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그대가 없는 세계 (7)
방금 그건 뭐지,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왼쪽 가슴께를 내려다보았다. 통증은 사라졌지만, 그 순간의 기억은 잔재하고 있었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만큼 끔찍하게 아팠던 고통이 선명하게 남아서 나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
“일부러 대답을 회피하려고 연기하는 거라면 소용없다는 것만 알아둬.”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쁜 숨만 내뱉고 있자, 처음엔 놀라는 것 같던 로이안트 3황자가 한숨과 함께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똑바로 대답해.”
서늘한 경고조의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네가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직설적인 질문이 날아와 박혔다. 내가 움찔하자 더더욱 의심스러운 시선이 내리꽂혔다.
“아델 공작이 분명히 봤다고 했어. 네가 마물에게 잡아먹히는걸. 그 자리에 있었던 다른 기사들도 똑같이 봤고. 다들 네가 죽었다고 생각했어. 네 장례식까지 치렀다고. 그게 벌써 1년도 전의 일이야. 그런데 어떻게?”
로이안트 3황자가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 채 허리춤의 검에 손을 댔다.
“너, 클레어 헤더가 맞긴 해?”
지금 당장 너 같은 건 단칼에 없애버릴 수도 있다고 말하는 듯한 싸늘한 시선 앞에서 나는 긴장된 숨을 삼켰다. 어디서부터 어디서까지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어설프게나마 정리를 하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때 마물에게 잡아먹힌 건 맞아요. 하지만 저도 제가 어떻게 살아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눈을 떴을 때 이미 「문」의…….”
그러나 말을 채 잇기도 전에 또다시 시작된 가슴의 통증에 나는 헉 괴로운 숨을 들이켰다. 왼쪽 가슴의 옷깃을 쥐어뜯듯이 움켜쥔 채 몸을 숙였다. 커헉,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며 바닥에 이마를 댔다. 차가운 바닥에 피부가 닿자 겨우 정신이 들었다.
같은 통증이었다. 두 번 다 내가 「문」의 안쪽에 대해 언급하려고 한 순간이었다.
나는 더듬거리며 왼쪽 가슴께를 손으로 짚어보다가 옷의 목 부분을 잡아 아래로 확 끌어내렸다.
“잠깐, 뭐하는……!”
그리고 통증이 느껴졌던 곳을 바라보자 왼쪽 가슴 위에 알 수 없는 붉은 문양 하나가 새겨져 있는 게 보였다. 이게 대체 뭐지.
―그게 우리의 계약서예요.
새하얀 피부와 대비되어 더 선명하게 보이는 붉은 문양을 멍하니 바라보며 혼란스러워하던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귓가에서 여자애의 목소리가 되풀이되는 듯했다. 그 애를 만났을 때의 기억들이 기다렸다는 듯 하나둘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 애가 말했던 계약서라는 게 이 붉은 문양을 말하는 것이고, 이 문양 때문에 통증이 생기는 거라면.
‘말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거구나.’
내가 느꼈던 그 끔찍한 통증들은 내기의 조건을 충족시키기 전까지는 「문」의 안쪽도, 핵의 존재도 언급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거였다.
이 낙인과 같은 문양과 통증은 환각도, 거짓도 아니다.
나는 그제야 여자애를 만났던 그 모든 기억들이 꿈이 아닌 현실임을 자각했다.
―그럼 9일, 혹은 그보다 더 빨리 우리가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 여자애와의 만남도, 그 애와 내기를 하게 된 것도, 전부 꿈이 아니란 뜻이었다.
약속된 9일 후 레이몬드 2황자에게 내 마음을 전하고, 똑같은 마음을 전해 받지 못하면 나는 죽게 된다. 나를 알고, 내가 사랑했던 모두 이들의 기억 속에서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지워진 채로.
그 애가 말했으니까. 분명 그렇게 될 것이다.
유리 황녀도, 알렌 4황자도, 시온도, 리하르트 아델도, 성녀 아리아도 모두 나를 잊을 것이다. 그리고…… 레이몬드 2황자도. 나를 잊고, 나를 좋아했었다는 사실조차 잊을 것이다. 나를 잊고서 다른 여인을 마음에 들이고 그녀에게 사랑한다 속삭이고 가슴에 품은 채 살아갈 것이다.
나는 다시 가슴께를 손으로 꾹 눌렀다. 가슴이 답답하고 아팠다. 심장을 쥐어짜내는 듯했던 통증보다 더한 고통과 공포가 몸을 휘감았다.
싫어…….
그 사람을 위해서였다고는 해도, 내가 먼저 그 손을 밀어냈었으면서. 상처받은 그 얼굴을 보면서도,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다 말하며 돌아섰었으면서. 그 사람이 보는 앞에서 다른 이와 손을 잡고 걸어갔었으면서.
이제 와서 내가 상처를 받을 자격이나 있을까. 이제 와서 좋아한다는 마음을 전해도 되는 걸까.
내게는 잠깐이었지만, 그동안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레이몬드 2황자에게 달리 사랑하는 이가 생겼다면? 이미 나 같은 건 까맣게 잊어버렸다면?
굳이 내 마음을 전할 필요가 있는 걸까.
그 애가 더는 내 운명에 개입하지도, 내 주위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도 않겠다고 했지만…… 그것도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힘껏 움켜쥐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언니가 그랬잖아요.
지금의 나를 예상한 것처럼 여자애가 말했었다.
―마물에게 집어삼켜지기 직전에, 죽음을 직감한 그 순간에 간절히 바랐잖아요.
또다시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고 무력하게 주저앉으려는 나를 가리키며,
―레이몬드 2황자에게 마음을 전하지 못한 걸 죽을 만큼 후회했었잖아요.
비웃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린 채 생각했다.
그저 조용히 이대로 흔적도 남기지 않는 최후를 맞이하는 게, 어쩌면 나다운 결말일지도 모른다고. 더는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고, 누구에게도 상처받지 않고,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난 정말 그걸로 괜찮은 건가?’
죽음을 앞둔 순간에도 그토록 간절히 바랐던 것인데, 한 번 더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스스로 그걸 포기해 버려도 괜찮은 걸까. 이대로 또다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는 게 진정 내가 바라는 일일까.
눈으로 뒤덮인 산속에서, 사라진 부모님을 대신해 에젯트 헤더가 나를 데리러 왔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줄곧. 나는 참고 견디고 포기하면서 살아왔다. 내 분수를 알고 말하고 행동했으며, 주제넘은 꿈은 꾸지도 않았다.
그게 옳다고 생각했으니까. 그게 하찮은 내 인생에는 알맞은 길이라고 여겼으니까.
―헤더 영애를, 클레어를 좋아합니다.
욕심이 났었다.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고 했던 순간에? 부서진 유리 파편 가운데 주저앉아있던 내게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다가왔던 순간에? “클레어.”하고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불러주던 모든 순간들에? 혹은…….
―예쁜 머리카락이 다 흐트러졌잖습니까.
처음 만났던 날, 내 머리칼을 조심스레 넘겨주며 웃었던 그 순간에.
이미 그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리하르트 아델에게 남은 미련을 핑계로 이 사람에게 반하지 않았다고, 나는 이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스스로를 세뇌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왜냐하면, 이렇게나 아름답고 고귀한 존재를 사랑하게 되면 또다시 내가 상처받고 아파하게 될 걸 예감했었으니까. 상처받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계속 부정하고 외면하고 피해왔었던 거다. 레이몬드 2황자를 좋아하게 된 내 마음을.
‘전하고 싶어.’
나는 힘없이 늘어뜨렸던 손을 느리게 움켜쥐었다.
‘전해야 해.’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아도 어떻게든 쥐고서 감았던 눈을 떴다.
‘거절당해도 괜찮아. 상처받아도 괜찮아.’
나는 여전히 작고 무력해 보이기만하는 내 주먹을 내려다보며, 겁쟁이 클레어 헤더에게 선언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더라도, 레이몬드 2황자에게 내 마음을 전하고 싶다고.
그러니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갈 것이라고.
“이봐, 갑자기 뭔 짓이야?”
나는 로이안트 3황자의 날 선 목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들자 로이안트 3황자가 옆으로 고개를 돌린 채 무척 짜증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뭘 보는 건지 몰라도 확인 끝났으면 옷 좀 올리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내가 속옷이 다 보일 만큼 옷을 끌어 내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경악했다. 못 볼 꼴을 보였다는 생각에 당황한 나는 뒤늦게 얼굴을 붉혔다.
사정을 모르는 로이안트 3황자의 입장에서 보면 갑자기 노출증에 걸린 미친 여자로 보였을 듯싶었다. 나는 얼른 다시 옷을 끌어 올린 후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나는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 몸을 바로 하고 앉았다. 로이안트 3황자는 그러고 나서도 한동안 내게 시선도 주지 않고 침묵을 지키더니, 긴 한숨과 함께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이 갑자기 사라지고 나서 남은 사람들이 어떻게 됐는지는 알아?”
그때의 기억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하다는 듯 한숨이 몇 차례 더 이어졌다.
“유리와 알렌 두 녀석들은 말할 것도 없이 울고불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고, 저러다 진짜 둘 다 죽겠다고 황실이 한바탕 난리가 났었어. 예전에 레이몬드 형님과 헤더 영애를 결혼시키겠다고 고집을 부렸던 건 그냥 장난 수준이었지. 난 어마마마와 아바마마가 눈물까지 보이시는 건 태어나서 처음 봤다니까. 덕분에 미카엘 형님까지 완전히 패닉에 빠지고. 거기에 유리 녀석은…… 완전히 넋이 나가선 널 따라 죽고 싶다는 말만 반복해서 다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리하르트 아델 공작은 그때 자기 부하 하나를 죽이려고 들다 거의 반 불구로 만들어버리는 바람에 기사단장 직에서도 해임될 뻔했었지. 그 기사가 널 결계 밖으로 밀어내 죽게 했다고 했던가. 게다가 성녀 아리아며, 신전의 제단화로 그려주기로 약속했던 알테노이즈며, 다들 하나같이 이상해져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고.”
“그리고 레이몬드 형님은…….”
불쾌한 표정이긴 해도 담담히 말을 이어나가던 로이안트 3황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미간을 구긴 채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리더니 아예 입을 닫아버렸다.
왜 레이몬드 2황자에 대한 얘기는 해주지 않는 걸까. 가슴 한구석에서 피어오른 불안한 감정이 나를 초조하게 만들 때였다.
“내가 감이 좀 좋은 편이거든.”
할 말은 이걸로 끝이라는 듯 로이안트 3황자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상할 정도로 네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나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에는 나를 향한 적의만이 가득했다.
“네가 어떻게 살아 돌아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 모두가 겨우 클레어 헤더의 이름을 잊어가는 중이야.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존재가 그렇게까지 영향을 끼치는 게 전혀 달갑지 않아. 이대로 그냥 자연스럽게 잊히길 바라.”
스르릉. 검이 검집에서 빠져나오는 섬뜩한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그러니 이대로 조용히 죽은 듯 살아. 아니면…….”
잘 벼려진 검의 끝이 내 목 앞에 겨누어졌다. 언제고 네 목을 날려버리는 건 일도 아니라는 듯 검을 겨눈 채 로이안트 3황자가 웃으며 말했다.
“진짜로 내가 널 죽여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아.”
다정하게 미소 짓는 모습이 레이몬드 2황자와 너무도 닮은 그 얼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