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엇갈리는 마음의 행방 (31)
* * *
리하르트는 클레어를 찾고 있었다.
레이몬드 2황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클레어가 머물고 있던 방에 직접 갔었다. 하지만 클레어 본인도 레이몬드 2황자도 없이 방은 텅 빈 상태였다.
아직도 의식을 차리지 못한 걸까 걱정스럽던 것에 비하면 나은 편이었지만, 왠지 이대로 얼굴도 보지 못하고 가는 건 조금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 경비를 서고 있던 다른 기사들에게 물어 알아보니 아무래도 클레어는 후원 쪽으로 간 것 같았다. 후원은 리하르트가 현재 서 있는 곳에서부터 정반대에 있었다. 살짝 귀찮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으나 리하르트는 결국 후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틀 전, 한 번도 아니고 연달아 성녀를 습격하는 시도가 있었다. 게다가 자객은 유유히 제 할 일을 마친 뒤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아무리 숙련된 자객이더라도 그렇게까지 성녀에게 접근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고 자만했던 자신들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오죽하면 마법사 중 하나가 적과 내통한 게 아니냐는 의혹까지 나왔지만, 레이몬드 2황자가 주변 어디에서도 마법이 사용된 흔적이 없다고 단언했기에 그 의혹은 금세 불식됐다.
유령이라도 된 양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져버린 자객을 두고 성국에서는 당연히 난리가 났다. 성녀의 호위를 소홀히 한 것이 아니냐. 이래서 성녀 호위를 더 늘려달라 했던 것인데 무시해서 이 사달이 났다. 성녀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전 대륙적인 손실이며 모든 건 제국의 탓이라 입에 게거품을 물고서 비난을 하고 나섰다.
영주성 내부. 황실 기사단장인 리하르트 자신은 물론, 마탑의 주인인 레이몬드 2황자까지 이곳을 떡하니 지키고 있는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성녀를 시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경악할 일이건만, 실제로 성녀가 독화살에 맞아 사경을 헤매는 지경에 이르렀다. 리하르트 자신조차 충격이 상당했는데, 그 모습을 직접 눈앞에서 목격한 클레어 본인은 어떻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워낙에 심약한 사람인데 쓰러지지 않고 버티는 게 도리어 이상할 터였다. 극미량이라고는 해도 클레어 역시 독에 노출되기도 했고.
의식을 잃은 채 파리한 안색으로 레이몬드 2황자의 품에 안겨 있던 클레어의 모습이 내내 리하르트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지난 이틀간 성녀를 시해한 자객의 흔적을 쫓느라 그 역시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틀을 내리 혹사당하고 겨우 휴식이 주어진 참에 그는 제 거처로 돌아가 쉬는 대신 클레어를 찾고 있었다.
이상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 역시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원래라면 지금 자신이 걱정하고 찾아가야 할 사람은 따로 있지 않나. 모든 걸 버리고도 그 사람 하나만을 택해도 좋다고 여겼던 존재로부터 등을 돌리고, 제게 있어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생각했던 클레어 헤더에게 가고 있다니.
아무리 제가 버린 장난감에 다른 이가 눈독을 들이는 게 싫어서 비틀린 독점욕이 생겨났다고 해도, 지금 자신의 행동은 이치에 맞지 않았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애달파 가슴이 미어지던 사람이 아니라, 필요 없어진 종잇조각을 구겨 내버리듯 외면했던 사람을 보기 위해 휴식마저 포기한 자신을 누가 어찌 이해할까.
누군가 제게 제정신이 맞느냐 물어도 선뜻 아니라고 부정하진 못할 듯했다.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를 오래 생각하는 건 귀찮다. 효율이 썩 높지도 않고. 어차피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성녀 아리아에게 이별을 고하고 클레어 헤더에게 다시 돌아와 달라 말한 현실이 바뀌진 않으니까.
리하르트는 왜? 하고 떠오르는 질문을 모른 척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 충실하기로 했다.
지금 그는, 성녀 아리아가 아니라 클레어를 보고 싶었다. 아직까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있는 건 아닌지, 또다시 어딘가에서 쓰러져 있는 건 아닌지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후원이 가까워질수록 리하르트의 걸음도 조금씩 빨라졌다. 진짜로 클레어가 어딘가에 쓰러져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이상하게 마음이 급해졌다. 그저 무사히, 후원을 거닐다 자신을 발견하고는 불쾌한 얼굴을 하는 모습이라도 보고 싶었다.
초조하게 걸음을 옮기는 리하르트의 시야에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인영이 눈에 들어온 건 그때였다. 거의 뛰듯이 걸음을 옮기는 저와 반대로 상대는 아주 느리게 걸어오고 있었다.
무심코 속도를 늦추고 시선을 가져가자, 그 상대가 레이몬드 2황자라는 건 곧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멀리서 보아도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처럼 화려한 금색 머리칼과 눈동자, 수려한 외모가 단숨에 시선을 잡아끄니까.
미카엘 황태자와 달리 레이몬드 2황자와는 원래도 그리 사이가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사이였으나, 최근엔 드러내놓고 자신을 무시하거나 적대시하는 느낌이라 대하기가 껄끄러웠다. 그 이유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충분히 이해는 간다만.
리하르트 역시 레이몬드 2황자가 탐탁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어쩔 땐 저 남자를 향한 원망의 감정이 들 때도 있었다. 왜 하필 클레어 헤더에게 관심을 가져선, 당신이 아니었다면 나도 이미 한 번 버렸던 여자에게 다시 눈길이 갈 일은 없었을 텐데.
평소 이성에겐 관심도 없던 사람이 갑자기 관심을 보이는 여자가 있다면 누구라도 흥미가 생기지 않겠는가. 게다가 그 주인공이 카지스 제국의 레이몬드 알렉 카지스라면 더더욱.
그래도 상대는 제국 적통의 황자다. 아무리 제가 많은 공을 세워 황제와 황태자의 신뢰를 얻고 있다 해도 감히 적통의 황족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리하르트는 그 자리에서 멈춰 서서 다섯 걸음 정도를 남겨놓고 가까워진 그를 향해 인사를 올리려 했다.
“전-.”
그러나 리하르트는 미처 한마디를 내뱉기도 전에 마주한 싸늘한 시선에 얼어붙었다. 시선이 마주친 건 아주 찰나였으나, 그 찰나가 한순간 영겁과도 같게 느껴졌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과 시선이었다. 굶주림에 난폭해진 맹수가 먹이를 발견한 순간의 눈빛이 저러할까 싶었다. 분노도, 적의도 아닌, 순수한 살의가 황금색의 눈동자 안에서 넘실거리며 리하르트를 위협했다.
리하르트는 그 순간 진정 레이몬드 2황자가 저를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검을 뽑아 들거나 몸을 피할 틈도 없이 시퍼런 날을 세운 무형의 창이 제 몸을 관통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정신이 들고 보니 레이몬드 2황자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석상처럼 굳어있던 몸을 돌려 겨우 뒤를 돌아보니 처음 보았을 때와 똑같은 느린 속도로 걸어가고 있는 레이몬드 2황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잠깐이었지만 그토록 무시무시한 살의를 내뿜었으면서도 이미 그 따위에겐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이 걸어가고 있었다.
어째서냐고, 물어봐도 대답해줄 사람이 없었다.
어느새 턱 끝에 맺힌 식은땀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리하르트는 한참을 그 자리에서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 * *
―그만 좀 해.
그날 하루는 이상하리만치 최악이었다.
조별 과제 발표날이었다. 애초부터 제대로 참여도 하지 않았던 조원들, 발표 당일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강의실에 들어온 발표자. 자신이 며칠 동안 밤새워 만든 ppt가 모두의 앞에서 최악의 평가를 받게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허를 찌르는 교수의 지적에 발표자는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허둥댔고, 강의실 안에 있던 학생들이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개중에는 저만 보면 별 이유도 없이 시비를 걸어대는 또라이 같은 복학생 선배 놈도 있었다. 일부러 제 쪽을 보면서 기분 나쁘게 처웃어대는 꼬라지를 보고 나니 화가 치밀어 머리가 어떻게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떠들썩해진 강의실 안, 제일 앞자리에 앉아 웃지도 않고 걱정스럽게 저를 응시해오는 여자애가 있었다. 대학에 입학한 뒤로 자신이 줄곧 짝사랑해왔던 친구였다.
선한 인상에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다정하고, 안녕하고 먼저 인사를 건네주는 목소리가 미치도록 사랑스러운 여자애. 거기에 웃는 얼굴은 더 예쁜 여자애. OT때 처음 만난 뒤로 줄곧 자신이 좋아하고 있는 사람.
얼굴이 화끈거렸다. 최악의 성적을 받게 될 거라는 사실과 자신의 ppt가 웃음거리가 된 것보다 그 친구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저를 더 부끄럽고 속상하게 만들었다.
강의가 끝나고 자주 어울리는 친구들과 함께 취기가 얼큰하게 오를 때까지 술을 퍼마시고 새벽 늦게 집으로 돌아왔지만, 기분은 여전히 바닥을 기고 있었다.
―허구한 날 소설, 소설, 소설. 그놈의 소설! 어쩔 수 없이 웃으면서 들어주니까 내가 진짜 너랑 똑같은 줄 아냐?
술에 취해 반쯤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도 화풀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저를 따르던 어린애한테 일부러 상처를 주고 괜한 분풀이를 했다. 그날 하루 기분이 최악이었던 것도, 술에 취했던 것도, 전부 핑계일 뿐이었지만 그 순간에는 정말 견딜 수가 없었다.
―오타쿠처럼 맨날 혼자 그딴 거나 보고 있으니 왕따를 쳐 당하지. 나도 부모님 부탁만 아니었으면 애초에 니 같은 거랑 말도 안 섞었어, 알아?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 가서 눈 흘긴다는 속담이 딱 제 꼴이었다. 어디서 처맞고 와서는 가뜩이나 상처가 많은 애한테 폭언을 쏟아부어 더 많은 상처를 안겼다.
―현실을 좀 살아라, 멍청아.
그 직후 방에서 뛰쳐나온 아버지가 주먹으로 제 얼굴을 힘껏 후려치셨다.
아버지는 좋은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나쁘지 않았고 옳은 행동을 하셨었다. 그리고 그 애도 나쁘지 않았다.
그곳에서 나쁜 건 자기 자신뿐이었다.
“아리아님!”
“정신이 드십니까, 아리아님!”
“세상에,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눈을 뜨자 낯선 얼굴도 낯익은 얼굴도 보였다. 그들 대부분은 신관들로, 하나같이 절망에서 막 건져 올려진 듯한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며 울부짖고 있었다.
‘나 안 죽었구나.’
아리아는 호들갑스러운 주변의 분위기를 익숙하다는 듯 무시한 채 가만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눈을 깜빡여보고, 숨을 길게 내쉬어보고, 손가락을 까딱여보기도 했다.
분명 자신은 살아 있었고, 여전히 눈앞에 보이고 만져지는 것, 들리고 느껴지는 것, 모든 게 현실과 똑같이 생생하기만 했다.
그런데도 이곳은 제가 아는 현실이 아니다. 이토록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세계가 사실은 진짜가 아니라, 전부 그 애가 써낸 어설픈 소설에 불과하다는 걸 아리아는 알고 있었다.
‘왜 죽이지 않은 걸까.’
이유가 뭘까. 제게 복수하고 싶었던 게 아닌가.
죽이는 게 다가 아니라고 생각한 건가. 어쩌면 살려두는 게 더 고통받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살아서 이곳에 남아 죽을 때까지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에 휩싸여 살게 하려는 걸 수도 있다.
‘너는 대체 날 어떻게 하고 싶은 거야?’
아리아는 이제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눈을 감아버렸다. 그리고 이곳에 온 뒤로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부르고 또 불렀던 이름을 마음속으로 되뇌어보았다.
‘대답해, 신은지.’
이 세계의 창조주이자, 『이세계 소녀, 성녀 되다?!』를 쓴 제 하나뿐인 사촌 동생의 이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