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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엇갈리는 마음의 행방 (33) (96/152)

04. 엇갈리는 마음의 행방 (33)

“차가 싫으면, 조금 이르지만 점심을 같이 해도 좋고.”

주위를 의식해 한껏 더 예민해진 나와 달리, 눈앞의 남자는 주변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라 그 모습이 나를 더 화나게 했다.

어찌나 화가 났던지 순간 이 남자는 왜 나와 같이 있어도 아무 일도 없는 걸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물론 그런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어 재빨리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긴 했지만.

오늘은 어떻게 이 남자를 피해서 무사히 방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찰나였다. 지난 며칠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익숙하지만 낯선 얼굴이 시야를 스쳤다. 나는 반사적으로 창을 돌아보다 그대로 굳어버렸다.

우리가 지나치던 곳은 2층의 긴 복도였다. 복도에는 일정 거리마다 커다란 창이 있었는데, 환기를 시키기 위함인지 창문을 전부 활짝 열어둔 상태였다. 그래서 굳이 창 가까이 가지 않아도 아래층의 모습이 훤히 보였다. 반대로 아래층에서도 고개만 들면 건물 안의 모습이 잘 보였고.

레이몬드 2황자는 이제 막 말을 타고 영주성 안으로 들어온 듯한 모습이었다. 말에서 훌쩍 뛰어내린 후 무심코 고개를 든 그와 정통으로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곧바로 고개를 돌려야 했는데 순간 타이밍을 놓쳤다.

레이몬드 2황자 역시 그런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분명 꽤 거리가 있는 상황인데도 왠지 바로 눈앞에 레이몬드 2황자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뭘 그렇게 애틋하게 보고 있어.”

불쑥 끼어든 불쾌함 가득한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언제까지고 그렇게 있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번쩍 정신이 들어 시선을 옆으로 옮겨가자, 리하르트 아델이 짜증스러운 눈길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다 끝난 사이 아니야?”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나는 무의식중에 다시 레이몬드 2황자가 있는 방향을 돌아보려다 억지로 시선을 리하르트 아델에게 고정했다.

정신 차려, 클레어 헤더. 성녀에 이어 2황자 전하까지 위험에 빠뜨리고 싶은 건 아니잖아.

나는 힘없이 늘어뜨리고 있던 손을 한 번 힘주어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내키지 않는 손을 뻗어 리하르트 아델의 팔을 붙잡았다.

“가요, 같이 차든 뭐든 마셔요.”

놀란 기색이 역력한 리하르트 아델의 팔을 잡은 채 걸음을 옮기자, 다행히 상대가 순순히 따라와 주었다.

돌아보지 않아도 등 뒤로 시선이 내려꽂히는 게 느껴졌다.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다만, 레이몬드 2황자가 멀어져가는 내 뒷모습을 너무 오랫동안 바라보지 않기를 바랐다.

* * *

“이거 놀랍군요.”

레스티아는 놀라움 반, 흥미 반의 시선으로 클레어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곁에 있던 이는 분명 리하르트 아델 공작. 성녀와 연인 사이로 성국을 한바탕 뒤집어놓은 남자가 분명했다.

그 미모며, 주변을 압도하는 타고난 분위기며, 제 상관과 견줄 만큼 잘난 남자는 그리 흔치 않으니까.

“제가 제대로 본 게 맞습니까?”

그가 흥미롭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묻자, 조용히 같은 방향을 응시하고 있던 레이몬드의 시선이 그제야 레스티아에게 향했다. 그러나 금세 관심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저를 무시하기에 레스티아는 모른 척 한 번 더 말을 꺼내어보았다.

“결혼하신 건 아니니 불륜은 아니겠고, 바람……이라고 해야 할까요.”

“어느 쪽도 아니야.”

이번엔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레스티아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생각보다 반응이 너무 덤덤해서 이쪽이 의아할 정도였다. 피하고 싶어 하는 듯한 화제를 일부러 파고들었음에도 남 일을 얘기하는 듯한 무덤덤한 태도였으니까.

“의미를 모르겠군요.”

에둘러 말하는 법은 모르는 레스티아였기에, 솔직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을 보냈다. 레이몬드는 여전히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무표정하게 답했다.

“처음부터 그런 약속이었으니까.”

그러고는 다시 말에 훌쩍 올라탔다. 깜짝 놀란 레스티아가 한 걸음 물러나며 레이몬드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막 돌아오셨는데 어디 가십니까?”

대답 대신 레이몬드는 고삐를 당겨 그대로 말을 출발시켰다.

뒤에 남겨진 레스티아는 허망한 얼굴을 했다. 3일 동안 영주성을 떠나 있다 이제 겨우 돌아온 참이었다. 그간 내내 바다 근처의 여관에서 머무르며 「문」의 경비까지 자처하기에 왜 저렇게 초조해하시는 걸까 생각했었다.

성녀가 다치는 바람에 일전에 말했던 계획이 틀어져 저러시는 건가 했더니, 이제 보니 다른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오늘도 레스티아 자신과 다른 마법사들이 좀 쉬시라며 등 떠밀었기에 간신히 영주성으로 돌아온 터였다. 그런데 오자마자 곧바로 다시 말을 타고 나가버리는 상관을 보고 있자니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쩐지 조금 이상하다 싶긴 했다. 그동안 노골적으로 제 연락을 귀찮아하며 무시하는 일도 잦더니, 최근에는 저러다 쓰러지겠다 싶을 정도로 온종일 「문」과 결계에 매달려있었다.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도록 스스로를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꽤 위태로워 보인다 싶어 억지로 영주성으로 모셔왔더니 다시 도망치듯 나가버리셨다. 늘 무슨 일이 있든 흔들림 없는 모습의 상관만을 봐왔던 레스티아였기에 그 충격이 제법 컸다.

저나 다른 이들 앞에선 티를 안 내려고 노력하는 듯했고, 실제로 겉으로 격한 감정을 드러내진 않으셨으나……. 레스티아의 눈에는 오히려 그게 더 위험해 보였다.

레스티아는 곤란한 듯 미간을 찌푸린 채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곧 한바탕 비바람이 몰아칠 것만 같았다.

* * *

리하르트 아델의 팔을 붙잡은 채 한참을 걷고 또 걸었다. 레이몬드 2황자의 시야에선 일찌감치 벗어났다는 걸 아는데도, 우리를 지나치는 영주성 내의 사용인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알면서도, 나는 그 상태로 한참을 걸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서, 막다른 복도 끝에 선 뒤에야 겨우 멈춰 섰다. 나는 양손으로 힘주어 붙잡고 있던 리하르트 아델의 손을 스르륵 놓아주었다. 이제껏 군말 없이 따라와 준 이 사람에게도 뒤늦게 아주 조금,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나는 주춤거리며 물러나 고개를 푹 숙인 채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죄송해요, 속이 좋지 않아서 차는 다음에-.”

그런데 손을 놓아주자마자 이번엔 저쪽에서 내 손을 붙잡아왔다.

“실컷 이용해 먹고 필요 없으니 끝이야?”

“놔주세요.”

당황한 나는 얼른 손을 빼내려 했으나 힘의 우위가 확연히 차이나는 바람에 원하는 바를 이루진 못했다.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끙끙대며 애를 써봐도 마찬가지였다. 상대가 그렇게까지 손을 세게 쥔 것 같지도 않은데 그랬다.

“놔주세요, 제발.”

무엇 하나 내 뜻대로 되는 게 없다. 전부 누군가에 의해 나는 통제되고 거부당하고 숨도 쉬지 못하게 짓눌려지는 것만 같았다. 나는 아무것도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가 없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지금 이 순간에조차도.

서러움에 눈물이 밀려들었다. 그렇다고 이 남자 앞에서 또 눈물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는데, 짧은 한숨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지금은 내가 울어야 되는 거 아니야?”

내 손을 힘주어 붙들고 있던 손이 풀렸다. 대신 커다란 손이 뻗어와 내 머리를 당겨 제 가슴에 안았다.

“그래, 미안, 미안. 잘못했어. 자, 손도 놨어.”

어린아이를 어르듯 등을 토닥여주는 손길이 느껴졌다.

참고 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예전엔 이 품이 죽을 만큼 갖고 싶었고, 탐이 났다. 이 사람의 가슴에 안겨 엉엉 울고 싶을 때도 많았다. 그러면 이 사람이 다정하게 나를 안아주고 눈물을 닦아주고 내 등을 토닥여주길 바랐다.

그렇게나 바랐던 품 안에 안긴 채로 지금의 나는 무감각하게 눈물만 흘렸다. 더는 가슴이 설레지도 않았고, 이 사람의 눈짓 손짓 한 번에 울고 웃는 나도 없었다.

눈물이 나는 건 이 사람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를 떠올린 탓이었다.

그 사람이, 레이몬드 2황자가 상처받았을 거라는 걸 아니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리하르트 아델이 성녀의 손을 잡고 내 눈앞에서 점점 멀어졌을 때처럼. 그 뒷모습을 보면서 내가 느껴야 했던 참담함을 아니까.

나는 꾹 움켜쥔 주먹을 들어 리하르트 아델의 가슴을 쿵 내리쳤다.

“왜……, 나한테 왜 그랬어요.”

그리고 또 한 번 쿵.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됐잖아요.”

쿵.

힘겹게 겨우 겨우 말을 내뱉을 때마다 가슴 속에 내려두었던 원망의 감정을 토해냈다. 리하르트 아델은 그런 나를 막지도 않고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나한테 그렇게까지 잔인하게 굴지 않아도 됐잖아요.”

이 사람한테 말하는 것처럼 원망을 퍼부었지만, 사실 그건 나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미안, 잘못했어.”

진심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사과의 말을 내뱉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나도 언젠가 이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 가서 레이몬드 2황자에게 사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받아주지 않아도 되니까. 그저 미안한 마음만이라도 전할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마 그런 날은 결코 오지 않겠지만.

* * *

하루에도 몇 번이나 진동하는 마력구를 무시하는 일도 꽤 지치는 일이었다. 상대가 어떤 마음으로 제게 연락을 취해오는지를 모르지 않기에 더더욱.

아마 또 유리 녀석이나 어마마마께서 부지런히 연락해오는 거겠지 싶었다. 최근 유리 녀석은 조금 잠잠해진 것 같았으니 아마 어마마마 쪽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대로 계속 무시하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결국 레이몬드는 소파 등받이에 기대어 있던 몸을 바로 했다. 비스듬히 쥐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은 후 시선을 책상으로 가져갔다. 책상 위에 얌전히 있던 마력구가 허공에 떠올라 레이몬드가 있는 방향으로 훅 날아왔다.

레이몬드는 익숙한 듯 마력구를 받아들고는 손등으로 제 뺨을 슬쩍 쓸어보았다. 독한 술로 악명이 높은 위룩스 한 병을 비운 뒤라 혹시나 얼굴에 티가 나진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였다.

딱히 열이 나는 느낌은 없어서, 레이몬드는 마력구에 마력을 주입한 후 다시 허공에 두둥실 띄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력구 안에 흐릿하게 누군가의 모습이 비치기 시작했고,

“두째 형님!”

생각지 못한 의외의 얼굴이 등장했다. 너무 얼굴을 가까이 들이민 탓에 커다란 눈동자가 깜빡이는 모습만 시야에 들어왔지만, 두째 형님이라는 호칭으로 저를 부를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다.

“알렌.”

“네!”

구김살 하나 없이 밝게 웃는 막냇동생의 얼굴을 마주하니 어쩔 수 없이 미소가 나왔다. 태어나서 이토록 최악인 적이 있었던가 싶을 만큼, 며칠 동안 물속에 푹 가라앉은 듯 침잠해있던 기분이 조금이나마 풀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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