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엇갈리는 마음의 행방 (34)
“웬일로 네가 제일 먼저 보여? 네 누님은 어쩌고.”
레이몬드는 따스한 시선으로 알렌을 바라보며 물었다. 말을 하면서 주위를 확인하려 했지만 알렌이 워낙 가까이 다가와 있는 탓에 마력구 속에 보이는 건 귀여운 막냇동생의 얼굴뿐이었다.
그의 질문에 알렌이 우물쭈물하며 눈치를 살폈다. 딱히 그 질문이 알렌을 곤란하게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레이몬드가 살짝 당황하는 찰나.
“실은 누님 몰래 연락해써요.”
“네가?”
“네, 누님은 얌전히 기다리라고 했거든요.”
의외의 말을 들은 레이몬드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유리 몰래 내게 연락을 한 거라고? 유리는 알렌에게 얌전히 기다리라고 했고? 그럼 그동안 계속 내게 연락을 걸어왔던 것도 유리가 아닌가.
유리가 아닌 알렌이 제게 직접 마력구를 통해 연락을 해온 것부터 전부 의외의 사실들 뿐이라 레이몬드가 잠시 생각에 잠겼을 때였다.
“이짜나요, 두째 형님.”
머뭇거리던 알렌이 자그마한 목소리로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레이몬드는 뭐든 말하라는 듯 다정하게 ‘응.’하고 답했다. 알렌은 한참을 입을 벙긋거리며 망설이더니 어렵게 뒷말을 꺼냈다.
“형슈님은 언제 와요?”
레이몬드의 입가에 희미하게 맺혀있던 미소가 느리게 사라졌다.
“알렌, 두째 형님도 형슈님도 너무너무 보고시퍼요. 같이 케이크도 먹고, 놀러도 가고, 얘기도 하고, 손도 잡고 시퍼요. 그런데 왜 계속 오지 않아요? 두째 형님도 형슈님도 안 와요. 알렌 슬퍼요. 꿈도 꿔써요. 두째 형님이랑 형슈님이랑 같이 노는 꿈이어써요. 그런데 깨고 나면 두째 형님도 형슈님도 없어서 엉엉 울어써요. 그래서 누님한테 사나이는 우는 거 아니라고 많이 많이 혼나써요.”
“알렌.”
울먹거리며 말을 잇는 막냇동생을 조용히 지켜보던 레이몬드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형수님이 아니라 헤더 영애야.”
냉정하게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레이몬드의 태도에 알렌의 눈동자가 충격을 받은 듯 커졌다. 그에 아랑곳 않고 레이몬드는 한 번 더 못을 박았다.
“형수님이 아니야.”
“누님이 이제 곧 그렇게 될 거라고 해써요!”
알렌이 곧바로 뚱한 얼굴로 반박을 해왔다.
“안 될 거야.”
“왜요?”
“헤더 영애는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 될 거니까.”
“시러요.”
알렌이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귀여운 얼굴을 한껏 찡그렸다.
“시러요! 시러요! 형슈님은 두째 형님하고 결혼할 거예요!”
그리고 고개를 좌우로 마구 저으며 떼를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레이몬드가 제가 원하는 대답을 선뜻 내어주지 않자, 이번엔 눈물을 그렁이며 애원하듯 레이몬드를 올려다보았다.
“그쵸? 두째 형님도 형슈님 조아하자나요. 근데 왜 형슈님 하면 안 돼요? 왜요?”
“…….”
아마 여기서 적당히 그래, 하고 대답만 해주면 제 막냇동생은 안심하고 얌전히 제자리로 돌아갈 터였다. 거짓말이라도 당장 그렇게 대답하고 나면 알렌이 슬퍼할 일도, 자신도 굳이 저 어린 동생에게 상처를 줄 일도 없다.
그런데 레이몬드는 알렌이 원하는 대답을 내어주지 않았다. 거짓말 대신 침묵을 택하자, 눈치 빠른 알렌이 본격적으로 울먹이기 시작했다.
흐아앙. 결국 알렌이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고, 지금껏 곁에서 조용히 서 있던 알렌의 유모가 놀라 다가오는 모습이 마력구 너머로 보였다.
“아, 알렌님. 진정하세요.”
우는 알렌을 달래려 안절부절 못하는 유모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레이몬드는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어버렸다. 더는 억지로 웃을 기력도 없고, 서럽게 울음을 터뜨리는 막냇동생을 지켜보는 것도 힘들었다.
레이몬드는 마력구를 맞은편 소파에 적당히 처박은 뒤 다시 소파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그 상태로 창가를 돌아보자 어느새 해가 지고 깜깜해진 밤하늘이 보였다.
언제 밤이 된 건지도 모르겠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새까만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레이몬드는 문득 치미는 갈증에 시선을 돌렸다. 몸을 움직여 테이블에 올려두었던 술잔을 다시 집어 드는데, 영주성의 하녀가 실수로 과일주를 내어왔던 때의 기억이 불쑥 떠올랐다.
향긋한 과일주에 취해서 저를 향해 예쁘다고 중얼거리던, 지켜보는 이쪽이 더 정신을 못 차릴 만큼 예쁜 얼굴로 웃던 클레어의 미소가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리고.
―취했을 땐 무슨 말을 해도 안 듣습니다. 억지로 데려가야 할 겁니다.
당당하게 그녀의 곁에 다가서서 자신이 누구보다 그녀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듯 말하던 남자자도.
―전하께선 잘 모르시겠지만요.
오늘 영주성 안에서 그 남자와 함께 있던 클레어를 보았다. 지금도 자신에겐 그 남자뿐이라 말하는 그녀를 마주하는 게 괴로웠다. 그녀의 감정을 무시한 채 저를 봐달라 애원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는 것도 죽을 만큼 힘들었다.
그래서 영주성을 떠나 미친 듯이 일에만 매달렸었다. 뭐든 달리 몰두할 게 필요했다. 조금만 방심해도 리하르트 아델에게 돌아갈 것이라 말하던 그녀가 떠올라 괴로웠으니까. 당신은 절대 아니라고 말하는 차가운 눈동자가 머릿속에서 사라지질 않으니까.
커다란 창 너머로, 저를 외면하듯 등을 돌려 걸어가던 클레어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와 함께 걸어가며 저를 돌아보던 리하르트 아델이 있었다.
저를 향한, 네 자리는 없다고 말하는 듯한 그 자신만만한 시선이…… 참을 수 없이 거슬렸다.
쩌적, 금이 가던 유리창이 섬뜩한 소리를 내며 깨졌다. 레이몬드는 시선이 닿는 유리창을 전부 깨부수고는 태연히 술잔을 들었다. 몇 잔 들이켜다 보니 금세 또 한 병이 비워졌다.
아무리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 몸이 도리어 짜증스러웠다. 아예 취해서 잠이라도 들었으면 하는데 그조차도 불가능한 탓이었다.
다른 술병을 더 꺼내기 위해 소파를 손으로 짚고 일어서려는데, 손바닥에 무언가가 덜그럭거리며 거치적거렸다. 뭔가 하고 내려다보니 자객의 습격으로 망가진 아티펙트 팔찌 대신 새로이 방어마법을 걸어둔 팔찌였다.
클레어에게 주기 위해 만든 거였다. 갑자기 너무 많은 일이 있어 건네주는 걸 깜빡한 탓에 아직 이 팔찌가 제게 있었다.
레이몬드는 그 팔찌를 한 번 힘주어 꽉 쥐고는 스르륵 흘려버렸다. 잘그락 하고 팔찌가 바닥에 떨어지며 소리를 냈다.
새 술을 가져오는 대신 다시 등받이에 몸을 기댄 레이몬드가 한쪽 팔을 들어 제 눈을 가렸다. 아무리 술을 마셔도, 아무리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결국엔 후원에서의 마지막 대화로 되돌아가고 만다. 레이몬드는 제 눈을 가린 채 이를 악물었다.
―그쵸? 두째 형님도 형슈님 조아하자나요. 근데 왜 형슈님 하면 안 돼요? 왜요?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처음부터 그 남자였다는데.
저는 아니라는데.
제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그녀가 진정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내주는 것밖에 없었다. 클레어 헤더는 리하르트 아델을 사랑하니까. 레이몬드 알렉 카지스가 아니라.
―그러니 가요, 어서.
온 힘을 다해 허세를 부렸던 기억이 후회스러웠다. 알렌처럼 울며 매달려볼걸. 원망을 받더라도 놓아주지 말걸. 유리와의 약속을 빌미로 어떻게든 붙잡을걸. 동정이든 연민이든 뭐든 상관없는데.
후원에서 진짜 그녀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내 곁에 있어 달라는 애원뿐이었는데.
* * *
똑똑똑.
이제 막 해가 머리 위로 올라온 시각. 간단하게 점심 식사를 마친 후에 익숙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옷매무시를 바로 하고 일어나 문가로 걸어갔다.
“클레어.”
문을 여자 시온이 여느 때와 같은 웃는 얼굴로 나를 반겼다.
그렇지 않아도 내가 먼저 그녀를 찾아가려 했던 나는 어설프게라도 웃으며 그녀를 맞이했다.
“생각은 좀 해봤어?”
아직 성녀를 만나지 못한 나는 차라리 이대로 시온에게도 버려지는 쪽도 고려하고 있었다. 그녀에게까지 민폐를 끼칠 바에야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혼자 어떻게든 버텨보는 게 나을 것 같았으니까.
이제 시간이 없었다. 결론이 나지 않는 고민을 계속해봤자 소용이 없었다. 시온은 이곳을 떠나야 하고, 나는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기회가 눈앞에 있더라도 그걸 포기해야 했다.
나는 잔뜩 기대 어린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크게 숨을 들이마신 후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내뱉으려는 순간이었다.
“클레어는 내가 어떻게 보이지?”
시온이 불쑥 꺼낸 질문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질문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시온이 씩 웃었다.
“솔직히 말해 나는 내가 딛고 서 있는 세계에서 누구보다 성공했다고 자부할 수 있지. 그건 아마 알테노이즈의 명성을 알고 있는 이라면 누구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거라 생각해.”
시온은 당당한 눈동자로 나를 똑바로 응시해오며 자신의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 싶지 않은 건 거절할 수 있고, 내가 그리고 싶은 것만 그릴 수 있어. 세상 모두가 날 천재라고 떠받들고 고고한 왕족들조차도 내 작품을 탐내며 눈치를 보는 형편이지. 처음 세상에 내 그림을 내보였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나는 한 번도 최고가 아닌 적이 없었어. 물론 오롯이 내 힘만은 아니라 운도 따랐고, 내가 속한 가문의 이름도 어느 정도 적용되긴 했지만, 그래도 내 실력이 최고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어.”
평소에도 보이는 습관처럼 그녀가 오른손을 쥐었다 폈다 하고는 힘없이 내렸다. 그러고는 어딘가 조금 괴로워 보이는 얼굴로 웃었다.
“하지만 그런 내게도 결국 피할 수 없는 벽이 나타나긴 하더라고. 죽을 만큼 괴로웠고, 정말 죽으려고도 했어. 지금의 나를 봐선 상상도 못 할 일이지? 그런데 그게 고작해야 몇 달 전의 일이야.”
너무 놀라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기만 하는 나를 두고서 시온이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죽는 것도 쉽지가 않았어. 내가 은근 신을 믿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무저갱의 나락에 떨어질까 무섭기도 했고.”
양손을 교차시켜 팔을 감싸며 부르르 떠는 모습이 장난스러우면서도 진심 같아서…… 나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다행히 시온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나를 크게 개의치 않고서 본인이 하고 싶은 말들을 천천히 들려주었다.
“사실 어릴 때 나는 거칠 게 없었거든. 뭘 그려도 칭찬 일색, 최고의 찬사만 받아왔고. 그래서 게으름을 부렸지. 어차피 난 언제든 원하는 걸 그릴 수 있고, 평생 이렇게 최고의 자리에만 있을 텐데, 뭐하러 그렇게 아득바득 그리고 사나 싶어서. 내가 그리고 싶은 것만 그리고, 그리고 싶지 않은 건 그리지 않았어. 중간에 그리고 싶지 않다며 포기하고 내던진 적도 많아.”
시온이 힘없이 떨어뜨렸던 손을 다시 눈앞까지 들어 올렸다. 힘껏 주먹을 움켜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래서 결과가 어떻게 됐냐면, 어이없게도 난 이제 점점 더 아무것도 그릴 수 없게 될 거라는 사실을 맞닥뜨리게 됐지.”
언제부턴가 무표정하게 변했던 시온의 얼굴에 다시 흐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왠지 그 미소가 눈물을 흘리는 것보다 더 슬퍼 보인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