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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그대가 없는 세계 (10) (109/152)

05. 그대가 없는 세계 (10)

왠지 아까보다 더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서 나는 무심코 포크를 집었다가 내려놓았다. 생각해보니 입가의 상처를 손수건으로 누르고 있어 뭘 먹을 수도 없었다.

다시 얼굴 위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딱히 뭔가 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닌 듯한데 자리를 뜨지 않는 로이안트 3황자의 존재감이 부담스러웠다. 지금 얼떨결에 손에 쥐게 된 손수건처럼.

우물쭈물하며 로이안트 3황자의 눈치만 보던 나는 문득 처음 이곳에서 눈을 떴을 때 그가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내가 죽었다고 여겨졌던 지난 1년 간 유리 황녀를 포함해 다른 사람들에 대해 언급할 당시, 레이몬드 2황자에 대한 이야기만 묘하게 피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다.

그때는 내가 먼저 그에 대해 묻거나 할 상황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넘어갔었다. 지금이라면 혹시 물어봐도 되지 않을까 싶어 나는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3황자 전하.”

“왜?”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지만 아예 무시당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용기가 생겼다.

“혹시 2황자 전하께……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내 질문에 로이안트 3황자는 별다른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무표정한 눈으로 내 눈을 똑바로 직시해오기만 했다. 나는 그 반응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 다시 쩔쩔맸다.

“난 말해주기 싫은데.”

다행히 로이안트 3황자는 금세 질린 듯 내게서 시선을 떼고 무심히 대답했다. 그리고 앞에 놓인 포크를 들어 샐러드를 뒤적이다 그걸로 다시 나를 척하니 가리켰다.

“널 이대로 보내주는 게 형님을 위하는 건지, 아닌 건지 확신이 안 서. 그리고 너도.”

달그락.

로이안트 3황자가 일부러 손에서 미끄러뜨린 포크가 테이블에 떨어지며 소리를 냈다.

“네가 상처받길 바라는 건지, 그 반대인 건지 모르겠어.”

똑똑!

방 안을 울리는 노크 소리에 서로를 바라보던 시선이 동시에 문가로 향했다.

“전하, 신관님께서 오셨습니다.”

신관이 왔다는 소리에 로이안트 3황자는 이대로 방을 나가려는 듯 일어서서 몸을 돌렸다. 그대로 문가로 걸어가 문고리를 잡아채는 손을 본 나는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앗, 저……!”

“뭐야, 난 이제 아무것도 말 안 해줄 거야.”

쪼르르 쫓아 나온 내가 성가신 듯 로이안트 3황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그런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다 허리를 꾸벅 숙여 보였다.

“바다 근처에 쓰러져 있는 저를 구해서 여기까지 데려와주신 게 3황자 전하라고 들었습니다. 아마 전하께서 구해주지 않았다면 전 거기서 얼어 죽어서 이 자리에도 없겠죠.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허리를 깊이 숙였다 고개를 들자, 생각지도 못한 인사를 들었다는 듯 로이안트 3황자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이내 픽,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럼 그동안 내가 괴롭혔던 거, 유리 녀석한테 비밀로 해줄래?”

“그건 조금…… 힘들 것 같은데요.”

나는 소심하게 대답하고는 내가 감히 로이안트 3황자에게 이런 식으로 대꾸를 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고 조금 우습기도 해, 나도 모르게 입가를 늘이며 웃었다.

입가의 상처를 깜빡하고 헤실거린 대가로 다시 상처가 찢어지는 느낌이 났다. 생각보다 상처가 아파서 나는 한쪽 눈을 찡그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빨리 신관에게 상처를 보여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문가로 눈길을 줄 때였다.

“얼굴 좀 봐.”

갑자기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지기에 뭔가 하고 시선을 들자, 언제 이만큼 다가온 건지 로이안트 3황자의 얼굴이 코앞까지 가까워져 있었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로이안트 3황자가 내 눈높이에 맞춰 고개를 숙여 다가왔다.

숨결이 너무 가깝다고 느낀 찰나, 입가의 상처에 부드러운 입술이 닿았다. 그리고 혀가 상처를 가만히 쓸어내리듯 내 상처를 건드렸다. 따끔한 통증에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뒤로 물러났다.

상처가 아픈 것도 깜빡하고 입가를 손으로 가린 채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로이안트 3황자를 바라보았다.

로이안트 3황자는 어느새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그런 나를 아주 가소롭다는 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리 녀석에게 비밀로 안 해주겠다고 한 벌이야.”

심술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당황해 그대로 굳어버린 나를 내버려둔 채 로이안트 3황자가 문을 활짝 열었다.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던 하녀와 신관이 급히 뒤로 물러나며 고개를 숙였다. 로이안트 3황자는 익숙한 듯 제게 머리를 조아리는 사람들을 지나쳐 방을 나섰다.

“아.”

그러다 뭔가 깜빡한 게 떠오른 듯 고개만 돌려 내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로이안트 3황자가 꼼짝도 하지 않고 굳어있는 나를 보더니 씩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리고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고 했던 건 거짓말이야.”

그 말을 남기고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기기 시작한 그가 내게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 보였다.

“그럼 진짜 안녕.”

나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손을 흔들며 걸어가는 로이안트 3황자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 영애……?”

“아가씨, 괜찮으세요?”

넋이 나간 듯 멀뚱히 서 있는 내게, 신관과 하녀들이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말을 걸어왔다. 그제야 정신이 든 나는 허둥대며 로이안트 3황자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뗐다.

신관에게 다친 팔과 다리며 얼굴의 상처들을 보여주는 내내 머릿속에서 로이안트 3황자가 했던 말이며 행동들이 어지럽게 떠다녔다.

나를 죽여버리고 싶다고 말했을 정도로 싫어했었으면서, 갑자기 지나치게 친밀한 행동을 해오는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왜 그런 말을 하고, 그런 행동을 한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어서 나중엔 그냥 생각하기를 포기해버렸다.

저 대단한 황족의 머릿속을 내가 완벽하게 이해하려는 게 애초에 무리인 것 같기도 했다. 어차피 다 별 의미 없는 거겠지, 날 골탕 먹이려는 심술일 뿐이었겠지, 생각하기로 했다.

다만, 이쪽도 조금은 분한 마음이 드니까…… 유리 황녀 전하와 재회하게 되었을 때 들려줄 이야기 주머니에 하나를 더 추가하기로 했다.

“준비는 다 끝나셨습니까?”

짐이라고 할 것도 없어 하녀들이 챙겨준 겉옷 몇 개만 가방에 담아 성을 나왔다. 기사의 안내를 받아 입구쪽으로 가니, 줄곧 마차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듯한 레스티아 경이 자연스레 손을 내밀었다. 나는 혼자 탈 수 있다고 거절하려다 그냥 그가 내민 손을 잡고 마차에 올랐다.

레스티아 경을 마주하자 절로 몸이 긴장되었다. 이 사람 덕분에 수도로 돌아갈 수 있게 되긴 했으나, 눈앞의 마법사는 내 얼굴을 똑바로 보면서 내가 정말 싫다고 말한 사람이었다.

그렇데 대놓고 내 존재 자체가 견딜 수 없다고 말한 사람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을까. 그래도 유일하게 나를 도와주려는 사람에게 지나치게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딱히 내게 이롭진 않을 터. 나는 바짝 얼어붙은 채 애써 경계 어린 시선을 감췄다.

얌전히 의자에 앉아 창문 너머를 응시하고 있자, 출발하라는 레스티아 경의 명령에 따라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마 레스티아 경의 호위를 위해 따라온 듯한 황실의 기사들도 말을 타고서 뒤에 따라붙는 게 보였다.

흔들림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편안하게 굴러가는 마차에 앉아 나는 무릎 위에 올려두었던 손을 꾸욱 힘주어 쥐었다.

드디어 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자각하니 가슴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돌아갈 수 있다. 유리 황녀와 알렌 4황자가 있는 수도로, 그리고 레이몬드 2황자의 곁으로.

솔직히 말하면 아직은 기쁘고 설레는 마음보다는 두려움이 더 앞섰다. 내가 사라졌던 세계. 내가 모르는 1년이 지나버린 세상에서, 내가 사랑했던 이들이 어찌 변했는지 알 수 없어 불안했다. 레이몬드 2황자에 대해선 일부러 화제를 피하던 로이안트 3황자의 태도도 불안을 가중했다.

나는 우물쭈물하며 레스티아 경의 눈치를 살폈다. 안절부절못하며 저를 힐끔거리는 내 시선을 느낀 건지, 레스티아 경이 의아한 시선을 던져왔다.

“저, 2황자 전하는…… 잘 지내고 계신가요?”

머릿속으로 여러 번 말을 고민하다 간신히 입 밖으로 내어 물어보았다. 질문을 들은 레스티아 경의 한쪽 눈썹이 위로 휘었다. 워낙 표정 변화가 없는 사람이라 작은 변화에도 감정을 알아채기 쉬웠다.

“3황자 전하께 아무것도 듣지 못하셨습니까?”

“……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니 그가 흐음, 하고 뭔가를 생각하는 얼굴을 했다. 레스티아 경은 금세 평소와 같은 무표정으로 돌아와 대답했다.

“전하께선 무사히 잘 계십니다.”

그리고 내 표정을 살피듯 잠시 시선을 똑바로 마주해오다 짧게 뒷말을 덧붙였다.

“지금은요.”

어딘가 의미심장한 대답이었다. 굳이 「지금은」이라고 덧붙인 이유가 뭘까. 정말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순간이동 마법진이 있는 곳까지만 가면 금방이지만, 여기서 거기까지 가는 길도 꽤 돼서요. 중간에 보이는 마을에서 쉬는 걸 포함해서 꼬박 이틀은 달려야 하니 편히 계시죠.”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상황을 알려주길 바랐는데, 그 말을 끝으로 레스티아 경은 더 이상 그에 관해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말을 돌렸다. 등받이에 머리를 기댄 채 아예 눈까지 감아버렸다.

나는 레스티아 경에게 더 묻지도 못하고 혼자 초조해져선 발을 동동 굴렀다.

레이몬드 2황자가 잘 지내고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도 어째서인지 불안한 마음은 가시질 않았다.

아직도 내가 사라졌던 세상이 1년이라는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어깨까지 길어있던 로이안트 3황자의 머리칼처럼, 내가 모르게 많은 것들이 변했을 것만 같았다. 유리 황녀도, 알렌 4황자도, 그리고 레이몬드 2황자도.

알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을 억누른 채 나는 애꿎은 치마만 쥐어뜯듯이 움켜쥐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그러니 너무 불안해하지 마.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듯 몇 번이고 속삭여봤지만 가슴 속을 장악한 불안은 쉬이 가시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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