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엇갈리는 마음의 행방 (36)
“잘 가라, 클레어 헤더.”
차마 뒤를 돌아보지도 못한 채 굳어버린 나는 에이든 헤더로부터 작별 인사를 받았다. 즐거워서 견딜 수가 없다는 듯 환하게 웃는 사촌의 얼굴이 시야에 박혀 들었다.
“클레어!”
한 번 더 쿵, 하고 땅이 진동하는 것과 동시에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떨리는 시선을 가져가자 저 멀리서 나를 향해 달려오는 리하르트 아델이 보였다.
왜 하필 또 저 사람일까, 어째서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이 순간에조차 저 사람을 봐야 하는 걸까. 서러움이 밀려들었다. 그런데도 손을 뻗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그가 아닌 누구라도 그랬을 테니까.
도와줘, 죽고 싶지 않아.
돌아가고 싶어. 유리 황녀에게, 알렌 4황자에게.
사실은 말하고 싶었어. 나도 당신을 좋아한다고, 당신의 곁에 있고 싶다고.
그 사람에게, 레이몬드 2황자에게.
그렇게 괴로운 얼굴을 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어. 웃게 해주고 싶었어.
아무것도 전하지 못했어. 아무것도.
‘싫어,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아. 제발…….’
나는 간절히 손을 뻗었고, 황금빛 결계에 손끝이 다시 닿은 순간.
콰직, 하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눈앞의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 마치, 연극이 끝난 후 막이 내린 무대 뒤에 홀로 선 것처럼.
* * *
리하르트는 영주성 내의 사용인들의 눈을 통해 클레어가 후문 쪽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요 며칠 계속된 그의 일과 중 하나였다. 클레어 헤더가 어디 있는지 파악하고 시간을 내어 만나러 가는 것.
본인이 그 사실을 달가워하든 그렇지 않든 그랬다. 스토커나 다름없는 스스로의 행동에 거부감이 들만도 하건만, 리하르트는 최근 무척 즐거워하고 있었다.
상대가 제 얼굴을 보자마자 똥이라도 씹은 듯한 얼굴을 해도, 어떻게든 제게서 벗어나려 애를 쓰는 모습을 보아도, 그런 것조차 재미있었다. 악취미라고 불러도 어쩔 수 없었다. 즐거운 건 즐거운 거였으니까.
어차피 그 자신도 본래 제 성격이 좋지 않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딱히 감출 마음도 없었고, 애초부터 클레어의 앞에서 제 본성을 감춘 적도 없었다.
클레어 역시 그런 자신을 좋아했었다. 지금은 제게 화가 많이 나 있는 상태라 저러는 것일 뿐. 머지않아 다시 제게 돌아와 줄 거라고 리하르트는 믿고 있었다.
다만, 이틀 전 제 가슴을 치며 눈물을 보일 때는 저도 조금은 마음이 불편했다. 아니, 불편하다는 표현보다는…… 클레어의 주먹이 닿는 곳이 저리듯 아파 왔었다. 진짜로 맞은 곳이 아파서가 아니라, 자그마한 주먹이 자신을 내리치는 모습에서 클레어가 받았던 상처가 엿보이는 것 같아서였다.
원망하듯 소리치며 울음을 터뜨리는 그 모습이, 자신이 그녀에게 끝을 고했던 그날에 미처 보이지 못했던 눈물을 뒤늦게 토해내는 것만 같았다.
그때 자신은 클레어에게 어떤 표정으로, 어떤 말투로 말을 했던가. 이제 너 같은 건 필요 없다는 식으로 잔인하게 클레어를 내쳤던 과거의 기억들이 떠오르자 다시 가슴 한편에 묵직한 돌을 얹어놓은 듯 괴로워졌다.
리하르트는 짜증스레 미간을 구겼다. 그래도 그딴 식으로 말하지는 말지. 마지막 인사만큼은 조금 더 예의를 갖추고, 그녀의 마음을 이해해줬어야지. 쓰레기 같은 새끼가.
처음부터 저밖엔 모르던 여자였다. 바보 같을 정도로 착하고, 순진하고, 여린 사람이었다. 그런 여자를 많은 정부 중 하나로 삼고, 마지막엔 이제 쓸모없는 도구 취급하며 내버렸다. 저를 붙잡지도 못하고 슬픈 얼굴로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하던 여자를 내버려 둔 채 돌아섰었다.
귀찮게 들러붙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그것만은 고맙게 여긴다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가슴이 더 답답해졌다. 동시에 아주 조금 자신이 없어졌다.
리하르트는 자신이 클레어라면 과연 그딴 남자를 정말 잊지 못했을까, 다시 좋아하게 될 수 있을까, 고민해보았다.
괜한 생각 덕분에 자신감이 더 사라졌다.
리하르트는 복잡한 머릿속을 털어내며 걸음을 옮겼다. 후원에 발을 들이자마자 클레어를 발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영주성의 후문 쪽을 기웃거리고 있는 클레어의 모습에 리하르트는 미간을 찌푸렸다.
너무 결계 가까이에 가는 건 좋지 않을 텐데. 클레어의 뒤로 다른 병사들이 감시하듯 서 있는 게 보였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곧바로 클레어에게 다가가려던 리하르트는 멈칫 걸음을 멈췄다.
‘더 확실하게 사과를 하는 게 나으려나.’
헤어졌던 날에 대해 먼저 얘기를 꺼내고, 진심을 담아 사과를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뭐든 다시 시작하려면 과거부터 깨끗이 정리하는 게 우선이었다. 클레어 역시 그날의 일을 아직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듯했고, 리하르트는 거기서부터 정리를 해나가기로 결심했다.
리하르트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하고, 또 무슨 말로 사과를 해야 좋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시작해야 클레어가 마음을 풀고 다시 저를 돌아봐 줄 수 있을지 생각하던 리하르트의 시야에 이상한 점이 눈에 띈 건 그때였다.
후문 쪽에 경비를 서고 있던 병사들이 하나같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리를 뜨는 게 보였다. 교대 근무를 설 다른 병사들이 온 것도 아닌데 그랬다. 리하르트는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무슨 일인지 곧바로 파악이 되질 않았다.
상황 파악을 하기 앞서 리하르트는 급히 근무 중 이탈을 하는 병사들을 붙들었다. 직접 묻는 게 빠를 것 같아서였다.
“아, 저 그게. 영주님께서 급하게 저희들을 부르신다고 하셔서요.”
리하르트에게 붙잡힌 병사들이 본인들도 무척 당황스럽다는 듯 말했다. 그의 눈치를 살피며 후문 쪽을 가리키는 시선들이 떨떠름했다.
“그동안 대신 황실에서 나온 기사들이 경비를 선다고 들었습니다. 저기 있는 저 기사가…….”
병사들의 시선을 따라 리하르트도 클레어가 있는 후문 쪽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이쪽 방향에서는 클레어의 모습이 전혀 보이질 않았다. 순간 불안해진 리하르트가 알겠다며 병사들을 보내고는 성큼 성큼 걸음을 옮겼다.
후문이 보이는 방향으로 걸어가자 정말로 황실기사단 소속의 제복을 입고 있는 기사 한 명이 보였다. 어두운색의 후드를 뒤집어써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제 부하들 중 하나인 건 확실했다.
그래도 가뜩이나 성녀가 자객에게 습격당한 일로 예민해져 있는데, 후문 쪽 경비가 기사 한 명밖에 없다는 건 이상했다. 총책임자인 자신이 영주에게 따로 뭘 들은 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영주성의 사병들 대신 황실의 기사가 경비를 선다는 사실은 전혀 들은 바가 없다.
뭔가 위화감을 느낀 리하르트가 부지런히 발을 움직여 후문으로 다가가는 찰나였다.
“무슨…….”
리하르트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눈앞의 상황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클레어의 뒤로 접근한 기사가 그녀를 밀쳐 결계 밖으로 밀어낸 것이었다. 결계 가까이에 서 있던 클레어는 힘없이 밀려나 결계 밖에 주저앉게 되었다.
지금 저 미친 새끼가 무슨 짓을 한 걸까, 믿을 수가 없었다. 클레어 역시 제게 한순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할 수 없는 듯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그러면서도 겁에 질린 눈으로 제 앞에 선 기사를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애처로웠다.
떨리는 손이 결계에 가 닿았고, 무력하게 가로막혔다. 당연했다. 결계는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나가는 건 가능했지만 반대는 절대 불가능했다. 결계란 건 그런 의미니까.
쿵, 땅이 울렸다. 거대한 무언가가 이쪽으로 접근해오는 소리였다. 클레어의 등 뒤로 긴 그림자가 그려졌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클레어!”
리하르트는 검을 뽑을 생각조차 못 한 채 미친 듯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살면서 이토록 뭔가를 강렬히 바라며 필사적으로 내달린 적이 있던가. 리하르트는 절망이 깃든 눈을 일그러뜨리며 클레어를 향해 달려갔다.
닿아라. 늦지 않게. 닿아야 해, 제발. 제발.
분명 있는 힘껏 달리고 있는데 마치 자신의 시간만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달려도 거리는 가까워지지 않고, 클레어의 등 뒤로 다가온 거대한 그림자만이 짙어졌다.
눈이 마주쳤다. 슬프게 흐려진 클레어의 눈동자가 저를 바라보며 손을 뻗어왔다. 리하르트는 그 손을 잡고 싶었다. 너무도 간절하게.
콰직-.
그건 정말 순식간이었다. 커다란 아가리를 벌린 마물이 단숨에 클레어를 집어삼켰다. 날카로운 이빨이 맞부딪치며 섬뜩한 소리를 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발밑이 무너지는 듯한 끔찍한 감각이 전신을 덮쳤다. 달려나가던 발이 점점 느려지더니 결국 멈춰 서고 말았다. 쓰러질 것만 같은 다리를 겨우 바로 세운 채 리하르트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먹잇감을 한 입에 먹어치운 마물은 만족한 듯한 울음소리를 내며 날아올랐다. 새의 형태를 한 거대한 몸체가 돌풍을 일으키며 날아올라 바다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안 돼.
저 마물을 저대로 내버려 둬선 안 된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이성을 잃은 눈동자가 위험하게 빛났다. 생각보다 몸이 더 빠르게 움직였다. 검을 뽑아든 리하르트는 그대로 결계를 향해 뛰어들었다.
“단장님, 안 됩니다!”
“어이, 빨리 와서 붙잡아!”
어떻게 알고 온 건지 그의 부하들과 처음 대화를 나눴던 병사들까지 달려들어 리하르트의 팔과 다리를 붙들었다.
소리를 듣고 다가온 다른 하급 개체며 중급 개체들까지 속속들이 이쪽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마법사들도 없는 지금, 제 아무리 리하르트 아델이라도 혼자 저 많은 개체들을 다 상대할 순 없었다. 다른 기사들이 합세한다 해도 이쪽의 피해가 전혀 없진 않을 터였다.
그걸 아는 이들은 죽자 사자 리하르트를 저지하기 위해 매달렸다.
“놔!”
결계에 닿기 직전 강제로 떨어뜨려진 리하르트가 고함을 지르며 자신의 팔다리를 붙든 이들을 떨쳐내려 했다.
“단장님, 제발!”
“이미 늦었습니다! 정신 차리십시오!”
여럿이 달려들어 겨우 리하르트를 멈춰 세웠고, 가장 가까이에 있던 기사가 외친 말에 리하르트의 움직임이 멈췄다.
붉게 충혈되어 절망 밖에 깃들지 않은 눈동자가 결계 너머를 응시했다. 분명 클레어가 주저앉아있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자신이 아니었어야 했는데. 자신이 아니라, 레이몬드 알렉 카지스가 여기에 있었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이렇게 허무하게 잃지 않았을 텐데. 구할 수 있었을 텐데. 그랬다면……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운 상실감을 느끼지 않아도 됐을 텐데.
“윽…….”
악문 잇새가 떨렸다.
두려움에 얼어붙었던 연갈색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도와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싫어하고 끔찍해 하던 제게 손을 내밀 정도로 간절했던 것이다. 살고 싶었던 거다.
무력하게 결계 앞에서 멈춰 서있는 스스로가 비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더는 그 빈자리를 바라보는 것조차 괴로웠다.
“아아아악!”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린 리하르트의 입술을 비집고 처절한 절규가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