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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그대가 없는 세계 (1) (100/152)

05. 그대가 없는 세계 (1)

“큰오빠 사망보험금 때문에 애 데려간 거 누가 모를 줄 알아? 역겨운 새끼, 네가 사람 새끼냐고! 당장 애 데려와! 네가 뭔데, 그 앨 데려가!”

“입 안 닥쳐? 뚫린 입이라고 막 지껄여대는 거 참아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애초에 큰오빠네 갑자기 여행가라고 차까지 빌려주면서 등 떠밀 때부터 알아봤다. 이러려고 그랬냐? 딴 사람은 다 속여도 난 못 속여, 이 살인자야!”

“입 닥치라고!”

“꺄악!”

“아버지, 참으세요!”

“찔리니까 사람 치는 거 봐! 쳐봐, 쳐보라고! 이 개새끼야! 살인마 새끼!”

꼭 닫힌 방문 너머로,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아 봐도 소리는 들려왔다. 악다구니를 쓰는 고모의 목소리, 그에 되받아치는 작은아버지의 고함,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을 말리는 사람들의 외침에 이어 우당탕탕 뭔가 부딪치고 깨지는 소리들까지.

은지는 그것들이 긴 장례식 내내 들어왔던 곡소리만큼이나 끔찍하다고 생각했다.

와장창! 이번엔 유리가 깨지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뒤이어 고모의 새된 비명까지. 그리고 어느 순간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졌다.

은지는 살며시 귀를 막고 있던 손을 뗐다. 정말로 주변이 조용해져 있었다. 다들 어디 가버린 걸까? 은지는 조심스럽게 방문 앞으로 다가가 귀를 대보았다.

똑똑!

문에 귀를 대는 것과 동시에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는 바람에 은지는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물러났다.

“은지야, 나야.”

방문을 두드린 사람은 사촌오빠인 재현이었다. 은지는 슬쩍 문 옆의 거울을 바라보았다. 눈물 자국이 선명한 눈가를 소매로 몇 번 문지르고는 살짝 긴장된 숨을 삼켰다. 잠깐 머뭇거리다 손을 뻗어 문을 열자, 재현이 살짝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사촌오빠라고 해봤자 저와는 큰 왕래도 없던 낯선 사람이었다. 은지는 은지대로 재현은 재현대로 사정이 있어서 요 몇 년간은 명절이나 친척 모임에서도 거의 만나지 못했던 터라 더 그랬다. 은지는 낯설기만한 사촌 오빠의 시선을 피하며 어색하게 물었다.

“왜, 왜……?”

“갑자기 미안. 너 아직 점심도 안 먹었다며? 오빠가 뭐 시켜줄까?”

재현 역시 갑자기 한집에 살게 된 사촌 동생이 불편해 보이긴 매한가지였다. 그래도 애써 불편한 기색을 감추며 상냥하게 말을 걸어주는 사촌 오빠에게 은지는 조금은 고마운 마음도 있었다.

“아, 아니. 나 입맛이 없어서.”

은지는 대충 그렇게 얼버무리고는 방문을 닫으려 했다. 자그마한 방은 이 집에 살기로 하면서 급하게 만들어진 저만의 공간이었다.

“잠깐만. 지금 벌써 7시야. 계속 아무것도 안 먹을 수는 없잖아. 속이 안 좋으면 죽이라도 사다 줄까?”

문을 닫는데 갑자기 손이 쑥 들어오는 바람에 하마터면 문에 손이 낄 뻔했다. 은지는 너무 당황하고 놀랐는데 재현은 아무렇지 않게 문을 잡은 채로 계속 말을 걸어왔다.

다정하게 저를 신경 써주는 사촌 오빠가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론 이대로 내버려 뒀으면 하는데 자꾸 말을 걸어오는 게 짜증이 났다.

지금 은지 자신은 울어서 얼굴도 얼룩덜룩 엉망이고 며칠 동안 제대로 씻지도 못해서 전체적으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에 반해 사촌 오빠인 재현은 원래도 친척들 사이에서 잘생겼다는 말을 심심찮게 듣는 훤칠한 외모인데다 지금은 어디 외출이라도 하고 온 건지 멀끔하게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완전히 비교되는 모습에 자존심도 상했다. 가뜩이나 하루아침에 세상이 뒤바뀌어 슬프고 괴로운데, 여기서 더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 같아 화가 났다. 어린아이나 할 법한 한심한 투정이라는 걸 알지만 그랬다.

“나가! 내 방에 들어오지 마!”

앞으로는 이 집에 얹혀살아야 하는 신세라는 걸 알면서, 제 방이라고 주장한 공간도 사실은 재현의 방이었다는 걸 알면서도, 은지는 빽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다.

놀란 재현이 문을 놓고 뒤로 물러나자마자 은지는 방문을 쾅 소리가 나게 닫았다. 그리고 곧바로 후회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제가 지금 얼마나 한심하고 무례한 행동을 한 건지 감도 잡히질 않았다.

이제 겨우 17살, 한참 사춘기를 앓고 있는 나이라는 걸 감안해도 스스로의 행동은 부끄럽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앞으로 이 집에 얹혀살게 된 신세로서 사촌 오빠인 재현에게 잘 보여도 모자랄 판국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걱정해서 말을 걸어주는 사람에게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다니. 재현이 저 같은 거랑은 같이 못 살겠다며 쫓아내려 해도 할 말이 없을 것 같았다.

은지는 밤새 울며 뒤척였다. 아침이 되면 작은아버지와 작은어머니가 들어와 자신을 쫓아낼 것만 같아서 무서웠다. 지금이라도 재현에게 미안하다고 자신을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사과를 하는 게 좋을까 고민하다 새벽 늦게야 겨우 잠이 들었다.

똑똑.

잠결에 희미하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커튼을 치지 않은 창을 통해 햇볕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도 그제야 느껴졌다. 은지는 귀찮은 듯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은지야.”

하지만 뒤이어 들려온 재현의 목소리에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제 그렇게 대형사고를 치곤 뭘 태연히 자고 있었던 걸까.

무슨 말을 하려고 아침부터 찾아온 거지. 은지는 잔뜩 얼어붙은 채 긴장된 숨을 삼켰다.

“어제는…… 오빠가 미안했어. 너 안 그래도 정신없고 힘들 텐데 오빠가 너무 눈치 없이 굴었어. 여기 아침밥 두고 갈 테니까 이거라도 좀 먹고. 난 지금 학교 가야 하고, 부모님도 아침 일찍 외출하셨어. 오빠가 현관문은 잠그고 갈 거니까 누가 와도 문 벌컥 열어주지 말고.”

낮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을 잇고는 돌아서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러다 잊은 게 있는 듯 다시 문 앞으로 돌아오는 인기척도 느껴졌다.

“아침 꼭 먹어.”

그리고 다시 걸어가는 발소리.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은지는 한참을 침대 위에 멍하니 앉아있다 몸을 일으켰다. 방문을 열자 문 바로 옆에 쟁반 하나가 있었다. 계란후라이에 고봉밥, 김치, 집 반찬을 조금씩 그릇에 옮겨 담아둔 게 보였다.

은지는 잠시 그 쟁반을 멀뚱히 내려다보다 몸을 낮춰 들어 올렸다. 조용히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자꾸만 눈물이 나서 밥도 반찬도 짜게 느껴졌다. 그래도 그날 먹은 아침밥이 평생 먹은 그 어떤 밥보다 더 맛있었던 것만은 확실했다.

그날 이후 은지는 조금씩 재현을 따르기 시작했다. 처음엔 재현이 집으로 돌아오면 방문을 조금 열고 인사를 하는 정도로 시작하다, 나중엔 재현에게 그날 하루 있었던 일들을 시시콜콜 털어놓는 사이까지 발전해있었다.

결혼기념일을 맞이해 여행을 떠나셨던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시고 홀로 남은 은지는 작은아버지인 신명훈의 집에서 지내게 됐다. 아직 미성년자인 은지가 혼자 살게 하기엔 무리라는 판단에서였다.

동시에 다니던 고등학교도 옮겨야 했고, 새로운 학교에서 적응도 해야 했다. 적응은 쉽지 않았다. 이미 대부분 학생들이 그룹을 지어 친해진 상태에서 혼자 중간에 전학을 온데다 은지 본인도 낯을 많이 가리는 바람에 반에서 겉돌게 됐다.

“『내가 드래곤의 딸로 태어난 사정』? 야, 이거 오타쿠들이나 보는 거 아니냐?”

며칠 전에는 은지가 쉬는 시간에 로맨스판타지 소설을 보고 있는 걸 남자애 하나가 보게 됐다. 남자애는 갑자기 은지가 보던 책을 빼앗아 가더니 자기 친구들에게 보여주며 큰소리로 외쳤다.

“우와, 진짜 이런 걸 보는 사람이 있구나. 나 오타쿠 처음 봐. 우웩.”

그 학교에서는 왠지 만화나 소설 같은 걸 대놓고 보면 한심한 인간으로 취급받는 분위기인 모양이었다. 웹툰 같은 건 스마트폰으로 자주 보고 자기들끼리 얘기도 자주 하는 것 같았는데 말이다.

제겐 관심도 없던 반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오더니 마치 자신을 전염병 환자라도 되는 양 쳐다보았다. 마치 누군가 하나 이렇게 걸려들기를 기대했던 사람들처럼.

깔깔대며 제 책을 이리저리 던지고 주고받던 아이들은 수업 종이 울리고 선생님이 오고 나서야 은지에게 책을 돌려주었다. 정확히는 은지의 발밑에 내던지고 간 거지만.

그 뒤로 은지는 더더욱 반에서 겉돌게 되었다. 어떻게 소문이 난 건지 복도에서도 모르는 얼굴의 학생들이 저를 보며 오타쿠! 하며 토하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

은지는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이 되면 아무도 없는 학교 체육관 뒤에서 혼자 조용히 밥을 먹거나 책을 읽었다. 재현이 오늘은 재미있는 일 없었어? 학교 친구들하고는 많이 친해졌어? 하고 물어보면 대충 말을 얼버무려버렸다.

“이건 무슨 책이야?”

하루는 아직 재현이 돌아올 시간도 아닌데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 깜짝 놀랐다. 최근 담임이 반에서 겉도는 저를 보고는 작은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걱정한 작은아버지가 사촌 오빠인 재현에게 저를 더 신경 써주라고 했다는 것도.

그래서인지 재현은 요즘 부쩍 더 제게 관심을 많이 보였다. 은지는 그런 재현의 관심이 불편하면서도, 그래도 유일하게 제게 상냥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 소중했다.

“이거 소설인데…… 오빠가 보기엔 재미없을 거야.”

혹시 재현도 자신을 오타쿠라 여기며 꺼림칙하게 여길까 봐 은지는 조심스러웠다. 책을 슬쩍 숨기며 시선을 피하는데 재현이 갑자기 활짝 웃으며 말했다.

“어? 진짜? 은지 너도 소설 좋아해? 오빠 웹툰도 좋아하고 판타지 소설도 엄청 봐. 은지도 소설 좋아하는지는 몰랐네. 진작 말해주지.”

재현은 대중적으로 유명한 웹툰과 소설을 언급하며 잔뜩 들뜬 얼굴로 말을 늘어놓았다. 그 기세에 타올라 은지도 자기가 좋아하는 만화와 소설 얘기를 잔뜩 해버렸다. 당연하게도 재현은 대부분 잘 모르는 소설인 듯 했지만 은지를 무시하거나 한심해하지 않고 즐겁게 얘기를 들어주었다.

“아, 맞다. 은지 너 원래 미술학원 다녔다고 했었지? 아니, 웹툰 학원이었나?”

그러다 보니 이 집에 오기 전까지는 웹툰 작가가 되고 싶어서 부모님을 졸라 학원에 다니고 있었다는 얘기까지 나오게 됐다. 이 집으로 오게 되면서 자연히 관두게 되었지만 언젠가는 내 힘으로 직접 멋진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이야기도.

“은지 멋있다. 오빠는 딱히 꿈이 없어서 그런지 요즘은 꿈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제일 멋있어 보이더라. 오빠 친구 중에도 웹툰 작가가 꿈인 친구 있어. 지금 공모전 준비하고 있다고 하더라고.”

재현은 끝까지 은지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고 마지막엔 멋진 꿈이라며 응원한다는 말까지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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