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클레어 헤더의 해피엔딩을 위하여 (2)
시간이 느리게, 아주 느리게 흐르는 것만 같았다.
천천히 내 앞으로 걸어오는 레이몬드 2황자의 모습이 가까워질수록, 멈춘 줄 알았던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나는 무심코 참고 있던 숨을 가쁘게 내쉬며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말을, 해야 해.
그걸 위해 여기까지 온 거니까. 움직여. 말해. 무서워도, 죽을 만큼 겁이 나도 해야 해. 어설퍼도 돼. 허둥대도 괜찮아. 그러니 말해.
거센 바람 한 줄기에 커튼이 다시 날렸다. 시야를 방해할 만큼 높이 날아오른 커튼과 함께 내가 쓰고 있던 후드가 뒤로 넘어갔다.
손으로 붙잡을 새도 없이 후드가 젖혀져 얼굴이 온전히 드러났다. 갑자기 부는 바람이 성가신 듯 한쪽 눈을 찡그린 레이몬드 2황자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느리게 흐르던 시간이 그 순간 아예 멈춘 것만 같았다. 미친 듯이 뛰던 심장도, 가쁘게 내뱉던 호흡도, 덜덜 떨리던 손끝도, 전부 멈췄다.
시간이 멈춰버린 세상에서 레이몬드 2황자만이 움직이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지는 그에게서 단 한 순간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
눈이 마주쳤다. 세상의 모든 빛과 색이 바래고 나와 레이몬드 2황자만 남은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레이몬드 2황자가 나를 아예 보지도 못한 것처럼 그대로 옆을 스쳐 갔다.
일부러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듯한 느낌마저도 없었다. 그저 길가의 흔한 돌멩이나 잡풀을 보듯이 무심한 눈동자가 스치듯 나를 보고는, 옆을 스쳐 지나갔을 뿐이었다.
애초에 나 같은 건 알지도, 본 적도 없다는 듯이 그렇게.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어떤 얼굴로 말을 해야 할까. 끊임없이 고민하던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됐다.
이대로 보내서는 안 된다는 걸 아는데. 몸이 움직이지를 않았다. 점점 멀어져가는 발소리를 들으면서도 돌아볼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레이몬드 2황자를 뒤따르던 레스티아 경이 마찬가지로 내 옆을 지나치며 나를 빤히 응시해왔다. 시선이 마주치자, 레스티아 경이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
그 서늘한 미소가 처음부터 이 상황을 예상한 듯이 나를 향해 그럴 줄 알았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당신이 레이몬드 2황자를 외면하고 리하르트 아델과 함께 걸어갔을 때처럼, 똑같이 당해보니 기분이 어떠냐고 묻는 것만 같았다.
레스티아 경마저도 제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는 나를 지나쳐가고, 나는 복도 한가운데 홀로 남겨졌다.
머릿속도, 가슴도 텅 비어버린 듯했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전부 새하얗게 칠해진 것처럼.
괜찮아, 이런 상황을 예상 못 한 것도 아니잖아. 무시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잖아. 그저 내 마음을 전할 수만 있다면, 그걸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잖아
나는 가까스로 고개를 돌려 창가를 돌아보았다. 노을이 지는 하늘, 거의 모습을 감춘 해가 붉은 하늘 끝에 간신히 걸려 있었다.
어두워진 복도의 벽에 걸린 마력구들에 반짝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저 끝에서부터 불이 들어오기 시작한 마력구의 빛들이 복도를 환하게 밝혔다.
저 해가 지면 약속한 시간이 끝나고, 이제 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겠지.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메마른 눈동자로 붉은 하늘을 올려다보다 천천히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못 하겠어.’
저 차가운 눈동자 앞에서 이제 와서 당신을 좋아했노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너 같은 건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듯한 시선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어차피 이제 다 끝났으니까.
‘그래도 마지막엔 얼굴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무사히,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는 모습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땐 크게 다쳤던 성녀 아리아도 지금은 멀쩡해 보여서 안도했다. 유리 황녀와 알렌 4황자를 보지 못하고 끝난 게 아쉽긴 하지만 두 사람도 분명 잘 지낼 거라 믿었다.
두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많으니 행복하게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곧 나에 대한 기억은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질 테니까. 내 죽음을 슬퍼하지도, 나를 그리워하지도 않을 테니까.
이걸로 된 거라고 여겼다.
그래, 분명 그랬는데.
나는 힘없이 바닥에 내려두었던 손에 꾸욱 힘을 실었다.
이걸로 된 거라고, 이제 괜찮다고, 조용히 내게 어울리는 결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하늘을 붉은 빛으로 물들인 채 점점 지는 해를 바라보는 그 순간에 견딜 수가 없이 화가 났다. 단 한 번도 온전히 행복을 누리지 못했던 내 삶이, 누구보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야 한다는 사실이 억울해서. 내가 너무 가여워서. 사랑하는 이에게 내 마음조차 전하지 못하고 이대로 잊히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내가 서러워서.
눈물조차 나지 않는 눈으로 붉은 하늘을 응시하던 나는 비틀거리는 다리를 세워 일어났다. 그리고 돌아서서 저만큼 멀어져간 레이몬드 2황자의 등을 시야에 담았다.
떨리는 발을 다시 한 걸음 그를 향해 움직인 순간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레이몬드 2황자를 향해 있는 힘껏 달려가는 내가 있었다.
간신히 넘어지지 않고 레이몬드 2황자의 뒤를 따라잡고서 손을 뻗어 그의 손을 힘껏 붙들었다.
레이몬드 2황자가 놀란 얼굴로 나를 돌아본 순간, 차오른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
“좋아해요!”
레이몬드 2황자의 어리둥절한 눈동자와 덩달아 뒤를 돌아보며 경악한 얼굴을 하는 레스티아 경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채로, 나는 쫓기듯 말을 이었다.
“레이몬드 알렉 카지스 전하를 좋아해요.”
시간이 없었다. 어느새 창밖은 거의 어둠이 내려 있었다. 위태롭게 걸린 해의 존재를 인식하며 나는 덜덜 떨리는 입술로 다급히 말했다.
“아델 공작을 잊지 못했다고, 그 사람을 좋아한다고 했던 건 전부 거짓말이에요. 전하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저와 얽히면 전하도 성녀처럼 위험한 일을 겪게 될까 봐. 그래서 그랬던 거예요.”
그래, 어차피 끝인데. 무엇을 더 두려워하고, 움츠러든 채 자격이 없다는 소리나 하고 있었던 걸까.
“사실은 2황자 전하를 좋아해요, 더는 저도 어쩔 수 없을 만큼 전하를 좋아해요.”
거부당해도, 경멸 어린 시선을 받아도, 상처받아도 괜찮아. 이제 와서 좋아한다는 소리 따윌 하는 나로 인해 레이몬드 2황자가 또다시 상처받게 된다 해도 괜찮아.
어차피 다 잊을 테니까. 나에 대한 모든 기억들은 지워질 테니까.
“전하를 만날 수 있어서, 전하를 사랑하게 되어서 다행이에요.”
그러니까 용기를 내도 괜찮아. 내 마음을 전해도 괜찮아.
“보잘것없는 인생이었지만 전하 덕분에 잠시나마 행복했어요.”
누구의 기억 속에도 남겨지지 않을 테니까. 클레어 헤더는 이 세계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이로서 사라질 테니까.
마지막은 내 멋대로 하게 해줘요. 나는 당신들을 사랑했던 기억을 안고서 후회 없이 갈 거예요.
“그러니 전하도 꼭 행복해지셨으면 좋겠어요.”
그래, 지금의 결말이 내게 어울리는 해피엔딩이었다.
“고마웠어요, 잘 지내요.”
눈물은 나지 않았다. 더는 슬프지도 않았다. 마지막은 웃는 얼굴로 말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한 미소와 함께 인사를 마치며 레이몬드 2황자를 바라보았다.
레이몬드는 줄곧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화를 내거나 내 손을 쳐내는 행동조차 없었다.
서운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나는 어쩌면 이것도 그의 다정함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걸로 됐어.
나는 천천히 레이몬드 2황자의 손을 놓고 돌아섰다. 무너질 것만 같은 다리를 움직여 한 걸음씩 그로부터 멀어졌다. 걸음을 옮기며 어딘가 후련한 마음으로 창가를 바라보았다.
해가 졌다. 정말 다 끝났다.
왼쪽 가슴의 문양이 끓어오르는 것처럼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아마 그 애도 나의 이런 최후를 예상하고, 내기를 걸었던 거겠지. 어쩌면 애초부터 내가 마음을 전하지도 못할 거라고 여겼을지도 몰랐다.
그런 거라면 조금 통쾌한 마음도 들었다. 그 애의 예상을 틀렸다.
나는 분명 내 마음을 사랑하는 이에게…….
“어떻게.”
갑자기 손이 잡혀 몸이 강제로 돌려 세워지는 바람에 사고가 멈췄다. 놀란 눈을 크게 뜨고 돌아본 곳에는 레이몬드 2황자가 있었다.
영주성의 후원에서 만났던 그날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리하르트 아델을 사랑한다 거짓말하고 돌아섰던 나를 레이몬드 2황자가 붙잡았던 그때처럼.
그가 고개를 숙여 표정을 감춘 채 말했다.
“뭘 어떻게 행복해지라는 겁니까.”
화가 난 목소리로 따지듯 내게 물어왔다. 내 손을 힘껏 붙든 레이몬드 2황자의 손이 그때처럼 떨리고 있었다. 행여 놓치기라도 할까 불안해하는 마음이 붙잡힌 손을 통해 느껴졌다.
“전하, 기억이…….”
나만큼이나 놀란 듯한 레스티아 경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왔다.
이 상황에서도 왠지 순간 레스티아 경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가 궁금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살짝 몸을 틀어 레스티아 경에게 시선을 가져가려는데, 그런 내 움직임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레이몬드 2황자의 손이 움찔했다.
나도 같이 움찔하며 다시 그를 돌아본 찰나, 뻗어온 팔이 내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빈틈없이 나를 힘껏 끌어안고서 몸을 숙여 내 어깨에 자기 얼굴을 푹 파묻었다. 밀착한 몸이 맞닿고 더운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수십 수백 번도 더 후회했어.”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해 굳어버린 내 귓가로 이를 악문 채 힘겹게 내뱉는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줬어야 했는데. 내가 아니라 그 남자를 선택했든 말든, 억지로라도 당신 손목에 아티펙트를 채워줬어야 했는데. 술에 취해 괴로워할 시간에 그걸 당신에게 주기만 했으면…… 그랬다면 무사했을 텐데. 나는 멀리서나마 당신을 지켜볼 수 있는 세상에 살 수 있었을 텐데.”
레이몬드 2황자의 이마가 닿은 내 왼쪽 어깨가 젖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애써 울음을 참아내듯 물기 젖은 목소리가 끊어질 듯 겨우 겨우 이어졌다.
“당신이 없는 세상이 너무 끔찍해서, 차라리 따라 죽고 싶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어. 미쳐버리지 않는 게 도리어 이상했어. 그대로 숨이 끊어질 것만 같았어.”
나보다 훨씬 크고 강한 몸이 위태롭게 내게 매달린 채 덜덜 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