 클레어.”

가슴 위에 새겨졌던 붉은 문양이 사라졌음을.

나는 아직도 허공에 떠 있는 내 양손을 내려다보는 상태 그대로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시야가 흐려지며 눈물이 차올랐다. 차오른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제야 눈물이 나고, 이제야 이 모든 게 꿈이 아닌 현실임을 자각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허공을 부유하던 손을 움직였다. 레이몬드 2황자의 등을 마주 끌어안자 흠칫 몸을 굳히던 그가 나를 더 깊이 끌어안는 게 느껴졌다. 나는 레이몬드 2황자의 품에 그와 똑같이 얼굴을 묻었다.

“아무데도 가지 않을 거예요. 전하의 곁에 있을게요.”

울음에 섞여 전부 뭉개진 발음으로 겨우 내뱉은 말을 레이몬드 2황자가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다만, 흔들림 없이 나를 끌어안은 팔만이 내가 믿을 수 있는 전부였다.

레이몬드 2황자의 품에 안겨 지금껏 참았던 눈물을 펑펑 쏟으며 생각했다. 실컷 울고 나면 이 사람에게 모든 걸 얘기해야지.

그동안 내가 홀로 삼키고 숨겨왔던 이야기들을, 문의 안쪽에서 만났던 신의 존재를, 그리고 처음 당신을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줄곧 조용히 키워나갔던 내 마음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고백하리라 마음먹었다.

이 앞에 얼마나 더 힘들고 괴로운 미래가 그려져 있든 나는 이 사람과 함께 결말을 맞이할 거니까.

설령 그 결말이 불완전하여 오롯이 기쁨으로만 가득찬 게 아니더라도, 나는 이제 레이몬드 알렉 카지스가 없는 내 인생을 상상조차 할 수 없으니까.

그러니 당신을 사랑하고 있노라고, 한 번 더 말해야지.

나의……, 클레어 헤더의 행복한 결말을 위하여.

* * *

“완전 도로가 온통 피범벅이 돼선, 응급차에 실려 가는 거 봤다더라.”

“일부러 뛰어든 것 같다고 말 많던데.”

“미친, 그럼 자살하려고 그랬단 거?”

“걔네 반 존나 유치하게 걔 왕따시키고 그랬잖. 병신들, 다 X되게 생김.”

“그러는 니도 저번에 오타쿠 냄새난다고 지랄하지 않음? 니도 X될 듯.”

“이야, 우리 학교도 드디어 학폭위 열리나요.”

학교 안에선 어딜 가도 신은지에 대한 얘기로 시끌벅적했다. 불쌍하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겠냐며 동정의 시선도 있지만, 개중에는 여전히 생각 없는 것들이 낄낄대며 함부로 말을 지껄여대선 듣고 있기가 힘들었다.

“꼭 보면 그런 찐따 새끼들이 관심받으려고 쇼하고 그러더만. 신은지인가 뭔가 그거도 자살쇼하려다 그렇게 된 거 아님?”

“씨X, 지금 뭐라고 쳐지껄었냐?”

그 때문에 김유리는 점심시간에 다른 반 남학생 하나와 거의 싸우기 직전까지 가기도 했었다. 친구인 동욱과 희연이 나서서 막아주고 저를 감싸줬기에 다행히 일이 그렇게 커지진 않았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도 그 개자식의 얼굴을 급식판으로 후려치지 못한 게 한이 되었다.

그 개새끼도 동욱을 보고 꼬리를 내린 거지, 진짜 자기가 잘못한 건 전혀 모르는 기색이었다. 쓰레기 같은 새끼.

김유리는 음량을 최대치로 키운 이어폰을 귀에 쑤셔 박고서 교실을 나섰다. 아침부터 속이 좋지 않았다. 식은땀도 자꾸 났다. 아무래도 오늘은 조퇴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담임을 찾아 교무실로 가는 길이었다.

“이거 신은지 꺼 아니야?”

교무실로 가는 길 도중 신은지네 교실 앞을 지나칠 때였다. 여학생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신경을 잡아채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자, 낯익은 노트가 보였다.

“맞는 거 같은데…… 아까 이찬섭이 책상 발로 찼을 때 떨어졌나 보다.”

“괜히 건드리지 말고 다시 서랍에 넣어놔.”

신은지의 자리가 확실한 책상 옆에서 여학생 세 명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김유리는 여학생 손에 들린 노트를 보자마자 세 사람에게로 얼른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그거 나 줘. 내가 신은지한테 전해줄게.”

“어? 아, 응. 여기.”

불쑥 사이에 끼어든 김유리가 당황스러운 듯하던 여학생은 순순히 노트를 내밀었다. 김유리는 짧게 고맙다고 인사를 한 뒤 노트를 받아들고 돌아섰다.

초조한 걸음으로 교실을 나와 담임을 찾아갔다. 몸이 좋지 않아서 조퇴하고 싶다고 했더니, 창백하게 질린 제 얼굴을 보고 담임도 별말 없이 조퇴증을 끊어주었다. 꾸벅 인사를 하고 교무실을 나와 복도를 걷는 내내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중엔 눈앞이 핑 돌더니 헛구역질까지 나서 저도 모르게 주저앉을 정도였다.

신은지의 노트를 끌어안은 채 김유리는 한참을 주저앉아 호흡을 골랐다.

김유리는 빨리 집에 가서 쉬든가 병원이라도 가든가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몸을 일으켰다. 겨우 겨우 학교 건물을 나와 교문을 지나서도 어지럼증이 가시질 않았다.

‘신은지한테 못됐게 군 벌인가.’

힘겹게 걸음을 옮기며 무심코 그런 생각을 하다 픽 웃음이 났다.

‘쌤한테 병원 어딘지 물어볼 걸 그랬나…… 아니, 알아서 뭐하게. 내가 지금 찾아가면 신은지가 얼씨구나 하고 잘도 반겨주겠다. 욕이나 안 먹으면 다행이지.’

그래도 괜찮은지 정도는 물어볼 걸 후회가 됐다. 아니, 그것도 안 물어보길 잘했다. 차에 치여서 도로에 피가 흥건할 정도로 다쳤다는데, 괜찮을 리가 없지 않은가.

김유리는 주머니 속의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망설이다 결국 손을 뗐다.

‘진짜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

얼마나 아팠을까. 하늘도 무심하시지. 바보같이 착해빠진 소심 덩어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그런 일을 겪게 하는 걸까.

‘너 지금 괜찮은 거 맞지?’

오늘 아침 신은지네 반을 찾아갔다가 교통사고 얘기를 전해 들었을 때는 나지 않았던 눈물이 이제야 났다. 김유리는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대충 슥슥 닦아내며 교문을 지났다.

점심시간이 거의 끝난 시간인데다 이 시간에 하교를 하는 사람은 저밖에 없으니 교문 주변은 텅 비어있었다. 오늘따라 학교 주변에도 오가는 사람이 없어 거리가 휑했다. 교문 바로 앞이 도로와 연결돼있는 구조라 차들만 쌩쌩 지나다니고 있었다.

‘돌아올 거지? 내가 밉겠지만, 두 번 다시 얼굴도 보기 싫겠지만, 그래도 내가 사과할 기회는…….’

“너 뭐야?”

그래서 갑자기 웬 남자가 말을 걸어왔을 때는 너무 놀라서 펄쩍 뛰다 뒤로 넘어질 뻔했다.

“네가 뭔데 그 노트를 갖고 있어?”

적의로 가득 차 저를 노려보는 눈동자와 시비조의 말투가 기분 나쁜 사람이었다.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모습도 그렇고, 야구 방망이를 바닥에 질질 끌고 오는 모양새가 한 눈에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미친 사람 같아서 김유리는 주춤거리며 도망갈 태세를 취했다.

“너도 내 동생 괴롭힌 새끼들 중 하나냐?”

김유리가 대답도 하지 않고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는 모습이 남자의 심기를 건드린 것 같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과 함께 낮게 욕설을 중얼거리던 남자가 김유리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내놔.”

그러고는 갑자기 김유리에게 불쑥 손을 뻗어왔다.

“그거 내놓으라고!”

“꺄아악!”

순간 남자가 저를 때린다고 생각한 김유리는 그대로 도로 쪽으로 뛰어들었다. 6차선 도로 건너편에 중년 부부가 걸어가는 게 보여서였다.

“저게 진짜……!”

부부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으로 김유리가 도로 쪽으로 내려가자, 남자도 뒤를 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빠아아앙!

다급한 클랙슨 소리가 도로를 울렸다.

놀란 두 사람이 동시에 돌아본 곳에는 속도를 멈추지 못하는 트럭 하나가 달려오고 있었고, 그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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