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그대가 없는 세계 (4)
* * *
짐승이 낮게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 어린아이의 비명, 기괴한 웃음소리가 한데 뒤엉켜 귓가를 찔렀다.
땅이 쿵쿵 울렸다. 바닥을 날카로운 무언가로 긁고, 진흙을 밟고, 물속을 헤엄치는 듯한 소리도 연이어 들려왔다. 낯설고 어딘가 소름끼치는 소리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로 호기심이 먼저 고개를 들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눈을 뜨고 천천히 주변을 확인했다.
나는 새까만 어둠 속에 있었다. 주변은 온통 새까매서 뭐가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무심코 시선이 간 내 손을 멀쩡히 보여 당황했다.
이렇게나 캄캄한 어둠 속에 있는데 내 모습만은 선명하게 보여 위화감이 느껴졌다. 마치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세상 속에 나 혼자만이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손으로 더듬어 내가 누워있는 공간의 바닥을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건지도 알 수 없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처음 느껴보는 생경한 두려움이 온몸을 덮쳤다.
끼에에에엑-.
마물의 울음소리를 듣고 안도하는 날이 올 줄이야. 망망대해의 바다 위에 홀로 표류하고 있는 것만 같은 어둠 속이 생각보다 더 끔찍한 탓이었다. 뭐든 내가 아닌 또 다른 존재가 있다는 것만이라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나는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향해 급히 몸을 틀었다. 그리고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존재가 눈앞에 있음에 놀란 눈을 크게 떴다.
돌아본 곳에는 여자애가 있었다. 작고 가냘프고, 처음 보는 이상한 옷을 입은, 검은 머리칼과 검은 눈동자의 여자애였다.
옷차림과 마찬가지로 외모 역시 대륙에서는 보기 힘든 이국적인 외모였다. 흑요석을 연상시키는 검은 눈동자가 무척 신비롭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여자애 역시 저와 마찬가지로 무척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조금은 겁에 질린 것도 같았고, 마주 보는 시선에서 호기심이 엿보이기도 했다.
“저…… 저기, 여긴 어딘가요?”
누구라도 말을 걸 상대가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던 나는 다급히 무릎걸음으로 여자애에게 다가가 물었다. 여자애도 같은 마음이었던 듯 내 쪽으로 쫓기듯 다가오는 게 보였다.
“제가 어떻게 여길 오게 된 건지 기억이 없어서…….”
“마물에 집어삼켜졌잖아요.”
불쑥 내어준 대답이 생각보다 무척 담담해서, 조금 놀랐다. 낮고 침착한 목소리였다. 겁에 질린 듯 움츠러들어 있는 겉모습과 달리 목소리만은 너무 차분해서 오히려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멈칫하는 내게 여자애가 한 번 더 친절하게 말해주었다.
“기억 안 나요? 이렇게 한입에 꿀꺽하고, 잡아먹혔던 거.”
이 애가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덕분에 잊고 있던 기억들이 하나 둘 떠올라 상황을 파악하는데는 도움이 됐지만, 머릿속이 더 혼란스러워졌다.
혹시 이 애도 그 마물에 잡아먹혔던 걸까, 우리 둘 다 그 마물의 배 속에 있는 걸까.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아뇨, 여기는 「문」의 안쪽이에요.”
마치 내 머릿속을 읽은 것처럼 여자애가 답했다.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는 여자애의 눈동자는 여전히 두려움과 혼란으로 가득했다.
그런데 조곤조곤 제 할 말을 하는 목소리는 더없이 침착하기만 해서, 나는 눈앞에 있는 여자애도 사실은 마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게요, 언니한테는 내가 저것들과 같은 존재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면서 여자애가 손을 들어 왼쪽을 가리켰다. 나는 무심코 여자애를 따라 같은 방향을 가리키며 그쪽을 돌아보았다.
거기엔 거대한 붉은색의 구가 하나 있었다. 피처럼 붉은 불꽃이 전체를 뒤덮은 거대한 구에선 크고 작은 마물들이 끊임없이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구를 중심으로 사방에 검푸른색의 구멍 같은 것이 있었다.
구멍은 총 다섯 개로, 마물들은 그 구멍을 지나기 위해 커다란 몸뚱이를 꾸역꾸역 밀어 넣고 있었다.
신전에서 말하는 무저갱의 나락이 있다면 이곳이 아닐까 싶었다. 나는 뒤늦게 코를 찌르는 악취들에 괴로워하며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마물들이 내지르는 울음소리와 알 수 없는 기괴한 소음들에 귀도 괴롭긴 매한가지였다.
나는 어떻게든 코와 귀를 틀어막으려 애쓰다 멈칫했다. 여자애가 말했던 「문의 안쪽」이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 이제 알 것 같았다. 나는 경악한 얼굴로 여자애를 돌아보았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여자애도 나를 바라보았다.
“여기가 저 세계를 괴롭히는 악의 근원 같은 곳이에요. 여기서부터 각자의 문을 통해 마물들이 저쪽 세계로 넘어가요.”
“저기 커다란 구슬 같은 게 보이죠? 저게 무저갱으로부터 마물들을 끌어내는 핵이에요. 저 핵만 파괴하면 더는 마물이 나타나지 않을 거예요. 보기보다 별거 아니라서 파괴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아요. 파도와 같이 밀려드는 마물들을 피해 문 안쪽으로 들어올 수 있는 인간이 존재한다면요.”
“아직 누가 어떤 식으로 파괴할지는 정하지 않았어요. 애초에 저 핵을 발견하게 되는지 아닌지도 쓰지 않았지만.”
아직 정하지 않았다. 쓰지 않았다. 어떻게 들어도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표현이건만, 어째서인지 그 말을 듣는 순간 성녀가 내게 외쳤던 말들이 떠올랐다.
―헤더 영애, 사실 지금 헤더 영애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가 전부 한 사람이 만들어낸 가상의 세계라면 어떻게 할 건가요.
―이야기의 과정도 결말도 전부 정해져 있고, 우린 그 체스판 위에서 정해진 대로만 움직여야 하는 체스 말이라면요?
나는 이상하리만치 이곳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을 이어나가는 여자애를 의심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여자애는 어딘가 조금 들뜬 목소리로 내가 묻지 않은 이야기까지 술술 털어놓더니, 돌연 입을 꾹 닫고서 나를 빤히 응시해왔다.
“저기요, 언니. 나랑 내기 하나 하지 않을래요?”
그리고 더더욱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꺼냈다. 여전히 겁에 질려 잔뜩 경계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기간은 해가 뜨고 지기를 아홉 번 할 때까지. 내용은 간단해요. 어렵지 않아요. 그냥 말만 하면 되는 거니까.”
표정과 상반되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소름이 돋아났다. 저 멀리 보이는 마물들보다 눈앞의 여자애가 더 위험스레 느껴진 것도 그때부터였다.
“서브남주에게 일개 조연인 언니가 자기 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거예요.”
여자애는 뭔가를 잔뜩 기대하는 듯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자기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고 여긴 건지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여주기도 했다.
“그러니까 언니가 레이몬드 알렉 카지스에게 좋아한다고 말하고, 언니도 그 사람에게서 똑같은 말을 듣기만 하면 돼요. 정말 간단하죠?”
이 애는 나한테서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걸까. 이 애가 어떻게 레이몬드 2황자를 알고 있는 걸까. 이 애는 대체 뭘까.
“이번엔 어떤 식의 방해도 하지 않을게요. ‘나’는 언니의 운명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도 언니 주위 사람들이 다치게 하지도 않을 거예요.”
수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 가는데 여자애가 내게 대답을 재촉하듯 말했다.
“언니가 그랬잖아요. 마물에게 집어삼켜지기 직전에, 죽음을 직감한 그 순간에 간절히 바랐잖아요. 레이몬드 2황자에게 마음을 전하지 못한 걸 죽을 만큼 후회했었잖아요. 언니가 그토록 바랐던 걸 해내기만 하면 돼요.”
내가 계속 아무런 대답도 않자, 어딘가 초조한 듯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럼 문에 접근할 수 있게 해줄게요. 핵을 부수고 더는 문이 나타나지 않도록 해줄게요. 저 세계의 완벽한 해피엔딩을 써줄게요.”
이만하면 승리의 대가로 완벽하죠? 라는 듯 자신만만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또 다시 「쓴다」 라는 표현이 나왔다. 마치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모든 이들의 미래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는 투였다.
―정해진 이야기에 반하는 말이나 행동을 하면 제약을 받게 돼요. 원작의 이야기를 해치려고 하면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 대가를 받아요. 그게 본인이든, 혹은 본인에게 소중한 사람이든 누군가는 반드시.
한 사람, 과정도 결말도 전부 정해져 있는 가상의 세계, 체스 말과 같은 운명, 제약과 대가.
성녀 아리아가 내게 거짓말을 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녀가 내게 했던 말들은 혹시 눈앞에 있는 여자애를 가리켰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쳤다.
성녀가 그 직후 화살에 맞은 것도 「제약」에 대한 「대가」를 받은 것이라면? 이 애가 정한 규율을 어기고 비밀을 발설하려 했기 때문에 화가 나서 성녀를 죽이려 한 것이라면?
이 애의 존재는 대체 무엇일까.
여자애는 거기서 잠시 말을 멈췄고, 나는 경계 어린 시선을 던지며 줄곧 말을 아꼈다. 똑같은 시선이 오갔다. 서로를 끊임없이 경계하고 두려워하고 의심하는 눈동자였다.
“대신 기한 내에 언니가 마음을 전하지 못하거나 그 사람으로부터 같은 말을 듣지 못한다면.”
짧은 침묵 끝에 여자애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언니가 죽어요.”
누군가의, 그것도 바로 눈앞에 있는 이의 죽음을 언급하는 것치고는 지나치게 담담한 목소리였다.
“그 자리에서 언니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이 돼요. 언니가 만나고, 대화를 나누고, 함께 했던, 언니가 좋아했던, 언니를 좋아했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언니를 말끔히 지워버릴 거예요.”
나의 죽음과 더불어 그보다 더 끔찍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고는,
“어때요?”
내게 다시 한번 의견을 물어왔다.
소름이 끼치고, 무섭고, 화가 나는 걸 넘어서 나는 이제 눈앞의 여자애가 대체 누구인지, 내게 왜 이러는 것인지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당신…… 대체 누구예요?”
“나? 나는 이 세계의 신이에요.”
망설임도 없이 당당하게 흘러나온 대답에 나는 웃지 않았다. 여자애의 대답을 의심하지도 않았다. 그저 막연히 생각했던 것을 확인받은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이 세계를, 누군가의 운명을 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존재라면…… 나를 이곳 「문」의 안쪽으로 불러들이는 일도 그리 어렵진 않을 테니까. 애초에 여자애를 의심하려면 내가 지금 주저앉아 있는 이곳의 존재 자체부터 의심해야 했다. 그리고 저 수많은 마물들이 이렇게나 먹음직스러운 먹이가 둘이나 있는데도 이쪽으로는 관심조차 두지 않는 것도 그렇고.
나는 여자애에게 점점 더 경계 어린 시선을 던졌다. 상대 역시 그런 나를 더욱 경계하듯 바라보는 게 보였다.
질문에 대한 답을 받았지만 눈앞에 있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은 점점 더 커지기만 했다. 눈앞의 여자애가 성녀가 말했던 존재가 맞다는 가정하에, 어쩌면 저렇게 작고 연약한 모습도 거짓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당장이라도 뒤돌아 도망치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