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엇갈리는 마음의 행방 (35)
“내가 한 번씩 물건을 자주 떨어뜨리는 거 본 적 있어?”
시온은 이건 자신의 가문에서도 아주 극소수밖에 모르는 사실이라며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거렸다.
“손이 점점 마비되어가는 과정이야. 원인도 몰라. 온 대륙의 명약들도, 신관의 치유도 소용없어.”
시온이 정말 별일 아니라는 듯 여상스럽게 내뱉은 말에 나는 너무 놀라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겉보기엔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였지만, 나는 그동안 시온이 쥐고 있던 물건들을 떨어뜨리곤 인상을 쓰며 그것들을 다시 줍는 모습들을 심심찮게 봐왔었다. 그때는 별생각 없이 넘어갔던 일들이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전부 그런 이유에서였구나 하고 뒤늦게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내게는 비슷한 기억이 있다. 너무 어릴 때라 빛이 바래 지금은 희미해진 기억이지만, 분명 내 아버지도 비슷한 상황을 겪었던 기억이 아직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아버지가 직접 내게 자신의 손이 마비되어간다고 말해주신 적은 없으나, 이따금 괴로운 듯 오른손을 움켜쥔 채 괴로워하는 모습 또한 본 기억이 있다. 쥐고 있던 물건을 떨어뜨리고 그걸 다시 주우며 애써 슬픔을 삼키는 얼굴도.
그리고 그런 모습을 내게 들켰을 때면 일부러라도 더 활짝 웃으며 나를 끌어안아 주셨던 기억도. 내겐 그리 많지 않은 어린 시절의 소중한 기억들 중 하나였다.
“이젠 그리고 싶어 미칠 것 같은데 아무것도 그리지 못하게 된 거야.”
작게 한숨을 삼키며 시온이 흐릿하게 웃었다. 잠깐 다른 상념에 잠겼던 나는 눈을 한 번 깜빡이며 시선을 들었다.
“그래서 이젠 재능을 지니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사람을 보면 내가 견딜 수가 없어.”
그렇게 말하며 시온이 손가락을 들어 나를 척하니 가리켰다. 이번엔 대놓고 한숨을 푸욱 내쉬기도 했다.
“난 네가 지닌 재능이 아까워 미칠 것 같아.”
그러면서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에 어떻게든 내가 자기를 따라가도록 만들고 싶다는 열망이 가득했다. 부담스러운 시선으로 한참을 나를 응시하는 그녀는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며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황자에게 직접 내가 알테노이즈 본인이라는 걸 증명받았으니 내 능력을 의심할 필요는 없을 테고…….”
예쁜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만든 시온이 진지한 시선으로 내 눈동자를 직시해왔다. 평소의 장난기 가득한 눈빛이 아니었다.
“나는 앞으로 3시간 후에 이곳을 떠나. 재촉하지 않으려 했지만 시간이 없어. 그 안에는 결정을 해줘.”
시온은 무조건 나를 따라오라는 말 대신 그 말을 남긴 후, 그대로 내 방을 떠났다.
혼자 남겨진 나는 잠시 허공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제는 눈에 익은 복도와 건물을 지나쳐 성녀를 찾아갔고, 예상대로 방문을 거부당했다.
이제 어떡하면 좋을까, 생각하며 이리저리 걷다 보니 어느새 영주성의 후문까지 걸어와 있었다. 낯선 풍경이 나타나 주변을 둘러보자 눈이 마주친 병사들이 눈짓으로 내게 인사를 건네오는 게 보였다. 나는 그에 어색하게 인사를 받으며 다시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성녀가 두 번이나 자객에게 습격을 당한 탓인지, 영주성 내부는 과하다 싶을 만큼 많은 수의 병사들이 여기저기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 덕분에 조금 안심이 되기도 하면서 어딜 가도 느껴지는 시선에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다.
끼에에에에엑.
멀리서 희미하게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곳 멜리트 영지에 머물면서 자주 들어왔던 터라 이제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몇 번을 들어도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는 소리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주위의 다른 병사들도 무심코 허리춤의 검에 손을 대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나는 영주성의 요새처럼 높은 성벽을 올려다보았다. 성벽의 위로 시선을 가져가니 황금빛의 결계가 곧바로 시야에 들어왔다. 몇 번을 보아도 신기하고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반투명한 막이 거대한 돔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영주성이 영지의 서쪽 외곽에 위치해 있다 보니 결계와 무척 가까웠다. 특히 후문 쪽으로 오니 그 거리가 더 좁혀져 후문을 나가 손만 뻗으면 결계가 닿을 만큼 가까웠다.
나는 슬쩍 후문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상급 개체일수록 바다의 문으로부터 멀리 떨어질 수 없다고 들었던 대로, 결계 너머에는 소수의 하급 개체들만이 어슬렁거리며 결계에 들러붙어 있었다.
‘어…….’
멀찍이 떨어져서 결계 너머를 응시하던 나는 순간 시야에 낯익은 얼굴이 스쳐 놀란 눈을 크게 떴다.
예전에 바다 근처까지 갔을 때 봤던 여자아이가 있었다. 정확히는 여자아이가 아니라 비슷한 모습을 한 마물이겠지만. 여전히 바다의 요정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푸른색으로 칠해진 것 같은 모습에 꼭 아는 사람을 마주한 것처럼 살짝 반가운 마음도 들었다.
그 애도 나를 알아본 것처럼 생긋 웃었다.
순간 머릿속에 뭉게구름 같은 안개가 훅 퍼지는 것만 같았다. 시야마저 흐릿해지는 느낌이 들어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었지? 왠지 잘 생각이 나질 않았다. 나는 다시 눈을 비비적거렸다. 졸리기도 하고 기운이 하나도 없는 게 어딘가 앉아서 좀 쉬고 싶었다.
[안녕.]
어서 방으로 돌아가야지, 하고 생각한 찰나였다. 귀가 아니라 머릿속으로 곧바로 전달되는 듯한 음성이었다. 마치 말을 막 배운 아이처럼 어눌한 발음과 목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결계 너머의 여자아이를 바라보았다.
“너무 가까이 가시면 안 됩니다.”
갑자기 병사들이 다가와 내 앞을 막아서기에 뭔가 했더니, 어느새 내가 후문 앞까지 걸어와 있었다. 머릿속이 몽롱한 상태로 나는 병사들 중 왼쪽에 있는 남자에게 말했다.
“결계 밖으로 나가지만 않으면 괜찮죠?”
내가 방금 무슨 말을 했지? 뭔가 말을 한 것 같은데 이상하게 생각이 나질 않았다.
다행히 이상한 말을 한 건 아니었던 모양인지, 내 앞을 막아섰던 병사들이 서로 눈길을 주고받더니 순순히 옆으로 비켜주었다. 두 사람이 내게 뭐라고 말도 한 것 같은데 잘 들리지가 않았다. 꼭 누가 내 귀를 틀어막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후문을 향해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걸어갔다. 후문을 지나 결계로부터 다섯 걸음 정도를 남겨놓고 멈춰 섰다. 그런 나를 따라 병사들도 아예 후문 밖으로 나와 감시하듯 나를 지켜보는 게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들어 여자아이를 올려다보았다. 가까이서 본 여자아이는 생각보다 무척 컸다. 멀리서 볼 때는 작은 요정처럼 보였는데 실제로는 내 키의 2배는 됨직해서 놀랐다.
생각보다 너무 거대한 느낌이라 놀라긴 했지만 이상하게 두렵진 않았다. 오히려 이 애에게 더 다가가고 싶은 마음만 들었다. 내가 가만히 저를 바라보기만 하자 결계 너머의 마물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마물보다는 사람에 가까운 행동에 나는 점점 더 경계심이 옅어지는 걸 느꼈다.
이 애도 진짜 사람을 해치고 그러는 걸까. 정말 무해하고 착해 보이는데. 외형도 저기 보이는 징그러운 마물들에 비하면 사람에 가까운 형태고. 바다에서 이렇게까지 멀리 나온 걸 보면 이 애도 아마 하급 개체 중 하나일 테지.
어쩌면 사람을 잡아먹거나 해치지 않는 개체일지도 몰라.
예쁘다. 더 가까이서 보고 싶어.
지금 스스로가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결계로 다가가는 걸음을 멈추질 못했다. 그저 눈앞에 있는 아름다운 피사체를 더 가까이서 보고 싶다는 갈망에 지배당할 뿐이었다.
“예? 영주님께서요?”
멈칫.
결계에 이제 정말 손끝이 닿으려던 순간이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의아한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결계를 사이에 두고 코앞에 와있는 여자아이의 웃는 얼굴을 마주했다.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나는 불에 덴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여자아이의 모습을 한 마물의 얼굴에 실망의 기색이 스쳤다. 순진무구하던 눈동자가 한순간 서늘한 무기질의 빛을 띠더니 이내 내게서 흥미를 잃은 듯 돌아서서 가버렸다.
방금까지 내가 뭘 하고 있었던 거지. 그 잠깐 사이에 뭔가에 깊이 홀렸던 기분이었다. 뒤에서 병사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난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 상상만 해도 끔찍한 상황을 그려보던 나는 덜덜 떨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영주성 안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리는데, 아까 봤던 병사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황실기사단 소속으로 보이는 기사 한 명이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황실기사단의 문양이 그려진 제복과 허리춤의 검에 눈길이 갔다.
아까 그 병사들은 어딜 간 건가? 그 사람들 대신 저 기사가 온 걸까.
황실의 기사는 제복 위로 걸친 후드를 깊이 눌러써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기사는 내게 할 말이라도 있는 것처럼 내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나는 내가 뭔가 잘못하기라도 한 걸까, 괜히 눈치를 살피며 기사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거리가 가까워져도 기사는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왜 이렇게 가까이 다가오는 거지 하고 생각한 찰나, 뻗어온 손이 내 어깨를 강하게 밀쳤다.
어? 하는 순간 몸이 황금빛의 결계 너머로 밀려났다. 보던 그대로 반투명한 막 같은 것을 통과하는 기묘한 느낌과 함께 나는 어느새 결계 밖에 주저앉아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상황을 머리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잠시 시간이 걸렸다.
나는 주저앉은 채 멍하니 눈앞에 보이는 황금색 결계에 손을 대어보았다. 분명 저 안쪽에서는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막을 통과해 나왔는데, 지금은 크고 단단한 바위를 만지는 것 같았다. 그 무엇도 통과시키지 않는 거대한 방패와 같이 느껴졌다.
끼에에에에엑.
결계 안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 사실을 자각한 찰나, 몇 번이고 들어왔던 마물의 울음소리가 귓가를 찌르듯 울렸다.
큭,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얼어붙어 꼼짝도 하지 않는 몸을 겨우 움직여 고개를 들었다.
“우리 오랜만이다?”
몸을 들썩이며 웃어대던 기사가 손을 들어 쓰고 있던 후드를 벗어 내렸다.
“설마 내 얼굴도 까먹은 건 아니겠지?”
후드를 젖히자 드러난 얼굴은 불행히도 내가 너무나 잘 아는 얼굴이었다.
에이든 헤더. 나의 사촌이자, 내가 사람을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해준 유일한 존재. 이 인간이 대체 왜, 어떻게 여기 있는 걸까 혼란스러운 눈으로 멍하니 에이든을 올려다보았다.
“날 이딴 곳에 보내 놓고 네가 잘먹고 잘살 줄 알았냐? 납치됐다기에 어디 늙은 영감한테 팔려 가거나 뒈진 줄 알았더니 기분 나쁘게 멀쩡히 살아 있고 말야. 거기다 뭐? 2황자의 약혼녀? 네까짓 게?”
푸하하! 말도 안 되게 웃긴 소릴 들었다는 듯 에이든이 큰 소리로 웃어댔다.
“야. 사람은 말야, 자기 분수를 알고 살아야 하는 거야. 주제 파악도 못 하는 멍청이는 보기만 해도 기분 더럽지 않아?”
쿵, 하고 땅이 울리며 진동했다.
미친 사람처럼 웃어대던 에이든의 표정이 변했다. 흠칫 얼굴을 굳히더니 이내 뭘 본 건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그리고 또 쿵, 쿵. 거대한 무언가가 땅을 울리며 등 뒤에서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