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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엇갈리는 마음의 행방 (30) (93/152)

04. 엇갈리는 마음의 행방 (30)

“죄송합니다.”

간신히 무표정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눈이 마주치면 혹시라도 시선이 흔들릴까 무서웠다. 그래서 레이몬드 2황자의 눈이 아니라, 그의 어깨에 시선을 둔 채로 담담히 말을 이었다.

“더는 오해받고 싶지 않아서요.”

“……오해?”

반응이 조금 느렸다.

레이몬드 2황자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왠지 조금 전보다 더 낮아진 목소리가 의문을 담은 채 내 귓가에 닿아왔다.

치마를 움켜쥔 손에서 식은땀이 배어났다.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것 같아 이로 꾹 한 번 깨물었다.

나 지금 잘하고 있는 걸까? 익숙치 않은 거짓말을 하려니 자꾸만 자신감이 사라졌다. 아무렇지 않게 말해야 해. 거짓말이라는 걸 들키지 않게 말해야 해. 마음속으로 스스로에게 세뇌를 걸 듯 말하며 나는 애써 평온을 가장했다.

“네, 리하르트 아델 공작 각하께 오해받고 싶지 않아요.”

이를 악문 노력이 헛되지 않았던지. 당장 내 귓가에 들리는 내 목소리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격한 감정 하나 없이 담담하게 내뱉어지는 음성은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은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 아주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이틀 전 그날, 공작 각하께서 제게 다시 돌아와 줄 수 없냐고 했어요. 아직 제게 마음이 남아있었다고,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시작이 나쁘지 않았던 덕분에 뒷말은 훨씬 더 수월하게 흘러나왔다.

“그땐 너무 놀라서 대답을 못 했지만 공작 각하의 마음을 받아들이려고요.”

구역질이 치밀 정도로 나를 화나게 만들었던 리하르트 아델의 변한 태도들도 지금 이 순간에는 도움이 되고 있었다. 진심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 남자가 내게 돌아와 달라고 말했던 건 사실이었다. 그게 사실이었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태연히 거짓말을 할 수 있게 된 거고.

“저도 아직…… 그 사람을 좋아하니까.”

언제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지금과는 전혀 달랐던 상황에서, 레이몬드 2황자와 마주 앉은 채로 나는 아직 리하르트 아델을 사랑하고 있노라고 말했던 기억이 났다.

그때 레이몬드 2황자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던가. 그리고 지금은……?

문득 불필요한 호기심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이제 이렇게 황자 전화와 단둘이서만 만나는 일도 없었으면 해요.”

아주 먼 길을 걸어온 것처럼 길게만 느껴진 대사를 끝마치고, 나는 느리게 시선을 들어 레이몬드 2황자를 바라보았다.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는 딱히 어떤 표정도 짓고 있지 않았다. 충격을 받은 것도, 슬퍼하는 것도, 화를 내는 얼굴도 아니었다. 그저 꼼짝도 않은 채 무감각한 눈동자로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지금까지 내가 한 말들을 하나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리하르트 아델과…… 당신이.”

그가 아름다운 금색 눈동자를 한 번 느리게 감았다 떴다.

“다시 만난다고.”

그제야 표정이 조금 보이는 것 같았다. 조금 넋이 나간 것 같기도 했고,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질문인지 혼잣말인지 모를 낮은 중얼거림에 가만히 답했다.

“……네.”

잠시 내 얼굴이 아니라 허공을 헤매던 레이몬드 2황자의 눈동자가 다시 나와 시선을 맞춰왔다. 너무 투명해서 바닥이 보일 것처럼 깊은 금색 눈동자에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내 말을 부정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건 분노와도 닮아있었고, 고통스러운 빛을 애써 삼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남자가…….”

하.

레이몬드 2황자의 눈동자에 비친 감정들을 짐작해보기도 전에 그가 허탈한 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손을 들어 눈가를 짓누르는 그의 손등이 아주 잠깐 떨렸다.

“오해라.”

잠시간의 침묵 후에 다시 입을 연 그가 한숨인지 헛웃음인지 모를 숨을 재차 내뱉었다.

“그렇겠네요. 그 남자에게…….”

그러고는 고개를 푹 숙여버리는 바람에 또다시 그의 표정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이어지는 침묵에 점점 마음이 무겁고 불편해졌다. 나는 드레스 치마 아래로 감춰진 한쪽 발을 뒤로 물리며 돌아설 준비를 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이제 대화는 끝이겠거니 생각했다. 레이몬드 2황자도 더는 나 같은 한심한 여자와는 대화를 하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자기를 버렸던 남자에게 어리석게도 다시 되돌아가겠다고 말하는 여자가 얼마나 바보 같아 보일까. 깊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남은 정도 뚝 떨어질 만큼 짧은 인사만을 남기고 돌아서서 가려고 했건만, 몸을 돌리는 순간 등 뒤에서 뻗어온 팔이 내 손목을 단단히 그러쥐었다.

“어째서 그 남자인 겁니까.”

반강제로 몸이 돌려 세워진 나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레이몬드 2황자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째서 그딴…….”

뭔가를 꾹 참고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였다. 흘러내린 머리칼에 눈동자가 가려져 표정을 알 수 없지만, 내 손목을 강하게 붙든 손을 타고 느껴지는 떨림만으로도 그의 감정이 생생히 전달되는 것만 같았다. 그에 압도된 탓일까. 여기서 그때처럼 손을 뿌리치고 가야 한다는 걸 아는데도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유리는요?”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던 레이몬드 2황자가 조용히 물었다.

“그 애를 위해서 함께 거짓말을 해주기로 한 거 아니었습니까?”

멋대로 약속을 파기하는 나를 비난하는 듯한 그의 말에 나는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었다. 혼자 유리 황녀가 나를 버린 것이라 착각하여 황성을 빠져나왔던 그때와 지금은 상황 자체가 달랐다.

그때는 정말 실수였지만 지금은 내 자의로 레이몬드 2황자와의 약속을, 카롤리나 황후와의 계약마저도 어기려 하는 거였으니까.

“죄송합니다.”

괴롭지만 어쩔 수 없다는 걸 아니까 참았다. 죽을 만큼 서럽고 억울하지만 이렇게밖에 할 수 없다는 걸 아니까 견뎠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니까.

“나는…….”

힘겹게, 끊어질 듯 위태로운 음성이었다.

“나는 안 되는 겁니까?”

커다란 손이 더 강한 힘으로 내 손목을 붙들어왔다.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그딴 남자보다 내가 훨씬 더 영애에게 잘해줄 수 있는데. 평생 영애 하나만을 바라볼 자신도 있는데.”

누군가 예리하게 날이 선 검을 내 가슴에 푹 찔러넣는 것만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난 이미 이렇게나 당신을, 클레어 헤더를 좋아하게 되어버렸는데.”

분명 괴로워하는 목소리로 말을 잇고 있는 건 레이몬드 2황자인데, 어째서 내가 더 괴로운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째서 내가 아니라 그 남자인 겁니까.”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무표정이 깨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눈가를 일그러뜨리며 이로 입술을 짓이겼다. 그렇게라도 안 하면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

왜, 이 사람이 이런 말까지 해야 하지.

어째서 레이몬드 2황자가 고작해야 나 같은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해야 하지.

왜, 왜, 어째서, 이 사람에게서 내 모습을 겹쳐봐야 하는 걸까. 리하르트 아델에게 사랑을 구걸하며 울기만 하던 비참한 내 모습이, 어째서.

도망치고 싶었다. 더는 이 사람과 마주하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전부 거짓말이라고, 사실 나도 당신 곁에 있고 싶다고. 유리 황녀와 알렌 4황자의 곁에 돌아가고 싶다고. 나도 떠나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기에, 발밑이 전부 무너져내리는 듯한 참혹함을 견디며 이를 악물었다.

레이몬드 2황자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어 내 표정을 확인하지 못해 다행이었다.

나는 그에게 붙잡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밀어냈다.

더 이상은 이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더는 나 같은 사람 때문에, 상처받고 괴로워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그래서 말할 수밖에 없었다. 밀어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마주 서서 레이몬드 2황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지금도 불안해 미칠 것 같았다. 언제 어디서 화살이 날아오지 않을까, 레이몬드 2황자의 등 뒤로 누군가 검을 휘두르진 않을까, 그의 머리 위로 깨진 유리 조각들이 쏟아지진 않을까. 두려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사람에게 붙들리고 싶어 하는 내 이기적인 마음이 무서웠다. 이 사람마저 잔혹한 운명 속으로 끌어들이면서까지 이 사람의 곁에 머무르고 싶은 내 마음이 역겹고 끔찍했다.

레이몬드 2황자의 손이 내가 밀어내는 대로 순순히 밀려났다.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마음과 반대로 조금은 아쉽고 서글픈 마음으로 그의 손을 벗어났다.

“그날. 연회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보내고 싶지 않아.”

그런데 손이 풀려남과 동시에 다시 붙잡혔다. 이번에도 그가 나를 붙들거라고는 생각 못했던 나는 당황해 표정을 굳혔다.

“놔주세요, 황자 전하.”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었죠. 평생, 그 남자 외엔 누구도 사랑할 수 없을 거라고.”

앞서와 달리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목소리였다. 분노도, 고통도, 원망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헤더 영애는 처음부터 선을 그었었죠. 그렇게.”

레이몬드 2황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둡게 가라앉는 눈가가 일그러진 채 나를 바라보았다.

상처 받은 눈이었다. 아닐 거라고 부정하지도 못할 만큼 확실하게. 내가 그토록 마주하지 않길 바랐던 눈이었다.

“내가 멋대로 그 선을 넘은 거고.”

울 것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레이몬드 2황자가 웃었다. 비웃음에 가까운 미소였다. 스스로를 향한 것인지 나를 향한 것인지 모를.

“내 마음은 영애에게 거북하고 곤란하기만 했을 터인데, 눈치도 없이.”

내 손목을 붙들고 있던 레이몬드 2황자의 손에서 힘이 스르륵 풀렸다. 어느새 붉은 자국이 남은 내 손목을 미안함이 담긴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레이몬드 2황자가 말했다.

“가요.”

“…….”

“돌아보지도 말고.”

일부러 나와의 거리를 벌리듯 그가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금색 눈동자가 자조 섞인 어색한 미소와 함께 내 시선을 피했다.

“이대로면 정말 당신을 가둬서라도 아무데도 못 가게 하고 싶어질 것 같으니까.”

그리고 멍하니 저를 바라보기만 하는 내게 더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러니 가요. 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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