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엇갈리는 마음의 행방 (32)
* * *
하아.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벌써 몇 번째 허탕인지. 오늘도 성녀를 찾아갔다가 방문 가까이도 못 가보고 중간에서 제지당하고 돌아선 탓에 한숨만 나왔다. 성녀에게 직접 내가 찾아왔다는 걸 말해달라고 몇 번이나 요구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지금은 만날 수 없다는 대답뿐이었다.
덕분에 나는 3일째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 채 시간만 흘려보내는 중이었다.
시온은 나를 배려해서인지 그날 이후로 전혀 찾아오지 않고 있었고, 대신 다른 사람을 통해 2일 후에는 이곳 멜린트 영지를 떠날 거라는 말을 전해왔다.
이도 저도 결정하지 못하고 시간만 끌어 시온에게 폐를 끼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일단 성녀를 만나야 시온을 따라갈지 말지 결정을 할 수 있는데. 거기서부터 일이 막히니 답이 보이질 않았다.
“얼굴 한 번 보기 힘드네.”
한숨만 푹푹 내쉬며 걷는 도중 갑자기 머리 위로 그림자가 지며 앞을 가로막혔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익숙하지만 달갑지 않은 얼굴이 보였다.
못마땅한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리하르트 아델의 시선에 나는 찡그려지는 얼굴을 펴고 무표정으로 응수했다. 아예 무시하고 지나갈 수는 없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다음 옆으로 비켜 그를 지나치려 했다.
혹시 다시 앞을 가로막거나 팔을 붙잡아 오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대신 그는 말없이 내 옆에 따라붙어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왜? 같이 걸으면 안 돼?”
어이가 없어서 지금 뭐 하는 거냐는 눈빛으로 바라보니 오히려 그런 나를 이상하다는 듯 시선을 마주해오는 게 아닌가.
기가 막혔다. 나도 모르게 고개가 절레절레 내저어졌다. 예전이라면 감히 이 사람의 앞에서 상상도 못 할 일이라 무심코 한 행동에 나 자신도 살짝 놀라 당황했다. 그런데 그는 전혀 불쾌한 기색도 없이 계속 나란히 내 옆을 따라 걷고 있었다.
도리어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기까지 했다.
“몸은 괜찮아?”
“……네.”
나도 모르게 한 무례한 행동에 찔렸던 탓에 나는 순순히 질문에 답했다. 그래도 시선은 꿋꿋이 정면만을 향한 채 열심히 발을 움직여 걸었다. 최대한 빨리 내 방으로 돌아가 그 안에 꽁꽁 숨고 싶었다.
지난 며칠간 계속 이 사람의 방문을 무시하고 피해왔던 것처럼.
“잠깐 차 한잔 어때?”
“제가 지금…… 바빠서요.”
“뭐가 그렇게 바빠? 어차피 성녀한테 찾아갔다가 쫓겨난 거 아니야?”
하지만 이어진 질문에는 반사적으로 멈춰 서서 리하르트 아델을 돌아보았다. 그쪽도 성녀에게 갔다가 허탕만 치고 돌아온 거냐고 묻는 듯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러자 나를 따라 멈춰 선 그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아니, 난 이제 찾아갈 이유가 없지.”
당연하지 않냐는 듯 돌아보는 시선이 담담했다.
리하르트 아델이 아예 내 쪽으로 몸을 틀어 똑바로 나와 눈을 맞춰왔다. 열린 창을 통해 한차례 바람이 불어왔다. 어느새 노을이 짙게 깔린 창 너머의 풍경에 섞여 나를 내려다보는 붉은 눈동자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나, 아리아와 끝냈어.”
스쳐 지나가는 말처럼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였다. 특별할 것도 없이, 차 한잔하겠냐고 장난처럼 가볍게 물었을 때와 똑같은 투였다.
“너랑 다시 시작하려고.”
너무 아무렇지 않아서 한순간 내가 뭘 들은 건지 제대로 인식조차 못 할 만큼.
창을 등지고 선 탓에 리하르트 아델의 얼굴에는 그늘이 져 있었다. 나는 표정조차 잘 가늠이 되지 않는 그의 얼굴을 멍하니 올려다보기만 했다. 말문이 턱 막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너도 그래서 레이몬드 2황자랑 끝낸 거 아닌가?”
“당신이 그걸 어…….”
하지만 이어진 질문에는 나도 모르게 반응하고 말았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아는 거냐고 무심코 반문하려던 나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어찌나 당황했던지 손으로 입을 틀어막기까지 했다. 바보 같은 그런 내 반응에 리하르트 아델은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확신에 찬 얼굴을 했다.
“역시 맞지? 그럴 거 같았어.”
심지어 처음엔 단순히 추측에 가까웠던 것 같은 반응이라 나는 더욱 당황했다. 괜히 멍청하게 구는 바람에 이쪽 사정을 다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웠다.
“저번에 우연히 마주쳤는데, 날 아주 찢어 죽이고 싶다는 눈으로 보더라고.”
순간 짜증이 확 치밀어 이제 이 남자가 뭐라고 하든 무시하고 가려던 나는 멈칫했다. 레이몬드 2황자와 마주쳤었다는 말이 신경 쓰이기도 했고, 딱 하나 이 남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남아서였다.
나는 반쯤 돌아섰던 몸을 다시 바로해 리하르트 아델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2황자 전하와 제 일에 공작 각하는…… 전혀 관계없습니다.”
나도 작은 키가 아닌데, 레이몬드 2황자도 그렇고, 이 남자도 워낙 키가 커서 내가 한참을 올려다봐야 하는 게 조금 불만이었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나는 당당하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전하고자 했다.
“그러니 이제 제게 상관하지 않으셨으면-.”
“이제부터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지.”
마치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이 그가 내 말을 뚝 끊으며 끼어들었다. 나는 삐딱한 시선으로 리하르트 아델을 올려다보았고, 그는 어딘가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역시 이 시선의 높낮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 남자가 진짜 왜 이러는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저 남자의 속에 들어갔다 나오지 않는 한 진짜 속내가 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이제 와서 진짜 내가 좋아졌을 리도 없고. 진짜 내게 원하는 게 뭔지 알 수가 없어 머리가 아팠다.
아마 1년 전의 나였다면, 손바닥 뒤집듯 갑자기 내게 다가오는 이 남자에게 또다시 속절없이 끌려갔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바뀐 태도를 의심하기보다는 그저 사랑에 미쳐 또다시 이 남자에게 속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토록 성녀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던 남자가 이제 와서 그녀를 버리고 내게 온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그리고 반대로 그렇게나 사랑하던 사람을 한순간에 내버리고 오는 남자를 믿고 그 손을 잡는 것도 이상했고.
이 남자가 내게 바라는 건 사랑이 아니다. 내가 아무리 바보 같고 멍청해도 그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리하르트 아델을 바라보던 나는 가만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다면 진짜 이유가 뭘까. 잠시 뭔가를 생각해보던 나는 아아, 하고 작게 탄성을 냈다. 그리고 일부러 입꼬리를 당겨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그러고 보니 다른 여성 분들에 비해 저를 오랫동안 곁에 두시긴 하셨었죠. 제 몸이 그리워지신 거면 그냥 솔직하게 한 번 하게 해달라고 말씀하시는 게 어때요? 최소한 이런 식으로 의미 모를 태도를 보이시는 것보다는 예전처럼 대놓고 창부 취급을 하시는 게 더 낫겠네요.”
드디어 남자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자신만만하던 눈빛 대신 한순간 붉은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화를 내고 가려나, 설마 때리진 않겠지. 그가 한 번도 여성에게 폭력을 쓴 적은 없다는 건 알지만, 그 순간에는 조금 무서워졌다.
그래서 갑자기 그의 손이 내 얼굴 쪽으로 다가왔을 때는 잔뜩 몸을 움츠린 채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턱, 하고 커다란 손이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뭐지? 하고 눈을 뜨자 한숨을 푹 내쉬며 내 머리를 강아지 쓰다듬듯 하는 리하르트 아델이 보였다.
“나한테 화가 났으면 나를 욕을 해야지. 왜 너 자신을 그딴 식으로 취급하는 건데.”
그는 짜증을 삼키듯 고개를 돌려 잠시 먼 곳을 응시하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픽 웃으며 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하여간 답답이.”
여전히 나를 이해할 수 없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내가 잘못했으니까 기분 풀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차는 다음에 마시지 뭐.”
그러고는 이 이상 내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겠다는 듯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 보이며 가버렸다.
겨우 그로부터 해방이 된 나는 그 뒷모습에서 재빨리 시선을 돌리고 자리를 떴다.
믿을 수가 없었다. 이상해도 너무 이상했다. 조금 전 마주쳤던 남자가 내가 아는 리하르트 아델이 맞는 걸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 사람은…… 나를 저런 식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귀찮게 굴거나 눈물이라도 보일라치면, 노골적으로 성가셔하는 눈빛으로 날 보던 사람이었다. 자기가 그어놓은 선을 실수로라도 넘으려 하면 언제든 곧바로 나를 내치려 했던 사람이었다.
그랬던 사람이 왜……?
나는 내 눈으로 보고 직접 겪고도, 그가 내 기분을 살피며 내게 잘못했다고 말한 것과 나를 달래주는 듯한 행동을 보인 게 믿을 수가 없었다.
성녀에게는 어땠을지 몰라도 최소한 내가 아는 리하르트 아델은 누군가에게 맞춰주거나 하는 식의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절대. 내게도, 누구에게도.
그랬던 사람이 갑자기 내게 저러니 다른 걸 다 떠나서도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목적이 무엇인지를 제쳐두고서라도, 저런 식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는 그를 본 적이 없어 당혹스러웠다.
시간이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머무는 방에 돌아온 뒤에도, 억지로 잠을 청하려 침대에 누웠을 때도 계속 낮에 보았던 그 사람의 말과 행동들이 생각났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결국 밤새 리하르트 아델에 대한 생각으로 잠을 설쳤다.
“오늘은 어때? 차 한잔할 시간 있어?”
다음날에도 밤새 내 머릿속을 떠돌아다니던 남자가 한물간 유치한 대사를 던지며 눈앞에 나타났다. 아예 행동반경을 다 읽히고 있는 것 같았다.
잠을 거의 못 잔 탓에 머리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태였던 나는 예의를 차릴 생각도 않고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짜증이 났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까지도 결국 성녀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이대로 어쩌면 좋을까, 앞으로의 내 일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팠다. 그런데 이 남자까지 계속 뜻 모를 행동들로 나를 혼란스럽게 하니 점점 더 화가 났다.
게다가 어제는 주위에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오늘은 우리 곁을 지나가던 영주성의 사용인들이 잔뜩 있었다. 다들 눈치껏 이쪽을 힐끔거리며 일부러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는 게 다 보였다.
이 좁은 영주성 내에서 레이몬드 2황자의 약혼녀라고 알려진 여자가 다른 남자와 꽤 가깝게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저들 입장에선 당연히 궁금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벌써 자기들끼리 뭔가 열심히 추측을 하며 소곤거리는 모습들이 내 신경을 툭툭 건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