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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그대가 없는 세계 (3) (102/152)

05. 그대가 없는 세계 (3)

그럼 저녁에 만나서 사과해야지 생각하며 은지는 시무룩한 얼굴로 학교에 갔다. 학교에 가면 김유리가 있으니까 기운이 날 것 같았다. 사촌 오빠의 친구가 자신의 소설 내용을 보고 훔쳐 쓴 거라는 걸 말해주면, 김유리가 또 속 시원하게 욕이라도 해줄 것 같았다.

평소엔 김유리가 다른 반이기도 하고 자기 친구들도 있으니 점심시간까지는 기다려야 했지만, 그것도 상관없었다. 그래도 오늘따라 멀리서라도 김유리가 보고 싶은 마음에 일부러 다른 층에 있는 김유리네 반 앞을 지나칠 때였다.

“야, 뭐야. 김유리, 설마 너 소설 쓰냐?”

뒷문을 막 지나치려는 순간, 익숙한 이름이 들려왔다. 열려있는 뒷문을 통해 교실 안을 바라보자 김유리와 같이 다니는 무리 중 하나가 은지의 노트를 펼쳐보고 있었다. 양장 형태의 금색 노트는 그리 흔하지 않았기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어제 김유리가 자기 이모부가 변호사라면서 이거 어떻게 작품을 빼앗긴 걸 증명할 수 없는지 알아보겠다고 씩씩거리며 들고 간 노트였다.

“『이세계 성녀 되다?!』, 「카지스 제국」? 이거 뭐 판타지 그런 건가?”

남자애가 재미있다는 듯 노트를 펼쳐보고 있으니 다른 여자애도 와서 내용을 읽고는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딱히 그걸 비웃는다던가 비하하려는 의도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저 상황이 그리 낯설지 않은 은지로서는 김유리가 조금 걱정되었다.

은지가 자신이 나서서 그거 내 거라고 김유리가 우연히 주워 준 것뿐이라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뒷문으로 막 발을 들인 순간이었다.

“내, 내 거 아냐! 미쳤냐? 내가 그딴 걸 왜 써? 오타쿠도 아니고. 난 애초에 그런 거 왜 보는 지 진짜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이거든?”

김유리가 화가 난 사람처럼 얼굴이 빨개져선 외친 말들에 은지의 발걸음이 멈췄다.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스쳤다.

알고 있다. 저게 진심이 아니란 것쯤은. 김유리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것도. 하지만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긴 그렇지. 그럼 이거 누구 거냐? 이거 네 가방에 있었다던데.”

“나도 몰라, 사람 짜증나게…….”

“이거…… 내 거야.”

은지는 조용히 김유리의 무리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내 거니까 달라는 의미로 손을 내밀자 남자애가 “어, 미안.”하고는 순순히 노트를 건네주었다. 다행히 김유리 친구답게 나쁜 애는 아닌 것 같았다.

“김유리가 우연히 주워준 거 같아. 고마워, 김유리.”

은지는 김유리의 시선을 느꼈지만 일부러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을 내뱉고는 휙 돌아섰다.

“잠깐, 신……!”

당황한 듯 김유리가 자신을 부르려다 멈칫했다. 은지는 그대로 돌아서서 김유리의 반을 빠져나와 자신의 반으로 돌아왔다. 김유리는 쫓아오지 않았다.

수업 종이 그새 울렸는지 벌써 1교시 수업 선생님이 들어와 계셨다. 은지는 서랍에 노트를 대충 밀어 넣고는 교과서를 꺼내 책상 위에 펼쳤다.

이제 곧 시험이니 수업에 집중해야 했다. 칠판과 교과서를 열심히 오가며 수업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그런데 자꾸 눈물이 났다. 소매로 눈물을 꾹꾹 눌러 닦으면 그새 눈물이 차오르고 또 차올랐다.

옆자리에 앉은 애가 그런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은지는 그날 온종일 수업을 거의 듣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작은 아버지 네는 맞벌이 부부셔서 집은 텅 비어 있었다. 받은 열쇠로 직접 문을 열고 들어와 방에 틀어박혔다. 시험공부도, 소설을 쓰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은지는 힘없이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만 올려다보았다. 시간이 지나 작은아버지와 작은어머니가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방문을 열고 나가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다시 방으로 돌아와 재현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하지만 재현은 저녁을 먹을 시간이 지나도 밤 11시가 지나도 돌아오질 않았다. 가끔 재현이 대학 친구들과의 술자리로 늦는 건 알았지만 오늘처럼 연락도 없이 늦는 건 처음이라 작은아버지와 작은어머니도 무척 걱정하시는 분위기였다.

“다녀왔습니다.”

12시가 다 되어갈 즈음. 그제야 재현이 집에 돌아왔다. 재현은 연락도 없이 늦은 걸 나무라는 작은아버지에게 죄송하다고 인사를 하고는 어두운 표정으로 자기 방에 들어가려 했다.

은지는 재현이 너무 피곤해 보여서 내일 말을 할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은…… 정말 너무 힘들어서, 잠깐이라도 좋으니 재현에게 얘기를 털어놓고 싶었다. 재현이 힘들었겠구나 하고 한 마디만 해줘도 조금이나마 기운이 날 것 같았다.

그리고 어제 일을 꼭 사과하고 넘어가고 싶었다. 어제 그렇게 자신이 재현에게 화를 낸 이후로 줄곧 가슴 속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 마음이 불편하고 아팠다. 어쩌면 오늘 재현이 술을 마시고 늦게 온 것도 자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

“저, 오, 오빠.”

“……왜?”

재현의 방문이 닫히기 직전 머뭇거리며 다가가 말을 걸자, 재현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처음 보는 재현의 낯선 태도에 은지는 움츠러들었다. 역시 어제 일로 화가 많이 난 것 같았다. 은지는 빨리 사과를 하고 재현과 예전처럼 사이좋게 지내고 싶었다. 어제는 갑자기 소리를 질러서 미안하다고, 오빠 친구가 그런 것도 그냥 괜찮다고, 속은 좀 쓰리지만 소설은 새로 다시 쓰면 되니까. 그러니까 다시 예전처럼 오빠랑 다시 잘 지내고 싶다고. 하고 싶은 말을 한 번 더 머릿속으로 정리하고는 말문을 뗐다.

“있잖아. 어제 그거 내 소설…….”

“그만 좀 해.”

재현이 그제야 고개를 돌려 저를 바라보았다. 무표정하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은지를 바라보던 재현이 짜증스레 얼굴을 쓸어내렸다.

“허구한 날 소설, 소설, 소설. 그놈의 소설! 어쩔 수 없이 웃으면서 들어주니까 내가 진짜 너랑 똑같은 줄 아냐?”

재현이 소리를 지르는 건 그날 처음 보았다.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와 대화할 때는 물론, 친한 친구들하고 통화할 때도 장난스럽긴 해도 저런 식으로 화를 내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재현이 항상 차분하게 웃는 낯으로 상대를 대하는 모습만 봐왔던 터라 그 충격은 더 컸다.

“오타쿠처럼 맨날 혼자 그딴 거나 보고 있으니 왕따를 쳐 당하지. 나도 부모님 부탁만 아니었으면 애초에 니 같은 거랑 말도 안 섞었어, 알아?”

오늘 낮에 학교에서 김유리의 반 앞을 지나갈 때가 떠올랐다.

―내, 내 거 아냐! 미쳤냐? 내가 그딴 걸 왜 써? 오타쿠도 아니고. 난 애초에 그런 거 왜 보는 지 진짜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이거든?

김유리가 벌게진 얼굴로 화를 내며 외친 말들이 재현의 목소리 위로 겹쳐졌다.

“현실을 좀 살아라, 멍청아.”

알고 있었다. 사실은. 원래는 딱히 친하지도 않았던 제게 재현이 왜 갑자기 신경을 써주고 다정하게 대해주는지.

부모님을 한순간에 잃고 혼자 남겨진 불쌍한 여자애. 학교에선 친구 하나 없이 겉돌고, 담임이 부모님 대신인 작은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다. 작은아버지는 가뜩이나 부모님도 잃고 충격이 큰 조카가 자살이라도 하진 않을까 걱정이 됐을 거고, 그나마 나이대가 비슷한 재현에게 자신을 부탁했을 것이다.

불쌍한 애니까 네가 좀 신경을 쓰고 잘 챙겨주라고.

아마 재현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어쩌다 같이 살게 된 음침한 여자애가 자살하니 마니 하다 진짜 죽기라도 하면 찝찝하기도 할 테고. 아마 그래서 억지로 제게 잘 대해주는 게 아닐까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래도…… 아주 조금은 진심도 섞여 있지 않을까. 억지 미소가 아니라 가끔은 진심으로 웃어줄 때도 있지 않았을까. 기대했었다.

“신재현!”

안방에서 뛰쳐나온 작은아버지가 재현의 얼굴을 후려쳤다. 작은어머니가 그 모습을 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게 보였다. 은지는 그대로 현관문을 열고 뛰어나왔다.

“은지야!”

등 뒤에서 작은아버지가 놀라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빨리 쫓아가 보라고 외치는 작은어머니의 목소리도 들렸다.

은지는 뒤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어디로 가는 건지는 몰랐다.

차라리 그때 부모님이 같이 여행 가지 않겠냐고 했을 때 같이 가겠다고 할걸. 한참 예민해져선 부모님과도 매일 같이 싸우고 사이가 좋지 않아 그냥 혼자 집에 남겠다고 한 게 이토록 후회가 될 줄은 몰랐다. 그랬으면 이렇게 혼자 남겨져 짐 덩어리가 되지도 않았을 텐데. 차라리 저 같은 건 그때 부모님과 같이 죽어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재현과 한집에 살게 되지도 않고, 전학 와서 김유리를 만나는 일도 없었을 텐데. 멋대로 상대에게 마음을 내어주고 좋아하게 되어선, 혼자 상처를 받게 되는 일도 없었을 텐데.

모든 게 후회스러웠다. 처음부터 다 잘못된 것 같았다.

“은지야, 거기 서 봐!”

작은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정말 여기까지 쫓아와 계셨다. 깜짝 놀란 은지는 혹시나 붙잡힐까, 빨간불 신호를 무시하고 횡단보도를 건넜다. 이미 지척까지 달려와 있는 차가 있는 것도 보지 못하고 뛰쳐나간 결과는 예상대로 처참했다.

큰 충격과 함께 몸이 붕 날아서 아스팔트 위로 처박혔다. 차라리 바로 정신이라도 잃었으면 좋았을 텐데. 온몸의 뼈가 다 으스러지고 내장이 뒤틀리는 듯한 통증과 함께 자신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피가 스며들어 붉어진 시야 너머로 두 사람을 처음 만났던 날의 기억들이 차례대로 스쳐 지나갔다. 제게 직접 아침밥을 차려 갖다주고 꼭 먹으라고 다정하게 말해주었던 재현, 자신이 흘린 노트를 주워 주고 친하게 지내자며 어깨동무를 해왔던 김유리.

두 사람이 환하게 웃던 얼굴만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김유리, 그리고 재현 오빠.

사실은 둘 다 내가 정말 많이 좋아해. 두 사람 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 같았어. 너무 예쁘고, 너무 부럽고, 너무 소중했어. 한없이 무정하기만 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한테 다정하게 대해 준 사람들이니까.

그런데 미워. 미워서 죽을 것 같아. 나한테 왜 그랬어? 왜 좋아하게 만들어놓고, 날 좋아해 주는 것처럼 굴고는, 그렇게 매정하게 날 내쳤어? 나는 진짜 이제 아무것도 없는 사람인데. 두 사람 외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데. 나한테 왜…….

있잖아, 나는.

두 사람도 ……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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