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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그대가 없는 세계 (8) (107/152)

05. 그대가 없는 세계 (8)

* * *

창 아래로 보이는 까마득히 먼 바닥을 내려다보며, 나는 창틀을 까드득 손톱으로 긁으며 움켜쥐었다. 상처로 가득한 손이 욱신거렸다.

현재 내가 있는 곳은 죄인을 가둬두기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높고 가파른 구조의 탑이었다. 그 중에서도 제일 꼭대기층에 위치한 게 내가 지금 머무르고 있는 방이었고.

창문은 언제든지 열 수 있지만 여기서 뛰어내린다면 목이 꺾여 죽든 다리가 부러지든 어딘가가 부러져서 더는 도망칠 수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저 아래에는 사나운 개들과 함께 병사들이 교대로 경비를 서고 있었다.

이 방의 유일한 출입구인 문은 바깥에서 잠긴 채로 복도에는 몇 명이나 되는 기사들이 지키고 있다. 마찬가지로 수시로 교대를 하며 1분 1초도 자리를 비워두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 문을 운 좋게 부실 수 있다 해도 저길 지나 여기서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바깥으로 통하는 모든 출구는 봉쇄되어 있었다. 나는 로이안트 3황자의 말대로 이곳에서 단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하녀들이 식사를 가져오는 때를 틈타 문을 빠져나가려고도 해봤고, 커튼과 옷가지들을 묶어 긴 줄을 만들어 창문을 통해 빠져나가려고도 해봤다. 울고 빌며 사정을 해보기도 했고, 아무것도 먹지 않기도 했으며, 창의 유리를 깨어 일부러 몸에 상처를 내보기도 했으나 전부 소용이 없었다.

애초에 내가 죽든 말든 아무 상관도 없는 로이안트 3황자를 상대로 내 몸을 해하는 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건 알았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매달려본 것이었으나, 피를 너무 흘려 정신을 잃고 정말 죽을 뻔한 뒤에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의미 없이 시간만 흐르고, 벌써 해가 지고 뜨기를 6번째 반복한 날이었다.

그동안 나는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다. 반쯤 미쳐가고 있다는 표현이 적절했을 것이다. 하녀들이 가져다주는 식사에는 거의 손도 대지 않았고, 몇 번 까무룩 기절하고 이대로면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에만 아주 가끔 물을 마시고 음식을 먹었다.

정말 죽지 않을 정도로만 먹고 마시고 잠들었다. 그 외에 시간에는 로이안트 3황자를 설득하거나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문」의 안쪽에 대해, 그곳에서 만났던 여자애에 대해, 그리고 핵의 존재에 대해 몇 번이고 말하려 했다. 나를, 레이몬드 2황자에게 보내주기만 하면 모든 것이 평화롭게 제자리를 찾을 것이라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말하려 했다.

그런데 말할 수 없었다. 말을 하려는 순간 그대로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은 통증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으니까.

계약 위반이에요, 하고 말하는 여자애의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반신반의. 자신을 신이라 칭하던 여자애의 존재를 계속 의심해왔으나, 「문」의 존재조차 언급하지 못하게 하는 가슴의 통증에 더는 의심조차 하지 못하게 되었다.

여자애의 존재도, 내기의 조건도, 전부 진짜였다. 앞으로 남은 3일 동안 레이몬드 2황자를 만나지 못하면 나는 죽게 될 거고, 이대로 모두의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질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 땅에 마물이 사라진 평화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붕대로 칭칭 감아둔 손과 팔의 상처가 벌어졌는지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로이안트 3황자는 철저했다. 내가 손목과 목에 상처를 입고 피를 너무 쏟아 죽을 뻔했을 때조차 신관은 불러주지 않았다. 혹시라도 나에 대한 이야기가 신전을 통해 새어나갈지도 모르니,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기 때문인 듯했다. 영주성에 속한 의원이 다녀가 벌어진 상처를 지혈하고 꿰매고, 쓰디쓴 약을 먹게 한 게 다였다.

“저, 저기. 아가씨.”

창문을 활짝 열어둔 채 창틀에 걸터앉아 멍하니 바깥만 응시하고 있는데, 누군가 똑똑 노크를 하고 방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럽게 나를 부르는 여자애의 목소리에도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정확히는 돌아볼 기운조차 없었다.

“오, 오늘도 아무것도 안 드신 거 알아요. 그러다 또 쓰러지시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아마 또 음식을 들고 온 것 같은데. 아침에 가져다 둔 음식에 전혀 손을 대지 않은 것 같으니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착한 아이였다. 워낙 나를 무서워해서 말을 길게 섞어본 적은 없지만, 이따금 나를 걱정스럽게 쳐다보며 말을 걸어오는 것만 봐도 나쁜 아이가 아니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드시기 힘드신 거면, 따뜻한 수프라도 조금 드시는 게 어떨까요.”

항상 같이 다니는 다른 하녀 아이도 말을 걸어왔다. 아마 이름이 엔젤이었던가. 가끔 실수로 다른 하녀 아이가 이름을 부르면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티를 내는 게 귀여웠던 기억이 났다.

나는 두 사람의 목소리를 못 들은 척 창틀에 기댄 채 눈을 감아버렸다. 찬바람에 피부가 얼어붙는 것만 같았지만 창문을 닫고 싶진 않았다.

차라리 여기서 그냥 뛰어내릴까? 죽든 살든 일단 이 방 안에서라도 나가고 싶었다. 숨이 막혔다. 시간은 흐르고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또다시 죽음이라는 단어에 근접해가는 현실이 분했다.

“오늘도 엄청 추워요. 찬바람을 너무 쐬면 감기 걸리실 텐데…….”

조심스럽게 창문을 닫기를 권하는 어린 하녀의 목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을 때였다.

오늘은 왠지 바깥이 소란스러운 느낌이 났다. 며칠 동안 잠을 잘 때 빼고는 대부분을 창밖을 내다보고 있으니, 그 미묘한 차이가 느껴졌다. 어딘가 묘하게 성 안의 분위기가 평소와 달랐다.

똑똑.

“들어간다.”

그날 이후로 한번도 날 찾지 않았던 로이안트 3황자가 모습을 드러낸 것도 그때였다. 노크와 동시에 문을 열어젖힌 로이안트 3황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얘기는 들었지만 진짜 엉망진창이네.”

금색의 눈동자가 씻지도 않아 먼지와 뒤엉켜 산발이 된 머리카락부터 잔상처가 가득한 얼굴, 붕대로 칭칭 감겨있는 팔과 다리까지 천천히 훑어내렸다. 경멸 가득한 비소가 방안을 울렸다.

“헤더 영애가 지금 당장 죽는다 해도 내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 정도는 알 텐데? 적당히 하고 네 몸은 네가 챙겨.”

나한텐 일절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더니, 아마 그동안 내가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않는다는 보고 정도는 받고 있었던 듯했다. 로이안트 3황자는 쓸데없이 애를 쓰는 내가 한심해 죽겠다는 듯 혀를 찼다.

“뛰어내릴 것도 아니면서 뭘 온종일 창문 앞에만 매달려 있어? 시위하는 거라면 소용없으니까 빨리 내려와.”

창틀에 위험하게 걸터앉아있는 내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못마땅한 시선이 날아들었다. 나는 그 시선마저 외면한 채 다시 창 아래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얼굴이 제법 익숙해진 기사들이 제복을 갖춰 입고서 성의 입구로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확실히 오늘은 뭔가 평소와 달랐다.

“클레어 헤더.”

이상하게 초조해 보이는 로이안트 3황자의 태도도 그랬고.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멀리서 달려오던 마차가 성의 입구를 통과해 들어오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마차의 문이 열리고, 젊은 남자 하나가 마차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나는 저 사람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남자가 보라색의 후드를 젖히며 얼굴을 완전히 드러냈다. 얼핏 보면 여자라고 착각할 만큼 선이 가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나는 눈동자를 크게 떴다.

우연의 일치인지 그 순간 남자가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보았다. 상대와 눈이 마주쳤다는 생각이 들었고, 등 뒤에서 내 쪽을 향해 급하게 걸어오는 로이안트 3황자의 기척이 느껴졌다.

“당장 내려오……!”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지금은 도박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내 팔을 붙들려는 로이안트 3황자의 손을 피해 그대로 창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클레어 헤더!”

내 이름을 부르는 로이안트 3황자의 외침에 이어 하녀들의 비명이 영주성을 울렸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몸이 아래로, 더 아래로 추락하는 느낌은 생각보다 더 끔찍했다. 저 사람이 내가 기억하는 사람이 맞을까. 정말 저 마법사가 나를 도와줄까.

이번엔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 그 애와 약속한 시간이 끝나기도 전에 이렇게…….

추락한 몸이 처참히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두려운 상상을 이어나가던 나는 순간 몸이 두둥실 떠오르는 듯한 감각에 눈을 번쩍 떴다.

“볼 때마다 사람을 놀라게 하시는 분이군요.”

반투명한 원이 내 몸을 감싼 채 허공에 두둥실 떠올라 있었다. 거의 땅에 닿기 직전에 간신히 몸이 떠오른 것인지, 천천히 내 앞으로 걸어오는 남자와 시선이 정면이었다.

무표정했지만 남자 역시 무척 놀란 듯 짧게 한숨을 내쉬며 내 쪽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반투명한 원이 바닥을 뭉개며 내 몸을 내려두고는 빛과 함께 사라졌다.

예상대로 남자는 마법사. 멜린트 영지에서 영주와 함께 식사를 했던 자리에서 보았던 마법사가 분명했다. 레이몬드 2황자로부터 자신의 부관이라 소개를 받았었고, 식사 시간 내내 제 주군에 대한 자부심을 아끼지 않고 드러냈던 남자였다.

이름은 아마도 레스티아. 여자만큼 예쁘장한 얼굴과 그에 대비되는 낮은 목소리가 인상이 깊어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이건 아무래도 설명을 들어야겠네요.”

레스티아 경의 시선이 내게서 옮겨가 탑의 꼭대기층에서 이쪽을 내려다보는 로이안트 3황자에게로 향했다. 무심하지만 서늘한 기운을 뿜어내는 눈동자가 해명을 요구하듯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째서 죽었다고 알려진 영애께서 이곳 슬란테아에 계신 건지.”

* * *

달각.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무거운 정적을 깼다. 우아하게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은 레스티아 경의 시선이 맞은편 소파의 끄트머리에 앉은 내게 와 닿았다.

나와 로이안트 3황자, 레스티아 경까지. 우리 세사람은 응접실에 마주 앉아 한참동안 대화를 나눴다. 대화를 나눴다기보다는 내가 일방적으로 얘기를 하고 있었을 뿐이지만.

나는 말할 수 없는 부분은 제외하고, 말할 수 있는 건 전부 털어놓은 뒤 레스티아 경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마물에 잡아먹힌 후에 어떤 경위로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는 모른다는 식으로 얼버무려야 했다.

그건 정말 어쩔 수가 없었다. 이곳 슬란테아에 온 뒤로 내가 갇혀있었다는 사실을 털어놓을 때는 레스티아 경의 표정이 잠깐 굳긴 했지만 그 외에는 줄곧 무표정이라 속내를 읽기가 어려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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