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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클레어 헤더의 해피엔딩을 위하여 (1) (110/152)

06. 클레어 헤더의 해피엔딩을 위하여 (1)

새하얀 입김이 공기 중에 퍼졌다.

겨울의 한가운데. 바다가 얼어붙을 만큼 혹독한 추위를 자랑했던 슬란테아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수도 역시 내 기억하는 것보다는 훨씬 추웠다. 가져온 옷을 여러 겹 껴입고 있어도 손끝이 시렸다. 나는 손을 모아 입가에 대곤 하, 따뜻한 입김을 불어 넣었다.

검문을 통과하고 수도 안으로 들어온 마차 안에서 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내 기억으로는 고작해야 두어 달 정도지만, 실제로는 1년이 넘게 이곳을 떠나 있었다고 생각하니 모든 게 다 낯설게만 느껴졌다.

수도 외곽에 위치한 헤더 자작가에 살 당시에도 집 밖으로는 거의 나온 적이 없기도 했고. 수도의 모습을 제대로 본 때라고는 레이몬드 2황자와 유리 황녀가 직접 헤더 자작가로 찾아와 나를 황성까지 데려가 주었을 때 정도였다.

순간이동 마법진이 있는 근처 마을에 도착한 뒤에도 쉬지 않고 말을 달려왔지만, 그래도 수도까지 오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거기다 겨울이라 해가 짧아진 탓에 벌써 하늘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찬바람을 맞아 얼굴이 얼어붙는 것만 같은데도 나는 열린 창으로 고개를 길게 빼고 해가 지는 하늘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약속한 기한이 끝나는 아홉 번째 날. 당장이라도 해가 지고, 레이몬드 2황자를 만나지도 못한 채로 이대로 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될 것 같아서 불안했다. 그래서 한번은 말을 타고 지나가던 기사들과 부딪칠 뻔하기도 했다. 결국 보다 못한 레스티아 경이 강제로 나를 자리에 앉히고 창문을 쾅 닫아버렸다. 나는 반성하는 의미로 얌전히 자리에 앉아 닫힌 창문 너머로만 하늘을 초조하게 응시했다.

지난 이틀간 수도로 오는 여정 내내 레스티아 경과는 딱 필요한 의사소통 외에는 대화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동안 그가 더 어려워졌으면 어려워졌지, 편해졌다거나 친해졌다는 느낌은 조금도 없었다.

마차 안에서는 창밖을 보거나 등받이에 기대어 졸거나 하는 게 대부분이었고, 밤이 되어 숙소에서 머물 때도 각자 방에서 조용히 쉬기만 했으니까.

누군가 나를 싫어하고 꺼리는 상황이야 그리 낯설 것도 없다. 하지만 또 그렇게 바로 앞에서 네가 싫어 죽겠다고 선언한 사람과 온종일 같이 붙어있는 일은 또 흔치 않았다.

이틀 동안 숙소에서 잠을 잘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시간에 눈앞의 아름다운 마법사와 함께 해야 했다. 나도 모르게 자꾸 상대의 눈치를 보게 되고, 표정이나 말투를 신경 쓰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만 조금 의외인 건, 나를 정말 싫어한다고 말한 것치고는 상대의 시선이나 행동에서 그렇게까지 티가 나진 않는다는 거였다. 싫어한다기보다는 그냥 내게 관심 자체가 없는 쪽에 가까워 보였다.

그저 무심히 한 공간에서 머무르다 어딘가 이동을 한다든가 특별히 변화가 있다든가 하는 걸 성실하게 알려주곤 했다.

“곧장 황성으로 들어갈 겁니다.”

지금처럼 말을 걸어오면 나는 순순히 알겠다 대답하고 레스티아 경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됐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광장과 시장가를 지나 마차는 금세 황성 앞까지 당도했다. 레스티아 경이 지닌 마탑 소속 증표를 보여주자 성문도 쉽게 통과됐다.

나는 얌전히 있겠다고 다짐했던 마음을 잊고 나도 모르게 다시 창문에 고개를 바짝 들이밀었다. 그리움과 반가움이 뒤섞인 눈으로 황성 내부를 바라보는데 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눈물을 꾹 참고서 시선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사이 마차가 멈춰 섰다.

“헤더 영애.”

당연히 「이제 내리시죠.」같은 말이 나오길 기다렸건만, 레스티아 경이 내 이름을 부르더니 불쑥 눈앞으로 뭔가를 내밀었다. 뭔가 하고 보니 레스티아 경이 쓴 것과 같은 보라색 후드였다.

“이걸 쓰고 절 따라오시면 됩니다.”

레스티아 경은 후드를 내 손에 들려주고는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먼저 마차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나는 잠시 당황했지만 이번에도 그가 시키는 대로 얌전히 따랐다. 허둥지둥 후드를 뒤집어쓰고 내리자 레스티아 경이 내 쪽을 돌아보고는 한쪽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뭘 또 잘못했나 싶어 굳어있으니, 긴 손가락이 다가와 후드를 내 코밑까지 당겨 덮어씌워주었다.

“제가 됐다고 할 때까진 계속 그렇게 쓰고 계세요.”

후드가 시야를 거의 가리고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태라 답답했다. 하지만 도움을 받고 폐를 끼치고 있는 입장에서 좋다 싫다 말할 처지는 아니었다. 뭔가 이유가 있겠지 싶기도 해서, 나는 또다시 얌전히 고개만 끄덕였다.

“제 뒤를 따라오세요. 넘어지지 않게 주의하시고요.”

시야에 간신히 레스티아 경의 발끝만 보이는 정도였지만 나는 앞서 걷는 그를 따라 열심히 걸었다.

내게 황성은 익숙한 듯 한없이 낯선 공간이었다. 오늘따라 유독 바람이 강하게 불어 후드가 바람에 날릴 때마다 간간이 황성 내부의 풍경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레스티아 경의 눈치를 살피며 혹시 모를 누군가의 흔적을 좇아 부지런히 주변을 시야에 담았다. 누군가의 발소리나 인기척이 느껴질 때마다 시선을 가져가고, 실망하기를 반복했다.

중앙정원을 따라 황성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갈수록 레스티아 경을 알아본 사람들이 알은체를 해오는 횟수가 들었다. 사람들 대부분이 후드를 푹 눌러쓴 내게도 관심을 보였으나 레스티아 경이 철저히 그 관심을 차단해주었다.

“레스티아님!”

이번엔 조금 더 앳된 목소리가 레스티아 경의 이름을 외쳤다. 멀리서부터 그를 알아본 듯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얼핏 보라색 후드를 걸친 모습을 보아 상대도 마법사인 듯했다.

상대는 헥헥 숨을 몰아쉬며 다가오더니 발을 동동 구르며 다급히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전하께서 찾고 계셨습니다.”

“지금 어디 계시지.”

“아직 황태자궁에 계실 겁니다.”

나는 상대가 말한 전하가 왠지 레이몬드 2황자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예상이 맞는 건지 레스티아 경이 내 쪽을 돌아보며 묘한 시선을 던져왔다. 뭔가 말을 하고 싶은 것처럼 나를 지그시 응시해오는 시선에 나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전하께선 황태자궁에 계신 듯하니 그쪽으로 가죠.”

하지만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돌리고는 황태자궁이 있는 방향으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나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어린 마법사의 시선을 피해 후드를 더 깊이 눌러쓰며 그를 따라 걸었다.

중앙정원에서 황태자궁까지는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다. 유리 황녀의 거처인 제4궁에서도 가끔 보였던 곳이라 나도 제법 익숙한 시선으로 황태자궁에 들어섰다.

하지만 이곳에 레이몬드 2황자가 있고, 그를 만나기 위해 걸어가고 있다는 걸 다시 한번 자각하기 시작하면서…… 더는 침착해질 수가 없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시야가 흔들렸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미친 듯이 뛰었다.

레스티아 경과의 거리가 점점 멀어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내가 제자리에 멈춰서 있고, 그런 나를 레스티아 경이 돌아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레스티아 경은 묵묵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 시선이 얼른 따라오지 않고 뭐하냐고 묻는 듯했다.

폐를 끼치면 안 돼. 나는 멈췄던 발을 움직여 레스티아 경을 향해 다시 걸어갔다.

“두 분, 진짜 잘 어울리시지 않아?”

청소를 하던 중이었는지 청소도구를 한가득 안고 걸어가는 시녀들의 옆을 지나칠 때였다. 자기들끼리 작게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내 신경을 잡아끌었다.

“응, 나란히 서 계시면 지켜보고만 있어도 눈이 즐겁지.”

“역시 인연이라는 건 따로 있는 것 같아. 원래 두 분 다 연인이 있었지만 결국은 운명을 따라 이어졌다는 느낌 아니야?”

“진짜 운명적인 사랑이야. 두 분이 이어진다면 역사서에 기록되어야 할 걸.”

무의식중에 발이 멈췄다.

잔뜩 흥분한 얼굴로 뺨을 붉히며 대화를 나누던 시녀들이 동시에 꺄악! 작게 비명을 내질렀다.

“제국의 황자인 마탑주와 이세계에서 온 성녀라니. 진짜 소설보다 더 로맨틱한 이야기잖아!”

나와는 반대편으로 걸어가는 시녀들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움찔 손끝을 떨었다. 순간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는 듯한 느낌과 함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고, 한순간 내가 지금까지 뭘 하고 있었던 건지도 알 수 없어졌다.

“레스티아.”

그토록 간절히 바랐고,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귓가를 스친 것도 그때였다.

나는 얼어붙은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는 몸을 겨우 움직여 돌아섰다. 그날처럼 복도에 활짝 열린 창을 통해 바람이 세게 불어 들어왔다.

바람에 날리는 커튼 너머로 레이몬드 2황자가 보였다. 기억 속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하지만 너무도 낯설고 멀게만 느껴지는 모습으로.

성녀 아리아와 대화를 나누며 걸어오던 모양인지,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시녀들이 말했던 것처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거워질 만큼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전하.”

레스티아 경이 가까이 다가가자, 성녀 아리아가 레이몬드 2황자의 귓가에 뭔가를 속삭이는 게 보였다. 그리고 가만히 고개를 낮춰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그가 작게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도.

여전히 근사한 눈동자를 길게 휘며 웃고는 다정한 얼굴로 성녀를 내려다보는 시선을, 나는 넋이 나간 눈으로 바라보았다.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건만, 붉은 문양의 힘이 발동해 내 심장을 쥐고 비트는 것만 같은 통증이 가슴에 내려앉았다. 나는 숨조차 멈춘 채 레이몬드 2황자의 시선과 움직임 하나 하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성녀 아리아가 잠시 내 쪽을 돌아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제야 정신이 들어 조금 움찔했지만, 어차피 후드를 깊이 눌러써서 얼굴도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성녀는 이내 내게서 관심을 잃은 듯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성녀는 레이몬드 2황자에게 짧게 말을 건네고는 혼자 어딘가로 훌쩍 가버렸다.

레스티아 경과 둘만 남게 되자,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며 내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이대로 뒤로 돌아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힘겹게 억누른 채 제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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