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그대가 없는 세계 (9)
“제가 지금까지 들은 사실을 황녀 전하께서 알게 되시면 어떻게 될지 궁금해지네요.”
“아마 그 자그마한 주먹에 딱 죽지 않을 만큼만 두들겨 맞지 않을까 싶어.”
레스티아 경이 담담히 내뱉은 말에 로이안트 3황자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못 본 척 입을 다물어 줄 수 있을까, 레스티아 경.”
“…….”
“경도 나를 적으로 돌려서 딱히 좋을 일은 없을 텐데.”
웃고 있지만 서늘한 기운을 흘리는 금색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하던 레스티아 경이 다시 찻잔을 들었다.
“그렇긴 하죠.”
레스티아 경은 아직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로이안트 3황자가 아닌 내게 시선을 던지며 답했다.
“3황자 전하께서 어떤 마음으로 이 분을 숨겼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고요.”
“음? 비밀로 해줄 거야?”
“글쎄요, 아직 저도 어떻게 할지 고민 중이라.”
그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대답으로 로이안트 3황자가 못마땅한 얼굴을 하게 만들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이번엔 내 쪽으로 질문이 돌아왔다.
“이제 와서 왜 2황자 전하께 돌아가고 싶다는 겁니까?”
제대로 대답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 질문에 당황한 사이, 레스티아 경이 싸늘한 시선으로 나를 몰아붙였다.
“당신은 이미 아델 공작을 선택하지 않았나요? 전하께서 보는 앞에서 그 사람을 택했잖습니까. 그런데 왜?”
로이안트 3황자도 이건 처음 듣는 사실이라는 듯 놀란 얼굴로 레스티아 경을 돌아보았다.
“어째서 아델 공작이 아니라 2황자 전하께 돌아가려는 겁니까?”
비수처럼 내리꽂히는 질문들에 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레이몬드 2황자가 보는 앞에서 리하르트 아델의 손을 잡고 등을 돌렸던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애써 얼굴도 보지 않으려 했기에 그 순간에 레이몬드 2황자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 사람의 고백을 거절하고 밀어냈던 때의 눈동자만은 지금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상처받은 얼굴, 리하르트 아델에게 버림받았을 때의 나와 똑같은 눈을 하고 있던 금색 눈동자.
「문」과 「핵」의 존재에 대해 입을 연 것도 아닌데, 예의 그 통증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다시 침묵이 내려앉은 공간에서 나는 힘겹게 한 글자 한 글자를 내뱉었다.
“그때도, 지금도…….”
무릎 위에 얹어둔 손을 마주 움켜잡고서, 내게 쏟아지는 두 사람의 시선을 견디며 말했다.
“제가 2황자 전하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요.”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말해야 했던 것, 유일하게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을 털어놓은 뒤 떨리는 시선을 들어 레스티아 경을 바라보았다. 내 진심이 전해지기를, 제발 나를 도와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시선이 마주친 레스티아 경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이었다. 그리고 그걸 이제 와서 뭐하러 말하려는 거냐고 묻는 듯한 표정이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어차피 이제 곧 다 끝날 일이야.”
레스티아 경과 로이안트 3황자가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 레스티아 경이 뭔가를 더 말하려는 찰나, 로이안트 3황자가 냉랭한 투로 말을 잘랐다.
“앞으로 짧게는 3일, 멀게는 봄이 올 때까지만 기다리면 돼. 그럼 다 정리가 될 테니까.”
긴 손가락이 나를 가리켰다.
“그땐 그쪽도 정리할 수밖에 없게 될 테지.”
그 여자애가 정했던 내기의 기한과 똑같은 숫자를 언급하며 로이안트 3황자가 웃었다.
정리가 된다니……? 나는 주어가 명확하지 않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의아한 얼굴을 했다.
“제가 데리고 가 드릴까요?”
나는 놀란 눈으로 레스티아 경을 바라보았다. 그토록 바랐지만, 이렇게 쉽게 나오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말이 레스티아 경의 입에서 흘러나온 탓이었다.
“레스티아 경.”
곧바로 경고조의 낮은 음성이 날아들었다. 로이안트 3황자의 눈동자가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들 태세로 사납게 변했다.
“저도 오늘 결계 점검만 끝나면 곧장 수도로 돌아갈 예정이었거든요. 2황자 전하께 전해드릴 것도 있고. 거기에 영애가 하나 더 추가된다고 달라질 건 없으니까.”
그러나 방 안의 공기를 순식간에 얼어붙게 만드는 위압감에도 레스티아 경은 태연하기만 했다. 원래 성격이 그런 것인지 따로 믿는 구석이 있어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직접 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요. 당신이 사라졌던 세계가 어떻게 변했는지.”
나는 멍하니 레스티아 경을 쳐다보기만 하며 머뭇거렸다. 갑자기 너무 쉽게 일이 풀리니 오히려 망설여졌다. 이렇게 쉽게 될 수 있는 거였나?
뒤늦게 겁많은 성격이 삐죽 고개를 들었다. 아직 눈앞에 있는 마법사가 진짜 내 편인지 아닌지도 가늠하지 못한 상태라 더 그런 것 같았다.
그래도 지금 믿을 사람은 이 사람밖에 없다는 것도 모르진 않았다. 아마 이 사람의 앞에 그런 식으로 내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지금의 기회조차 없었을 거라는 사실도. 나는 짧은 망설임을 접고 답했다.
“저를 데리고 가주세요.”
“잠깐, 난 아직 허락 안 했어.”
로이안트 3황자가 노골적으로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며 다시 끼어들었다. 싸늘한 눈동자가 내가 아닌 레스티아 경을 노려보았다.
“대체 무슨 꿍꿍이야? 날 이해한다며? 경도 헤더 영애에게 별로 좋은 감정은 없을 텐데?”
“그래서 데리고 가 드리겠다는 거예요.”
말끝에 레스티아 경이 처음으로 미소지었다. 눈동자를 사르르 접으며 한쪽 입꼬리를 당겨 웃는 얼굴이 너무 예뻐서, 나도 모르게 홀린 듯 바라보았다. 예쁘지만 뾰족한 가시가 돋친 장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선을 빼앗겨 무심코 손을 댔다가는 따끔한 맛을 보게 되고야 마는.
“저도 실은 영애가 정말 싫거든요.”
* * *
나는 빵을 크게 베어 물고 우물우물 씹어 삼키고는 샐러드와 수프를 부지런히 입안으로 가져갔다. 샐러드도 씹어 삼키고 수프를 거의 마시듯 떠먹고는 메인 요리에도 나이프와 포크를 가져갔다.
열심히 고기를 썰어서 입안으로 나르는데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이 방에서 음식들을 마주했을 때부터 한 시도 내게서 떨어지지 않는 시선에 얼굴 피부가 따끔거리는 듯했다.
“음식이 잘도 넘어가네.”
테이블에 한쪽 팔을 걸치고 턱을 괸 로이안트 3황자가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나는 로이안트 3황자의 눈치를 보면서도 포크로 슬그머니 샐러드를 찍어 입안에 욱여넣었다. 배가 고프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일단 체력을 길러둬야 할 것 같아서 의무적으로 음식을 씹고 삼키고 있었다.
레스티아 경이 결계를 점검하는 동안 내게 그 지저분한 몰골을 좀 어떻게 하고, 뭐라도 먹어서 배를 채워두라고 했던 말을 착실히 따르는 중이었다.
“난 누구 덕분에 수명이 10년은 줄어든 기분인데 말이야.”
내가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 몸을 씻고 단장을 하는 사이에는 보이지 않더니, 식사가 나올 즈음 다시 불쑥 나타난 로이안트 3황자였다.
그는 못마땅한 눈으로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나를 감시하듯 지켜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앞에 두고 식사를 하자니 먹은 게 전부 체할 것 같았다. 나는 애써 모른 척 열심히 눈앞에 있는 음식에만 집중했다. 뭐라도 많이 먹어둬야 움직일 기운이 날 테니까.
“지금이라도 난 얼마든지 헤더 영애가 못 가게 막을 수 있다는 건 알지?”
내가 별다른 반응도 없이 묵묵히 식사만 하는 모습이 더 신경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로이안트 3황자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서늘한 시선을 던져왔다. 나는 내심 움찔했으나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히 대꾸했다.
“그렇게 되더라도 최소한 레스티아 경이 유리님께 제 얘기를 전해주지 않으실까 싶어서요.”
로이안트 3황자의 얼굴이 불쾌한 빛을 띠며 일그러졌다. 감히 네 주제에 말대꾸를 해? 그런 표정이었다. 나는 속으로는 잔뜩 기가 죽어 위축됐지만, 왠지 여기서 밀리면 안 될 것 같아 없는 용기를 다 끌어모아 배짱을 부렸다.
“레스티아 경도 내가 진짜 마음만 먹으면 매수하는 건 일도 아니거든?”
“그럼 그렇게 하세요.”
“허.”
어이가 없다는 듯 로이안트 3황자가 헛웃음을 흘렸다.
“완전 순둥인줄 알았는데 그것도 전혀 아닌가 보네.”
“3황자 전하께서 그렇게 보신다면 그런 거겠죠.”
“한마디를 안 지네.”
손바닥에 식은땀이 배어날 정도로 긴장했지만 제법 배짱을 부려본 효과가 있었다. 잠시 기가 막혀 하던 로이안트 3황자의 얼굴에서 적의가 스르륵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하찮은 생쥐가 사자 무서운 줄 모르고 따박따박 말을 받아치는 게 너무 어이가 없어 빈정거릴 의욕도 잃은 것 같았다.
“신관 불렀으니까 곧 올 거야. 상처 보여줘.”
로이안트 3황자의 시선이 내 몸 여기저기에 칭칭 감겨있는 붕대를 확인하듯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왠지 머쓱해진 나는 팔을 감추듯 테이블 아래로 내렸다.
“괜찮아요,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수도로 돌아가면 유리 녀석이 볼 거 아냐. 헤더 영애 가둬두고 그런 꼴로 만들어 놓은 거 알면 유리 녀석이 나 절대 가만 안 둘 걸.”
그런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듯 로이안트 3황자가 단호하게 말했다. 절반 정도는 진심이 느껴지기도 해서 왠지 조금 긴장이 풀렸다. 자기보다 한참 작고 어린 여동생의 눈치를 보며 걱정하는 모습이, 조금 우습기도 했고.
“황녀 전하께는 정말 꼼짝도 못 하시네요.”
갑자기 긴장이 풀려서일까. 무심코 작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질렸다는 얼굴로 자기 팔을 문지르던 로이안트 3황자가 다시 내 쪽을 돌아보는 게 느껴졌다. 왠지 살짝 경직된 로이안트 3황자의 표정에 내가 뭔가 또 심기를 건드렸나 싶어 얼른 웃음기를 감췄다.
“아.”
웃으면서 입가의 상처가 더 벌어졌는지 따끔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찌푸리며 움찔했다. 손등으로 슬쩍 상처 부근을 눌렀다 떼자 손등에 피가 묻어나왔다.
생각보다 상처가 심한 것 같아 미간을 찌푸리는데, 로이안트 3황자의 손이 슥 다가왔다. 부드러운 촉감의 손수건이 내 입가에 닿았다. 나는 얼떨결에 손수건을 받으려 손을 뻗었다가 로이안트 3황자의 손을 덮고는 흠칫 놀라 손을 뗐다.
로이안트 3황자도 잠깐 멈칫하는 것 같더니 손수건을 아예 내 손에 쥐여주고 손을 물렸다.
“받아.”
“감사……합니다.”
여기서 또 괜찮네 마네 실랑이를 벌이는 것도 우스울 듯 싶어 나는 얌전히 호의를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