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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그대가 없는 세계 (5) (104/152)

05. 그대가 없는 세계 (5)

“사실 언니한테 선택권은 없어요.”

여자애는 조금도 웃지 않고 있었는데, 나는 이상하게도 저 애가 계속 웃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신기하고 흥미로운 장난감을 발견해 잔뜩 들떠있는 아이처럼.

“언니가 나와의 내기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냥 이 자리에서 없애버릴 거거든요. 어차피 이제 쓸모도 없으니까.”

“…….”

“어떻게 할래요?”

“선택권이 없다면서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를 모르겠네요.”

지금 내가 겪고 있는 모든 상황들이 너무 현실감이 없어서일까. 여자애가 너무도 두렵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적대적인 말투가 나갔다.

“그럼 내기를 받아들이는 걸로 생각해도 될까요?”

그렇다, 아니다, 확실한 대답이 아님에도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던 모양이었다. 여자애가 기뻐하는 반응을 보이며 한 번 더 물어왔다.

나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여자애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당신의 무엇을 보고 믿죠? 내가 2황자 전하께 내 마음을 전하기만 하면, 더는 문의 존재가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말도.”

여자애가 나를 노려보던 눈동자를 한 번 깜빡였다. 딱히 어떤 표정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왠지 내가 이런 말을 꺼낼 줄은 전혀 몰랐다는 듯 조금 당황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왼쪽 가슴께에 불이 붙은 듯 화끈거리는 통증이 피어올랐다. 불에 달궈진 인두로 피부를 지지는 듯한 끔찍한 고통에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통증이 느껴지는 부위를 감싸며 몸을 숙였는데, 어느새 바닥에 쓰러져 고통에 몸부림치는 내가 있었다.

“그게 우리의 계약서예요.”

여자애의 목소리가 들렸다.

헉, 허억. 덜덜 떨리는 입술 사이로 가쁜 호흡을 내뱉으며 시선을 가져갔으나, 여자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갑작스레 찾아왔던 것만큼 순식간에 가슴의 통증이 옅어졌다. 나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여자애도 다시 내 시야로 돌아왔다. 여자애는 식은땀이 맺힌 파리한 안색으로 나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럼 9일, 혹은 그보다 더 빨리 우리가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을게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어 손으로 가슴께의 옷깃을 힘껏 붙들고만 있는 내게 여자애가 말했다. 작별을 고하는 듯한 인사에 당황하는 사이, 여자애의 몸이 점점 희미해지는 게 보였다.

“홀로 조용히 물거품이 된 인어공주와 같은 결말은 맞이하지 않길 바라요.”

“잠깐만!”

또다시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채로 눈앞에서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분위기에 나는 다급히 여자애를 붙잡으려 다가가 손을 뻗었다.

손끝에 차가운 유리의 감촉이 닿았다.

섬뜩한 파열음과 함께 여자애의 모습도 산산조각이 났다.

다급히 손을 거둬들이는 순간 발밑에서 스멀거리던 어둠이 서서히 내 몸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생경하고 두려운 감각에 놀라 일어나 도망치려 했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손과 다리, 배, 가슴, 목을 지나 머리끝까지 전부 새까만 어둠 속에 집어 삼켜질 때까지.

* * *

오늘따라 유독 눈이 더 많이 내렸다.

세상이 전부 새하얗게 뒤덮여 어디가 바다고 어디가 육지인지 거의 구분이 되질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문을 넘어 얼어붙은 바다를 짓밟고 육지로 기어 올라오는 마물들을 보고 있자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지긋지긋했다. 저 마물들도, 시야를 방해하는 새하얀 눈송이도.

“전하, 잠깐 와주셔야겠는데요.”

그들은 집요하게 결계를 깨뜨리려 달려들던 중급 개체 둘을 해치우기 위해 아주 오랜만에 결계 밖으로 나와 있었다.

나온 김에 부하들과 함께 주변에 우글우글 몰려와 있던 개체들을 썰어 넘기던 로이안트는 미간을 좁히며 칼에 묻은 마물의 피를 털어냈다. 반대쪽으로 정찰을 보냈던 부하 하나가 심각한 얼굴로 다가오기에 또 무슨 성가신 일이 생겼나 싶었다.

“무슨 일이야?”

“그게…… 일단 이쪽으로 좀 와주시겠습니까.”

“별일 아닌데 부른 거면 가만 안 둔다.”

“아니, 진짜 저희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렇습니다.”

로이안트는 그새 제 등 뒤로 슬금슬금 다가온 하급 개체를 가볍게 베어 넘기고는 짓밟고 있던 마물의 시체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쯧, 혀를 차며 다시 한번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는 손짓에 짜증이 가득했다.

“안내해.”

검의 날이 제법 무뎌진 것 같았다. 마물의 두꺼운 피부를 베는 느낌이 영 좋지 않았다.

성으로 돌아가자마자 대장장이에게 검의 상태를 봐달라고 해야겠다 여기며 로이안트는 걸음을 옮겼다. 앞서서 거의 뛰듯이 걸음을 옮기는 부하 게드릭의 등을 응시하는 금색 눈동자가 지루한 빛을 띠었다.

게드릭이 심각한 일이라며 저를 불렀지만 그래 봤자 뭐 처음 보는 마물이 나타났거나, 신기하게 생긴 마물이 나타났거나, 역대 최고로 징그럽게 생긴 마물이 나타났거나 그런 류의 시시한 일일 것이라 추측했다. 마물들 상대에 이골이 난 자신의 부하들이라 거대한 마물들을 단순히 놀잇감으로 삼을 때도 많았으니까.

실제로 저번에도 심각한 일이라며 부르기에 가봤더니 자기들이 생포한 마물들 중 제일 귀엽게 생긴 걸 선택해 달라는 하찮은 요구를 받았었다. 그때는 이딴 한심한 내기에 자신을 이용하지 말라고 윽박지르는 것도 귀찮아서, 적당히 골라준 게 지금은 조금 후회됐다.

오랜만에 몸을 많이 썼더니 피로가 몰려왔다. 로이안트는 크게 하품을 하며 뻐근한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이대로 돌아가 따뜻한 물에 몸을 씻고 그대로 푹 퍼져 자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전하, 저기요. 저기!”

게드릭이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자, 얼음이 부서져 바다가 온전히 드러난 곳 근처에 부하들이 몰려들어 곤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로이안트는 또 뭐 얼마나 대단한 마물을 포획했냐는 심드렁한 눈빛으로 걸어갔다.

“전하, 이거 마물……이겠죠? 그런데 이렇게 완벽하게 인간 형태를 한 건 처음 봐서요. 진짜 혹-시나 사람일까 싶기도 하고…….”

“게드릭이 제일 처음 발견했는데, 아무리 봐도 바다 쪽에서 밀려온 것 같은 느낌이라서요. 배를 띄우는 것 자체가 금지되어 있으니 난파당한 것도 아닐 테고…… 역시 마물이겠죠?”

“바닷물에 푹 젖어서 엉망인 상태에서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는 없다, 그러니 역시 마물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전하의 의중은 어떠신지 듣고 싶습니다. 역시 마물이겠죠?”

부하들이 아주 살짝 거리를 둔 채 빙 둘러싸고 있는 원의 중심에는 인간으로 보이는 여자가 있었다. 마물이니 어쩌니 하면서도 여자의 몸을 덮고 있는 부하들의 겉옷이 시선을 끌었다. 그 와중에 바닷물에 푹 젖은 마물이 감기에라도 걸릴까 걱정이 됐던 모양이었다.

로이안트는 창백한 안색에 겨우 숨만 붙어있는 듯한 모양새의 여자를 지켜보다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어어……, 저, 전하.”

“너, 너무 가까이 가시면 위험할지도…….”

저들이 옷을 덮어줄 땐 괜찮았고, 제가 가까이 가니 안절부절못하는 부하들을 뒤로한 채 로이안트가 눈밭 위에 쓰러져 있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몸을 낮춘 그가 눈을 감고 있는 여자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로이안트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전체적으로 색이 옅은 갈색 머리칼부터 시작해, 하얗고 작은 얼굴을 꽉 채우고 있는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샅샅이 훑어내렸다.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여자를 내려다보던 로이안트의 입술을 타고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거 왠지 마물보다 더한 게 온 것 같은데.”

가까이 다가와서 보니 더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제 눈앞에 있는 여자가 1년 전 죽었다고 알려진, 둘째 형님의 전 약혼녀라는 것을.

* * *

“네가 가. 오늘은 네 차례잖아!”

“싫어, 무서워!”

“그럼 어쩌자고! 빨리 가라고!”

“나 잡아먹히면 어떡해?”

“내가 잡아먹히는 거 아니잖아. 나는 너 잡아먹힐 동안 잽싸게 도망가야지.”

“역시 안 갈래.”

“이 자식이 진짜.”

속삭임에 가까운 목소리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게 들렸다. 목소리가 낮아졌다가 흥분한 듯 커졌다가 다시 한껏 낮아졌다. 덕분에 서서히 정신이 들었다.

얼마나 오래 잠들어 있었던 걸까.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프고 속도 메슥거렸다. 눈을 뜨고 싶은데 눈꺼풀을 들어 올릴 힘도 나지 않았다.

“네가 가주면 안 될까? 대신 오늘 3황자 전하께 일일 보고하러 가는 것도 양보할게.”

“오, 둘 다 너무 싫은걸.”

“너 뭐야? 우리 전하가 어때서!”

“그렇게 좋으면 네가 가면 되잖아.”

“오늘은 내가 몸 상태가 좀 안 좋아서 그래.”

꼼짝도 할 수가 없는 상태로 앳된 여자애들의 대화 소리만 머릿속으로 또렷이 박혀 들었다.

저 애들은 대체 누굴까. 그리고 난 지금 어디에 누워있는 걸까.

의식을 잃기 전 어둠 속에 집어삼켜졌던 불쾌한 감각만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혹시 나 거기서 죽어버린 건가. 그래서 천국에라도 온 걸까. 저 애들은 나를 데리러 온 천사 같은 존재일까. 눈도 뜨지 못한 채로 호기심만 퐁퐁 키워나갔다.

“친구 좋다는 게 뭐니? 이 정도 부탁은 들어줄 수 있잖아.”

“네가 들으면 좀 충격받을 수도 있는데, 난 널 친구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

“뭐……? 야, 진심이야? 엔, 농담이지? 어?”

덜커덩 하는 소리와 함께 한쪽 여자애의 목소리가 또 커졌다.

“야, 엔젤!”

“아, 이름 다 부르지 말라고!”

둘 다 거의 동시에 빼액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순간 몽롱하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간신히 눈을 떠서 흐릿하게나마 시야를 확보했다.

처음엔 역시나 낯선 천장이 먼저였다. 천천히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확인하자, 아마 목소리의 주인공인 듯한 여자애 둘이 보였다.

“너 일부러 그랬지? 죽을래?”

“부, 부모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을 소중히 하라꾸에엑.”

예상대로 아직 성인식도 치르지 못한 어린 여자애들이었다. 한쪽이 무척 화가 난 듯 다른 한쪽의 멱살을 잡아 짤짤 흔들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아직도 무겁기만한 눈꺼풀을 여러 번 깜빡이며 밝은 빛에 익숙해지려 노력했다. 그러던 중 멱살을 잡혔던 여자애 쪽과 시선이 딱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여자애의 안색의 새파래지더니 “흐아악!”하는 괴상한 소리를 냈다. 멱살을 잡고 있던 여자애도 내 쪽을 돌아보더니 다른 여자애의 멱살을 잡은 채로 움직임을 멈췄다.

그 상태로 시간이 멈춘 듯 우리는 꼼짝도 않고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왜 저렇게 겁을 집어먹은 얼굴일까.

나는 의아해하며 손가락을 까딱여보았다. 다행히 몸도 어디 부러지거나 한 곳 없이 무사한 모양이었다. 나는 손과 발을 몇 번 움직여보다 팔을 움직여 침대를 짚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으아아악!”

일어나서 여자애들과 제대로 대화를 해보려던 내 의도는 시도조차 해보지 못하고 실패했다. 내가 일어나려 침대는 짚는 것과 동시에 여자애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문을 열고 도망쳐버린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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