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그대가 없는 세계 (2)
부모님 외에 이런 얘기를 들어준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은지는 점점 더 재현에게 의지하게 되었고, 남몰래 쓰고 있던 소설까지 보여주게 되었다. 은지는 웹툰도 좋아하지만 그만큼 소설도 좋아해서 둘 다 도전해보고 있었다.
소설은 읽어본 재현은 자기가 첫 번째 독자인 거냐며 무척 즐거워해 주었다. 진지하게 소설을 읽어주고 앞으로 이런 식으로 가면 좋을 것 같다는 식으로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조연으로 나오는 여자 캐릭터 하나가 왠지 성격이 널 닮았다고 말하기도 하고, 남자 주인공이 너무 인간쓰레기 아니냐며 투덜거리기도 했다. 가끔은 개연성이 없다며 지적을 해주기도 했다.
은지는 재현이 해주는 모든 말들이 그저 기뻤다.
재현은 은지가 컴퓨터로 쓰는 것보다는 연습장에 소설을 끄적이는 걸 좋아하는 걸 알고는 예쁜 양장 노트를 선물해주었다. 꽤 비싸보이는 노트였는데 자신은 어차피 안 쓰는 거라며 여기다 소설을 쓰면 진짜 책 같아서 더 멋있을 것 같다고 말해주기도 했다.
학교생활은 최악이었지만 은지는 재현이 있어 준 덕분에 하루하루가 조금은 즐거워졌다. 어차피 학교 같은 건 졸업만 하면 끝이었다. 지금은 소설을 쓰고 재현에게 보여주고, 재현이 재미있다고 얘기해주면 그걸로 충분했다.
“네가 신은지 맞지?”
그날도 학교 체육관 뒤에서 소설을 조금 끄적이다 영 뒷내용이 떠오르지 않아 포기하고 교실로 돌아오는 참이었다. 본교로 걸어오는데 뒤에서 누가 말을 걸어왔다.
누구지? 하고 돌아본 은지는 멈칫했다. 이 학교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여자애였다. 하얀 피부에 길고 검은 머리카락, 인형처럼 예쁜 얼굴을 가진, 학교에서 소위 말해 잘나가는 그룹에 속한 여자애.
잘나가는 그룹이라고 해서 다른 학생들을 괴롭히는 일진 같은 건 아니고, 그저 예쁘고 잘생긴 애들이 끼리끼리 다니는 것뿐이었지만.
여자애의 이름은 김유리. 이름마저도 어디 청춘 드라마의 여주인공 같은 여자애는 생글생글 웃으며 은지의 인생으로 성큼 걸어들어왔다.
“어, 어떻게 내 이름…….”
“너 너무 혼자 다녀서 오히려 눈에 띄거든. 자, 이거. 흘리고 가더라고.”
픽 웃는 모습도 너무 예쁜 김유리가 은지의 앞으로 뭔가를 내밀었다. 뭔가 하고 봤던 은지는 경악하여 김유리가 내민 노트를 황급히 제 품으로 감췄다. 그건 제가 쓰고 있던 소설이었다.
설마 본 건가. 소설을 직접 쓰고 있다는 사실마저 학교에 알려질까 걱정이 됐다. 지금 반 분위기면 제 소설을 다 돌려보고 이리저리 조리돌림하듯 놀려댈 것 같아서였다.
제발 말하지 말아 달라고 김유리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사정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할 때였다.
“그런데 있잖아. 이거. 네가 쓴 거야?”
어쩐지 생각한 것과는 조금 달리, 잔뜩 기대 어린 목소리가 은지의 귓가에 닿았다. 은지가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니 실제로 김유리는 커다란 두 눈동자를 반짝이며 은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왠지 제가 그렇다, 라고 대답하길 바라는 듯한 반응에 은지는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김유리가 다른 반 애들처럼 자신을 놀리려고 그러는 건 아닌 듯했기 때문이었다.
“진짜? 야, 대박이다. 앞부분 조금밖에 못 보긴 했는데 너 진짜 잘 쓰는데?”
김유리는 갑자기 박수까지 짝 치며 은지의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주위를 휙휙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듯 은밀하게 말했다.
“비밀인데 사실 나도 로판 엄청 좋아하거든. 근데 이 학교 분위기가 알지? 그런 거 좋아한다고 소문나면 오타쿠 찐따 취급하는 거. 진짜 웃기지? 지들도 사실 집에서는 일본 애니 겁나 보고, 라노벨이랑 피규어 존나 사 모으면서 그런다니까? 븅신 새끼들이.”
김유리가 이를 바득바득 갈며 중간중간 욕설까지 내뱉는데도 무섭다거나 불쾌한 느낌보다는 왠지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긴장이 풀린 은지가 쿡쿡 웃음을 흘리자 김유리가 아예 어깨동무까지 하며 친한 척을 해왔다.
“와, 나 이 그지같은 학교에서 동지 만난 거 처음이라 너무 좋아.”
그 뒤로 두 사람은 급속도로 친해져 매일 점심시간마다 학교 체육관 뒤에서 만났다. 주로 그동안 서로가 재밌게 본 로판이나 웹툰 얘기를 즐겁게 나누곤 했다. 그리고 김유리가 은지의 소설을 읽고 일방적으로 감상을 말해주거나 신랄하게 비판을 하기도 했다.
“야야야야야야, 신은지 장난해? 여기서 갑자기 왜 마물이 나타나? 개연성 왜 갑자기 중동 보냈냐.”
“어어, 이렇게 해야 뒷얘기 전개가 되는데 어떡하지?”
“있어 봐, 나도 생각 좀 해봄. 아씨. 모르겠다. 그냥 이렇게 가자. 그보다 여기 여주 너무 개밥맛임. 남주도…… 남주는 그냥 죽는 걸로 엔딩 내면 안 되냐? 제발.”
“안 되는데…….”
“그리고 난 여주보다 차라리 얘가 마음에 들어. 이름 뭐더라? 여튼 얘 남주 전여친.”
“전여친 아니고 정부…….”
“여기 서브남주네 동생들 귀엽다. 힐링되네 진짜. 여주 남주 나오지 말고 얘네나 좀 자주 나오게 해. 특히 여기 막내 황자 개귀여워. 진짜 이런 남동생 있으면 맨날 물고 빨고 핥고 업고 다니겠다.”
“여주 남주가 안 나오면 소설 진행은 어떻게 해…….”
“그걸 지금 작가인 니가 어떻게 알아서 좀 해달라고 청탁하는 거 아냐.”
“너 솔직히 내 소설 싫어하지?”
“아냐, 진짜 다 걸고 존나 좋아함. 눈 그렇게 뜨지 말고 다음 화는 꼭 여주 남주 손잡고 같이 저승으로 데이트 가는 내용 써 와.”
“새드엔딩은 안 팔릴 텐데…….”
“내 기준 그게 해피엔딩임.”
시험 기간인데도 공부는 안 하고 열심히 소설만 써대는 게 조금 걱정이긴 했지만, 그래도 요즘 은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즐거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소설을 쓰고 그걸 재현이나 김유리가 재밌게 봐주는 게 너무너무 좋았다. 그래서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제 소설을 봐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 김유리에게 먼저 말을 꺼내보았다. 다행히 김유리는 당장 연재를 해보라며 응원을 해주었다.
“너 연재하다 유명해져서 출간하고 돈 많이 벌어도 나 잊어버리면 안 된다? 난 솔직히 한우 정도는 얻어먹을 짬은 되잖아. 알지?”
“응, 한우 많이 많이 사줄게. 그런데 나 연재하게 되면 필명이 필요한데, 필명은 뭘로 하지 고민중이야.”
“필명? 흠, 어디 보자. 너 성이 신 씨잖아. 창조주, 신. 영어로 갓 어때. GOD. 캬, 내가 지었지만 진짜 본새 난다. 본새 나. 이 정도면 한우에 랍스타도 얹어야 된다.”
김유리가 직접 지어준 필명까지 등록을 하고 처음으로 연재를 시작하게 된 날이었다. 잠들기 직전에 사이트에 연재물을 3화 정도만 올리고 떨리는 마음을 안고 겨우 잠이 들었었다. 사이트의 반응이 궁금하기도 하면서 왠지 보기가 겁이 나서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리다 결국 못 보고 학교에 도착했다.
“야, 신은지. 이리와 봐.”
일부러 평소보다 일찍 왔는데, 김유리가 그보다 먼저 와서 교문 입구에서 자신을 잡아채 학교 체육관으로 끌고 갔다. 무슨 일인가 싶어 당황해 있으니 김유리가 심각한 얼굴로 자기 스마트폰 액정을 꾹꾹 누르며 말했다.
“신은지 너 지금 웹툰 그리고 있는 거 아니지? 너 이거 봤어?”
그러면서 보여주는 건 어젯밤 은지가 연재물을 올린 사이트의 댓글들이었다.
―이거 『이세계에서 성녀로 살아남는 법』 웹툰이랑 초반부 내용 똑같지 않나.
―님 이렇게 대놓고 표절하시면 어떡해요.ㅋㅋ
―ㅁㅊ이렇게 대놓고 표절한다고?
―일단 신고했음.
표절. 왜 내 소설이 표절이라는 거지. 이게 다 무슨 소리지. 혼란스러워하는 은지에게 김유리가 이번엔 다른 화면을 보여주었다.
스마트폰 액정에 뜬 웹툰 속 캐릭터들은 예전에 은지가 『이세계 소녀, 성녀 되다?!』의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을 포함한 캐릭터들을 스케치했던 것과 거의 흡사했다. 제목만 다를 뿐 스토리 또한 도입부부터 완전히 똑같아서 같은 작품처럼 보일 정도였다.
웹툰은 유명한 플랫폼의 공모전에 참가하고 있는 작품으로, 저쪽은 벌써 2주 전부터 연재를 시작한 터였다. 당연히 뒤늦게 시작해 후발주자가 된 은지의 소설 쪽이 표절로 보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은지는 충격을 받아 어지러운 상태에서도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차분하게 생각해보았다. 소설 내용은 흔한 클리셰가 뒤범벅된 내용이라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캐릭터 외형까지 저렇게 같을 수는 없었다.
김유리에게는 왠지 쑥스러워서 최종적으로 웹툰을 그리고 싶다거나, 자기가 그린 캐릭터 시트를 보여준 적은 없었다. 거기까지 알고 있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재현에게만 딱 한 번 캐릭터 시트를 보여준 적이 있었다. 재현이 진짜 잘 그린다며 자기 친구에게 자랑하고 싶다며 스마트폰으로 그걸 찍어간 적도 있었다. 그때는 그냥 조금 쑥스럽기만 할 뿐, 일이 이렇게까지 될 거라고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은지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달려가 재현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재현을 보자마자 웹툰을 보여주고는 이게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재현도 무척 당황한 기색이었다. 재현은 웹툰을 확인하고는 예전에 말했던 자기 친구가 그린 게 맞는 거 같다며 은지에게 미안해했다. 자기는 그저 사촌 동생인 내가 그림을 잘 그리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또 자랑을 하고 싶은 마음에 그랬다고 했다.
그런데 설마 그 친구가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줄을 몰랐다고. 친구와 잘 얘기해서 웹툰을 내리게 해보겠다는 말도 했다.
하지만 세상은 이미 은지가 만들어낸 이야기가 그 사람의 작품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고, 실제로 은지는 그 이야기가 자기 것이라 증명할 방법도 없었다. 표절이라는 말까지 들은 뒤였다.
은지는 화가 났다. 재현에게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아는데도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재현에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그딴 사람을 친구로 뒀냐고, 왜 그 사람에게 보여준 거냐고 화를 냈다.
하지만 그렇게 화를 내고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은지는 또다시 금세 후회했다. 재현에게는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재현이 있었기 때문에 힘을 낼 수 있었던 건데. 그래서 김유리도 만날 수 있었던 건데.
내일은 꼭 사과해야지. 미안하다고 하면 재현은 평소처럼 웃으며 괜찮다고 말해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자고 일어났지만, 작은어머니로부터 재현은 학교 과제 때문에 아침 일찍 나갔다는 말만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