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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그대가 없는 세계 (6) (105/152)

05. 그대가 없는 세계 (6)

나는 당황해 몸을 일으키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가, 시간이 지나도 여자애들이 돌아오지 않자 침대 끝에 걸터앉은 채로 방 안을 이리저리 돌아보았다.

최근 들어 낯선 공간에서 눈을 뜨는 일이 너무 잦다고 생각하며 여기가 어딜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기에 대답을 하니, 이번엔 제법 나이가 있어 보이는 여자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뒤로 아까 봤던 여자애들도 쪼르르 따라 들어왔다. 이제 보니 셋 다 하녀복을 입고 있는 걸 보니 이곳을 관리하는 하녀들인 모양이었다.

여자애들은 빨개진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었는데, 왠지 그 모습이 나이가 많은 쪽의 하녀에게 한 대씩 맞고서 아파하는 게 아닐까 추측해보았다.

“실례합니다, 아가씨. 저는 이곳을 관리하는 하녀장 소피아라고 합니다. 이 아이들이 아가씨께 무례를 저지른 것 같아 직접 사과를 드리러 왔습니다.”

자신을 이곳의 하녀장이라고 소개한 소피아는 내게 공손히 허리를 숙여 보이더니, 뒤에서 훌쩍거리고 있는 여자애들을 돌아보며 낮게 호통쳤다.

“이 녀석들 빨리 사과드리지 못해?”

“죄, 죄송해요. 잡아먹지 마세요.”

“윽, 흑흑, 저는 드셔봤자 맛도 없을 거예요.”

“이 녀석들이 진짜!”

꿍하고 여자애들의 머리에 다시 주먹이 날아들었다. 역시 아까도 하녀장에게 한 대씩 맞은 게 틀림없었다고 생각하며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여긴…… 어디지?”

어린 하녀들이 왜 저렇게 나를 무서워하는 건지도 궁금하긴 했지만 그보다는 내가 있는 이곳이 어디인지부터 알고 싶었다. 여자애들을 무시무시한 눈초리로 바라보던 하녀장 소피아가 얼른 다시 내 쪽을 돌아보며 공손히 대답해왔다.

“여긴 로이안트 반셀 카지스 전하께서 다스리고 계신 영지 슬란테아입니다. 아가씨께선 바다 근처에서 쓰러져 계신 것을 저희 3황자 전하께서 구해주셨고요.”

나는 소피아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3황자? 여기서 3황자 얘기가 왜 나오지? 슬란테아라면 북부의 얼음 바다로 유명한 영지가 아닌가? 내가 원래 있던 곳은 거의 정반대에 위치한 멜린트 영지였는데?

‘아.’

나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멈칫했다.

‘나, 마물에게 잡아먹혔었지.’

뒤늦게 멜린트 영지에서의 마지막 기억을 떠올리고는 동시에 어둠 속에서 만났던 여자애의 존재도 기억해냈다. 새까만 밤하늘을 닮은 머리칼과 눈동자, 신비로운 외모의 여자애.

―아뇨, 여기는 「문」의 안쪽이에요.

자신을 신이라 칭하며 내게 태연히 「문」과 「핵」에 대해 알려주고, 뜬금없이 내게 내기를 하자고 청해왔던 여자애를.

―기간은 해가 뜨고 지기를 아홉 번 할 때까지.

―언니가 레이몬드 알렉 카지스에게 좋아한다고 말하고, 언니도 그 사람에게서 똑같은 말을 듣기만 하면 돼요.

그건 뭐였을까.

꿈이었을까, 현실이었을까. 둘의 경계가 모호한 기억을 떠올리던 나는 우선 멜린트 영지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분명 리하르트 아델이 내가 마물에게 잡아먹히는 걸 보았다. 그러니 당연히 시온이나 레이몬드 2황자, 더 멀게는 유리 황녀와 알렌 4황자에게도 그 사실이 알려졌을 것이다. 마음이 초조해졌다. 지금 머릿속에 떠올린 이들 모두가 내가 죽었다고 여긴 채 슬퍼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돌아가야 해. 지금 당장. 내가 살아있다는 걸 알려야 해.

내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다가가자 어린 하녀들은 겁에 질려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나는 유일하게 도망치지 않는 하녀장 소피아의 손을 붙들고 다급히 말을 이었다.

“난 멜린트 영지로 돌아가야 해. 최대한 빨리 마차를 구해줄 수 있을까? 아니면 혹시 멜린트 영지 쪽에 연락을 해서 내가 이곳에 있다고 알려줄 수는 없을까?”

“예? 아, 저… 아가씨, 그게 조금…….”

소피아는 당황한 듯 우물쭈물하며 선뜻 대답을 내어주지 않았다.

마음이 바빴다. 나는 일단 소피아의 손을 놓고 옷장에 가까이 다가갔다. 문을 열자 다행히 내가 입을 수 있을 만한 옷들이 보였다. 나는 방에 다른 사람들이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누가 갈아입혔는지 모를 잠옷을 벗고 적당한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내 눈치를 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는 하녀들을 지나쳐 문을 활짝 열었다.

“미안한데, 빨리 부탁……!”

철컹하고 눈앞에서 창 두 개가 교차했다. 예리한 창날에 진로를 가로막힌 나는 놀란 얼굴로 한 걸음 물러섰다.

“죄송하지만.”

서늘한 음성이 머리 위로 내리꽂혔다.

“레이디께서는 허락 없이 이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실 수 없습니다.”

천천히 시선을 가져가자 문의 양옆으로 선 기사들이 나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내가 물러서고 나서도 창은 거둬지지 않았다.

내가 무슨 죄인이라도 되는 듯한 취급에 당황하여 굳어있는데, 소피아가 쩔쩔매며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 아가씨. 일단 들어오셔서 저랑 먼저 얘기를-.”

“아니, 괜찮아. 소피아. 내가 얘기할게.”

성큼성큼 걸어오는 인기척과 함께 어디선가 들어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눈앞에 드리워졌던 창이 너무도 쉽게 치워졌다.

“깨어났다는 얘기 듣고 왔는데 내가 딱 맞춰온 모양이네.”

제자리를 찾아간 창을 지나 내 앞으로 걸어온 로이안트 3황자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이야, 클레어 헤더 영애.”

화려한 금색 머리칼과 눈동자. 형제라는 걸 증명하듯 레이몬드 2황자와 닮은 얼굴이지만, 분위기가 너무 달라서인지 오히려 닮지 않았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예전에 황성 안에서 만났을 때보다 머리카락이 많이 길어서 더 그런 느낌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그새 옷까지 다 갈아입었네?”

로이안트 3황자는 하녀들을 전부 내보내고 방안에 둘만 남게 되자, 내 앞으로 다가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디, 수도로 돌아가려고?”

그가 굳게 닫은 방문을 가만히 응시하던 나는 어느새 손바닥만큼의 거리만 남기고 다가온 로이안트 3황자를 올려다보았다. 키가 워낙 큰 탓에 내려다보는 시선에서 절로 위압감이 느껴졌다. 분명 눈동자가 웃고는 있는데 이상하게 이 사람의 시선이 껄끄럽고 무서웠다. 나는 마주한 시선을 피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며 입을 열었다.

“아뇨, 2황자 전하께서 계신 멜린트 영지로 가야 해요.”

꼭 멜린트 영지가 아니라 곧바로 유리 황녀가 있는 수도로 돌아가도 되는 일인데, 순간 나도 모르게 그렇게 대답하고 말았다.

“레이몬드 형님이라면 지금 거기 없는데? 형님이 수도로 돌아간지가 언젠데.”

그런데 돌아온 대답이 예상과 달라서 조금 당황했다. 그새 레이몬드 2황자가 멜린트 영지를 떠났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터라, 허둥대던 나는 얼른 생각을 정리하고 일의 우선순위를 정해 말을 이었다.

“저, 그럼 저도 수도로 돌아갈 수 있게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수도로 가서 뭐하게?”

질문에 곧바로 질문이 돌아왔다. 나는 초조함에 발을 동동 구르다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2황자 전하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요.”

말을 내뱉자마자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왜 그렇게 대답한 거지. 내가 살아있다는 걸 알리기만 하면 되는 일인데. 굳이 레이몬드 2황자가 아니어도 되는데.

“형님께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생각보다 질문이 집요했다. 첫 번째 대답부터가 잘못 끼워진 단추라 이번엔 진짜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으니, 로이안트 3황자의 입가에 머물던 희미한 미소가 지워졌다.

“뭐,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헤더 영애는 수도로 못 가.”

로이안트 3황자가 멀뚱히 방 한가운데 서 있는 나를 지나쳐 창가로 걸어갔다.

“이곳 슬란테아에서, 이 방 안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가게 될 거야.”

창문을 활짝 연 그가 창틀에 걸터앉아 나를 돌아보았다. 전혀 웃지 않고 가만히 이쪽을 노려보는 시선에 움츠러들면서도, 나는 로이안트 3황자가 단호히 내뱉은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으로 맞섰다.

“……어째서요?”

“그냥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뭘 당연한 걸 묻고 그러냐는 듯 툭 말을 내뱉고는 그가 다시 웃었다.

“덧붙여서 유리 녀석이나 레이몬드 형님께 헤더 영애가 여기 있다는 사실도 알리지 않을 거야.”

열린 창문을 통해 차가운 바람이 헤집고 들어와 목 언저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로이안트 3황자가 창틀에서 내려와 다시 내 앞으로 성큼 걸어왔다. 그는 긴 손가락으로 바람에 헝클어진 내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며 웃었다.

“헤더 영애는 이미 1년 전에 죽은 사람이니까.”

“1년……이라뇨?”

나는 내가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말보다 1년이라는 구체적인 시간에 반응했다. 1년이라니?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다.

내가 마물에게 잡아먹히고 「문」의 안쪽에 끌려가 그 여자애와 대화를 나눈 건 고작해야 몇 시간, 더 길게 본다고 해도 하루 정도였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아직 그 기억이 현실인지 꿈인지도 명확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사라졌던 시간이 1년이라니?

“헤더 영애는 1년 전 멜린트 영지에서 마물에게 잡아먹혔잖아.”

로이안트 3황자는 오히려 그런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사실 나도 지금 긴가민가하거든? 마물에게 잡아먹혔던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하게 돌아온 건지. 혹시 내 부하들이 의심하고 있는 것처럼 진짜 마물이 변신했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아니에요! 저도 정확히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문」의 안…….”

나를 마물로 의심하는 로이안트 3황자의 시선에 나는 허둥대며 그동안 내가 겪은 상황들을 말하려 했다. 그런데 그 여자애가 말했던 대로 「문」의 안쪽을 언급하려는 순간, 심장이 뒤틀리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나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삼키며 왼쪽 가슴께를 감싸 안은 채 주저앉았다.

“뭐야, 왜 그래?”

순간 그대로 심장이 멎을 것처럼 고통스러운 감각에 놀란 나는 겨우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로이안트 3황자도 갑작스레 가슴을 움켜쥔 채 바닥에 주저앉는 나를 보고 무척 놀란 듯했다.

“어이, 괜찮아?”

로이안트 3황자가 몸을 낮춰 시선을 맞추고는 걱정 반, 의심 반의 눈빛으로 나를 지켜보는 게 느껴졌다.

통증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던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도 통증이 다시 되풀이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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